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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우와, 크리스티나란 애, 되게 기분 나빠 보인다.」
「누가 자길 좋아한다고 하는 게 나쁜 일이다요?」
「그러게.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고백해서 짜증났나?」
「어머, 그런 게 아니에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두 정령 사이로 끼어든 카니가 손을 나긋나긋 고개를 내저었다.
「제 생각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카니는 동그란 다홍빛 눈망울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짚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아주 복잡해서, 딱 정의 내릴 수는 없답니다. 물론 상대가 마음에 안 들기도 했겠지만 너무 뜬금없이 들이대서 당황한 마음도 있었을 테고.」
「당황하면 당황한 거지 왜 화가 나는데?」
「그 크리스티나란 아이가 마지막에 화낸 건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요. 평소에 좋아하는 상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왔다면 그게 투사되어서 더욱 화가 치밀어오를 수 있죠.」
「웅? 투사가 뭐다요?」
「알게 모르게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덧씌워 본단 뜻이야. 은밀한 속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보는 기분일걸.」
유니의 보충 설명에도 토니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결국 스스로한테 화가 났단 뜻이 된다요?」
「후후, 비슷한 의미겠네요. 하지만 조금 달라요.」
카니는 붉은 날개를 파닥여 날아가 쥬다스의 손가락을 꼬옥 붙잡았다.
「만약 우리가 하급정령이라고 쳐요. 이그레트와 계약을 하고 싶어도 주변에 다른 강하고 멋진 정령들이 많으니까 차마 말을 걸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그가 나 따위와 계약해 줄까, 라는 생각 때문에.」
「에에에! 나요는 하급정령 아닌데!」
「만약에요, 만약에. 그냥 상상해 봐요. 만일 이그레트가 우리와 계약하지 않아서 우린 그 주위만 맴돌고 있다면. 그런 와중에 다른 인간이 계약을 요청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계약, 할 수 있어요?」
「……?!」
예시를 들은 토니는 금방 울먹울먹한 표정이 되었다.
상상만으로 충격 받은 땅의 정령은 휘익 날아 계약자의 품에 달라붙어 빼앵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어! 안 할 거다요! 절대절대 안 할 거다요!」
“이런, 토니. 진정하렴.”
쥬다스는 패닉 상태에 빠진 토니를 양손으로 감싸주었다.
그 안에서 토니는 훌쩍거리며 꿍얼거렸다.
「그치만 이그레트. 네가 아니면 다른 계약자는 싫다요.」
“그래, 알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란다.”
‘너희가 아니면 지금의 나도 없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따뜻한 애정에 토니는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땅처럼 울진 않았지만 기분이 저조해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유니도 그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으며 말했다.
「흐응, 카니 덕분에 대충 이해는 했어. 결국 스스로의 문제네.」
쥬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성별을 오인받은 것도 기분 나빴던 모양이지만.’
본질적으로 성별이 나누어지지 않은 정령들에게는 굳이 언급하여 혼란을 초래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상처 난 자존심을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정작 그 역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 * *
사막의 밤은 제법 추웠다.
이미 계절상으로는 봄이었지만 다시 겨울이 찾아온 듯 서늘함이 감돌았다.
담소를 즐기던 여행자들은 밤이 되자 모두 휴게소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삐이익. 삐익.”
“흐아암……. 알았어. 알았다고, 플루비.”
한밤의 적막을 깨고 미니 와이번을 포대 자루처럼 품에 안아 든 바이칼이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자다 깨어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아오, 이 밤잠도 없는 뱀대가리 자식.”
“삐이!”
사막의 건조한 날씨는 가뜩이나 몸에서 수분을 빼내 조그맣게 변한 플루비에게 버티기 힘든 갈증을 안겨주었다.
본래 물이 많은 곳에서 살아가는 블루 와이번이었으니 사막은 놈에게 있어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이칼은 한밤중에 삑삑 울어대는 플루비를 데리고 휴게소 옆의 오아시스로 향했다.
“진짜 귀찮게 구네.”
“삐…….”
