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20화 (12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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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잠시 뒤, 고요하던 오아시스의 수면 위로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왔다.

촤아아악-

거대한 두 날개가 먼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차가운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푸른 비늘로 뒤덮인 블루 와이번이었다.

본래의 몸 크기를 회복한 플루비가 번들거리는 주홍빛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예민한 와이번의 후각에 바이칼이 흘린 피 냄새가 잡혔다.

“그르륵.”

혈흔만 남아 있을 뿐 어디에도 바이칼은 보이지 않았다.

플루비는 몹시 당황하여 목을 울렸다. 그리곤 있는 힘껏 울부짖었다.

“뭐야! 무슨 소리지?”

“습격인가?”

단잠에 빠져 있던 투숙객들이 혼비백산하여 깨어났다.

사방에 불이 밝혀지고 천막 밖으로 하나둘 달려 나오던 중 누군가 비명을 내질렀다.

“드, 드래곤이다!”

용족의 구분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플루비를 드래곤이라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루비는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불안과 놀람을 이기지 못하고 푸드덕 날아오른 상태였다.

놈은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질주하다가 이내 모래언덕 위로 브레스를 토해냈다.

길게 열선이 그어지며 확 치솟은 불길로 인해 후끈한 열기가 사막의 밤을 밝혔다.

“플루비.”

그때, 플루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태롭게 비행하던 플루비의 머리 위에 녹색 바람이 원을 그리며 흩어졌다.

놈의 거대한 머리 위에 내려선 쥬다스는 간단히 균형을 잡으며 날뛰는 플루비를 달랬다.

“쉬이. 진정하련.”

“…….”

후웅-

녹색 기류가 와이번의 두 날개와 몸통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바람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모래언덕에 내려앉은 플루비를 향해 나머지 일행이 말을 달려왔다.

휴게소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크워엉.”

“그래, 착하구나. 플루비,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래?”

쥬다스는 플루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물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무엇이든 그 내면을 읽어낼 수 있는 물의 정령왕 루니가 그의 곁에서 플루비의 기억을 읽어냈다.

「산책을 나왔다가 습격을 받았군. 유리엘이라는 인간과 함께.」

“……유니.”

「응, 피 냄새가 강해서 대충 위치는 찾은 것 같아. 그치만 문제가 하나 있어.」

유니는 곤란한 표정으로 포로록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어느 지점에서 딱 흔적이 끊겼어. 아마 땅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

「땅속?」

「응, 거기서부턴 토니 네가 찾아봐.」

「헤헤~ 맡겨 달라요!」

두 정령은 깔끔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쥬다스는 플루비의 머리에서 내려와 한 손에 들고 있던 스태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오아시스 앞에서 주워 온 바이칼의 물건이었다.

최고급 번개나무 가지를 깎아 만든 스태프에는 마법용어와 함께 소유주의 진명을 상징하는 ‘B’가 새겨 있었다.

투르케 사막에 진입하기 전 경비병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자와 아이를 노리는 인신매매꾼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 달라, 였나.’

설마하니 제국 최고의 인재양성기관인 루바흐를 졸업하여 황태자친위기사단에 입단한 마법기사가 인신매매꾼 따위에 당할 거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도 비교적 어린 세이지나 여성인 크리스티나를 노린 게 아니라 하필 생뚱맞게 바이칼이 휘말린 탓에 동료들의 황당함은 더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휘말린 것일 테지만.’

쥬다스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들의 본래 목표는 유리엘이고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이칼도 화를 입은 셈이다.

가만히 스태프를 쥔 그의 곁으로 말을 끌고 온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하.”

“바이칼 그 아이가 많이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말이다. 흠, 그러고 보니 이거 어쩐지 역할이 바뀐 것도 같구나.”

“송구합니다.”

지킴을 받는 자가 역으로 수하를 구하러 가게 생긴 상황에 쥬다스는 살며시 농을 건넸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에단을 보며 그는 엷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찾아가려 했던 곳에 바이칼이 먼저 도착했을 뿐.”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플루비의 목덜미를 툭 두들겼다.

그 손길의 뜻을 알아들은 플루비가 한 차례 울부짖고는 훌쩍 날아올랐다.

모래회오리를 일으키며 밤하늘을 가른 플루비를 응시한 쥬다스가 이를 따라 말에 올라 고삐를 당겼다.

“우리도 늦지 않게 도착해야지.”

반짝임을 실은 녹색 바람이 밤하늘의 별을 잇듯이 길게 뻗어나갔다.

유니가 안내한 장소는 오아시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폭풍 같은 스피드로 먼저 바람을 타고 온 플루비는 텅 빈 사막언덕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착륙하는 법도 모르고 착륙할 만한 위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끄워엉.”

플루비는 쓸쓸히 찬 공기를 가르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바이칼은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컹?”

커다란 주홍빛 눈망울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사막 위를 배회하던 플루비의 코로 익숙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모래더미에 반쯤 묻힌 채 널브러진 로브자락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바이칼의 로브였다.

플루비는 급한 마음에 속도를 늦추며 착륙자세를 취했다.

아직 속도가 완전히 늦춰지지 않은 채 내려앉느라 불안정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제 스스로 속도를 늦춰 착륙에 성공하던 찰나였다.

“……?!”

그냥 모래언덕인 줄 알았던 지형이 늪처럼 쑥 꺼졌다.

플루비가 당황하여 날개를 퍼덕였으나 모래늪이 빨아들이는 힘은 성체가 된 블루 와이번조차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일반적인 모래가 아니라 검은 사기가 작용하는 기괴한 지형이었다.

때문에 플루비는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욱 빠르게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거대한 와이번을 통째로 삼켜 버린 모래늪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해졌다.

* * *

“……봐요. 저기요. 바이칼 경?”

시끄럽게 귓가를 울리는 여자 목소리에 바이칼은 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가 웅웅 울렸다.

그가 멍하니 누운 채로 눈을 끔뻑이자 누군가 눈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흐어엉.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그는 산발하여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보고 식겁하여 흐리멍덩하던 눈을 번쩍 떴다.

다행히 금방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도로 기절할 뻔했다.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는 유리엘이었다.

“저 알아보겠어요? 네에?”

“예이, 유리엘 양. 아주 잘 알아보겠으니까 좀 비켜주시죠.”

그는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턱턱 갈라져서 나왔다. 뒤통수에서 축축한 느낌도 들었다.

유리엘이 콧물을 킁 들이켜며 옆으로 물러나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었다.

바이칼은 손으로 뒤통수를 슬쩍 훑어보았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가루와 함께 젖어 있던 핏물이 함께 묻어나왔다.

“피를 많이 흘리셨어요. 저는 바이칼 경이 죽은 줄 알고! 흡.”

“아니, 안 죽었는데요. 죽긴 왜 죽는 답니까? 거 불길한 소리는 됐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겠습니까?”

“훌쩍. 저도 사실 깬 지 얼마 안 되어서.”

“……뭐 그래 보이긴 하네요.”

머리를 어떻게 맞은 건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자꾸만 흐려지려는 시야를 다잡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우아앙!”

“엄마…….”

유리엘만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동굴 안에 그들을 포함하여 총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갇혀 있는 게 보였다.

반은 울고 있고 반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입구는 두텁고 억센 그물 같은 것으로 막힌 상태였다.

“아, 요즘 사막에서 자주 나타난다는 인신매매꾼들에게 끌려온 건가?”

바이칼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물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철사가 섞인 특수밧줄을 꼬아 만든 그물은 몹시 단단하게 얽혀 있어 칼로도 끊기 어려워 보였다. 지키는 자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인신매매 따위가 아니야.”

근처에 앉아 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단호히 부정했다.

바이칼이 돌아보자 메마른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있으면 전부 다 죽어.”

“허?”

“놈들에게 먹혀서. 전부 다. 먹힐 거야.”

가뜩이나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운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바이칼은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졌다.

“놈들이라니. 뭡니까, 그게?”

“…….”

여인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떨 뿐이었다.

완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여인을 보며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여길 나가야겠군. 로브와 스태프가 전부 없으니 마력이 많이 드는 마법은 무리겠는데.’

바이칼은 천천히 주변의 마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시전하는 마법진은 무척 속도가 더디고 미약했지만 계속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파직, 파지직-

그가 서 있는 바닥을 중심으로 파랗게 스파크가 피어났다.