“알았어, 시끄러우니까 울지 마. 뭔 놈의 와이번이 마음은 약해빠져서.”
바이칼의 질타에 플루비는 금방 시무룩해져서 울먹였다.
그 바람에 당황한 그가 서둘러 오아시스로 걸음을 옮겼다.
“다 왔네. 이제 너 알아서 놀든가.”
“삐이!”
플루비는 잔뜩 신난 기색으로 날개를 파닥였다.
그래 봤자 날아오르진 못하고 짧은 다리로 물을 향해 종종 뛰어가는 놈을 쳐다보며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얌마, 그렇다고 너무 커지면 사람들 놀라니까 물은 조금만 마시고.”
그의 당부를 알아들은 플루비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 촉촉한 땅바닥에 일단 몸을 비볐다.
그리고 고개만 쑥 뻗어 물을 할짝할짝 핥아먹기 시작했다.
바이칼은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주변을 훑어보았다.
플루비가 물을 할짝거리는 소리 외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흑…… 흑흑…….”
“아아아 쫌! 진짜!”
하필 괴담을 몹시 두려워하는 바이칼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루바흐에서 만났던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를 떠올리곤 밀려오는 신경질에 이를 갈았다.
“왜, 왜 자꾸 나한테만.”
“으흡, 흑흑, 흑흑흑.”
“…….”
어둠에 잠긴 오아시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그의 등골이 쭈뼛 서도록 만들었다.
바이칼은 견디지 못하고 어색하게 플루비를 불렀다.
“플루비, 얌마.”
“삐잉?”
그사이 물을 신나게 켜고 대형견 수준으로 몸이 불어난 플루비가 뒤뚱뒤뚱 달려왔다.
바이칼은 플루비를 덥석 끌어안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너도 이 소리 들려?”
“삐?”
“막 사람 우는 소리 같은 거.”
“삐이이!”
플루비는 꼬리를 한 번 살랑이고는 그의 품에서 홱 벗어났다.
놀란 바이칼이 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앞으로 우다다 달려 나간 상태였다.
그는 공포에 떨면서도 플루비를 쫓아 다리를 움직였다.
“어, 어, 어디 갔어……?”
“삐익.”
어둠 속에서 답이 돌아왔다.
바이칼은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다가갔다.
“플루비?”
“훌쩍. 누구세요?”
“으히이익!”
갑자기 물가에서 일어선 사람과 마주친 바이칼은 그대로 숨이 넘어갈 뻔했다.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상대방은 눈물을 닦으며 인사했다.
“아, 크리스 경과 같은 기사님……훌쩍.”
“……유리엘 양?”
다행히도 서로 아는 사이였다.
바이칼은 그제야 귀신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쓱하게 엉덩이를 털며 일어선 그를 향해 유리엘이 콧물을 훌쩍거리며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산책이죠, 산책. 으하하.”
“삐이!”
그에게 달려와 다시 안긴 플루비가 긴 꼬리를 휘저으며 기분 좋게 울었다.
“늦은 밤에도 펫을 산책시켜 주다니. 대단해요.”
“아니 뭐. 그러는 유리엘 양은 여기서 왜.”
차마 왜 울고 있었냐고 묻지는 못하고 어설프게 말이 끊겼다.
유리엘은 헤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였으니까요. 태어나서 처음 고백한 건데.”
“크흠. 그거 안타깝군요. 힘내십쇼!”
이번에도 상처받을까 차마 크리스티나가 실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어설픈 위로만 흘러나왔다.
“아뇨, 전혀 안타깝지 않아요.”
유리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크리스 경 말이 맞았어요.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네, 심지어 지금 돈도 똑 떨어져서 밥도 못 사먹는 신세예요. 낙타를 팔아야 며칠 빵이라도 사먹을 텐데.”
“어이고, 그런 상황에서 잘도 따라왔습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무모하군요.”
“그러게요. 정말 무모하고, 바보 같고, 하등 쓸모도 없는…… 그런 게 나였네요.”