전격계 마법사용을 위한 마력 배열이 완료되자 그는 힘겹게 시동어를 읊었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here).”

눈앞이 번쩍하더니 동그란 구슬처럼 뭉친 전기에너지가 폭발하며 그물을 화끈하게 지져 버렸다.

충분히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크게 구멍 뚫린 그물망 사이에선 여전히 빠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었다.

“후와, 마법기사셨어요?”

유리엘이 곁에 다가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실루엣을 다시금 확인한 바이칼이 호흡을 고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유리엘 양은 사제입니까?”

“네?”

“몸에서 나는 빛 말입니다. 신성력을 가진 자들만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빛이요? 저한테 그런 게 있어요?”

스스로 몸을 더듬어보는 모양새가 정작 본인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바이칼은 허탈하게 한숨을 푹 쉬었다.

신성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제라면 축복을 걸어주거나 정화를 사용하여 몸 상태를 조금 회복시킬 수 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선 치유술사만큼 탁월한 효과를 보진 못하지만 적어도 일시적으로 몸에 활력을 돌게 하며 체력을 높이고 정신력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여러 가지 축복이 존재했다.

그는 아쉬운 눈으로 유리엘을 쳐다보다 일단 그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밖은 무척 넓은 또 다른 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굴이라기보단 마치 대강당처럼 넓게 펼쳐진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 어딘가에서 부슬부슬 모래가 가랑비처럼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여기 지하 같은데요. 어휴,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사막 밑에 뭔 땅굴을 파놓고 장사하나.”

“가, 같이 가요.”

유리엘이 후다닥 구멍을 통해 따라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을 가둔 그물이 사라졌는데도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바이칼은 새롭게 마력배열을 준비했다.

치직 타오르며 바닥에 생겨나는 마법진을 발견한 유리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저 사람들 문이 열렸는데도 나오지 않는 거 보이죠?”

“어? 그러네요. 왜 그럴까요?”

“감시자가 있나 보죠. 무서울 정도로 못생긴.”

대충 완성되어가는 마법진에게서 시선을 뗀 바이칼이 옆을 향해 턱짓했다.

「……인간의 영혼.」

“힉.”

유리엘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고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곳엔 발이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제 몸보다 크고 징그러운 뼈로 된 날개가 달려 있었다.

코와 입은 없었고 푹 파인 눈두덩이에서 죽은 흙이 흘러내리는 기괴한 몰골이었다.

녀석은 입이 없는데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먹게 해줘.」

“으, 으으.”

‘사령인가.’

겁에 질린 유리엘과 달리 대충 놈의 정체를 알아본 바이칼이 셔츠자락을 쥐고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하! 인신매매가 아니라 영혼매매였냐.”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망할.”

카갓!

턱이 찢어지며 입을 쩍 벌린 사령이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유리엘이 새된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바이칼의 발밑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웅 하고 밝게 진동했다.

콰아앙!

불기둥이 일어나며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령에 관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ㅎ

그리고 유리엘.... 중요인물은 아닙니다.;;ㅠㅠ 너,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쿨럭...

Q. 10쪽에 켜고=>들이키고 아닌가요 그리고 내 질문은 무시당했어... 다음부터는 골뱅이를 붙여야겠군

A. 앗, 질문하셨다고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그냥 의견을 이야기해주신 줄로만 알았어요 ㅎㅎㅎ 으아, 속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꾸벅)

늦게나마 답을 드리자면, 크리스티나의 차림새는 여행자의상(긴바지)에 후드로브를 두르고, 홍건적(..)처럼 머리띠를 두른 상태입니다.

배경설정상 제국 남성/여성 모두 머리길이에 대해선 자유로운 편이라 남자가 장발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파도의 정령이 등장한 파트에서 언급된 조상님(?)과 무척 닮았습니다. 어여쁜 중성느낌이 있습니다....는 물론 유리엘 자체가 순진해서 너무 단편적으로 판단하긴 했죠(...)

참, 그리고 '물을 켜다'는 평소 '물을 많이 마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긴 한데... 아무래도 방언을 사용해버린 모양입니다.ㅠㅠ;; 여러모로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남은 연휴동안 즐거이 보내시길 바라며,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ㅎ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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