‘아니,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바이칼이 당황하여 입을 다문 사이 그녀의 볼에 다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지저분해진 소매로 볼을 슥슥 닦아낸 유리엘은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살며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고요. 나 스스로 뭘 해야겠단 생각도 안 해봤어요. 그냥 결혼하면 다 해피엔딩일 줄 알았죠.”
바이칼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두운 밤중에도 오아시스 위엔 달과 별이 둥실둥실 빛났다.
“돈이 없어 서럽다는 게 뭔지 몰랐어요. 시즈 가문의 영애가 아닌 ‘그냥 유리엘’은 어디서도 내세울 게 없다는 것도. 제일 짜증나는 건 지금 이 와중에도 배가 고파 죽겠다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몸은 거짓말을 못하니까.”
“흐어엉! 너무 한심해서 창피해 죽을 것 같아요. 크리스 경이 얼마나 우스워했을지.”
‘아니, 그보단 좀 다른 의미로 우스웠을 것 같은데.’
의도치 않게 남자로 오인받은 크리스티나의 입장은 그야말로 난센스였다.
바이칼은 싸하게 굳었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곤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뇨.”
“잘 생각하셨…… 뭐요?”
당연히 집에 간다는 결론이 나올 줄 알았던 그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적어도 나 스스로 무언가 할 줄 알게 되고, 그걸로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을 책임질 수 있게 되고 나서.”
유리엘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 돌아갈래요.”
모래먼지를 뒤집어써 구질구질한 얼굴이었지만 유리엘은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톡 바닥으로 추락했다.
“에이, 더는 쫓아다니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요. 이젠 정말 혼자서 다녀봐야죠.”
“허, 정말입니까?”
“네! 그래도 털어놓으니까 속이 엄청 시원하네요. 고마워요. ……참, 경은 이름이 뭐예요?”
그녀는 여태 상대방 이름도 모르고 떠들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유리엘을 향해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바이칼입니다.”
“고마웠어요, 바이칼 경.”
바이칼은 그 순간 문득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어두컴컴했는데 유리엘 양 근처는 좀 밝은 느낌이.’
주변과 비교해 봐도 확연히 그랬다.
처음엔 어둠 속에서 눈이 익어 그런가보다 싶었던 것이 시야마법이라도 발동한 것처럼 세세한 움직임까지 잘 보이고 있었다.
바이칼은 그녀의 몸이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미약하게나마 빛을 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멀어지는 유리엘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일어선 순간이었다.
“잠시만…….”
“으읍!?”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정체 모를 사내가 유리엘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불시에 입을 틀어 막혀 그 안에 묻은 마취가루를 들이켠 유리엘은 이내 시체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목격한 바이칼이 로브 속에서 황급히 스태프를 꺼내 들려 했다.
“무슨 짓을!”
퍼억!
뒤통수가 후끈해지며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바이칼은 스태프를 놓치며 흐릿한 시야를 깜빡였다.
“……어?”
주르륵, 목선을 타고 뜨끈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 앞으로 유리엘을 둘러업은 사내가 다가왔다.
“목격자는 어쩔까?”
“치워야지. 일단 데리고 가.”
바이칼을 뒤에서 습격한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그를 똑같이 둘러업었다.
그러자 곁을 지키고 있던 플루비가 발작적으로 파닥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삐익! 삐애액!”
“뭐야, 이 미친 새는.”
크기가 너무 작아 미처 와이번이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한 그들은 달려드는 플루비를 발로 뻥 걷어찼다.
“끼엑.”
작아진 만큼 힘도 줄어든 플루비는 맥없이 발길질에 차여 데굴데굴 굴러갔다.
플루비가 오아시스 안으로 퐁당 빠지는 것까지 지켜본 사내들은 각각 유리엘과 바이칼을 짐짝처럼 짊어진 채 훌쩍 뛰어 자리를 벗어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간만에 쉬는 날이라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새해 짱..! 연휴 짱짱...!!
Q. 그러고보니 옆동네마음읽는청년은 언제쯤오나요?
A. 그...그 청년(?)은 지금 작업 중에 있습니다.ㅠㅠ;! 더 늦지 않게 들고 오겠습니다!
함께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