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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매캐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연신 기침을 내뱉는 유리엘의 팔목을 누군가 탁 붙잡았다.
“엄마야!”
“엄마고 아빠고 간에 일단 달립시다!”
바이칼이었다.
부상을 입은 데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고 심지어 전투 특화도 아닌 그가 사령을 상대로 싸운다는 자체가 무리수였다.
무슨 경위로 사령이 이 지하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도망이 최선이다.
놈이 화염계 마법에 타격을 입고 멈칫거리는 사이 그들은 제단처럼 생긴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허무하게 멈춰야만 했다.
스르륵, 스륵-
바닥에서 솟아오른 흐릿한 형체가 점차 일정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크고 징그러운 뼈 날개, 흘러내리는 검은 흙.
완전히 사령들 천지였다.
바이칼은 울먹이기 시작한 유리엘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헤이, 괜히 달렸네요.”
“흐엉.”
차라리 그물이 쳐져 있던 동굴 안이 안전할 지경이었다.
깨질 듯이 욱신거리는 머리는 더 이상 수식계산을 하기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젠장! 졸업장이 아까워서라도 이딴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그가 루바흐에서 공부한 기간이 자그마치 6년이었다.
고생고생해서 마법을 익히고 졸업장을 따내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다시 고된 훈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 시간을 전부 합치면 자그마치 8년이었다.
‘게다가 이건 전하를 위해서도 아니고 완전히 개죽음이잖아?’
본래 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연구하겠단 꿈도 접고 황태자를 지키고자 친위기사단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만 그로서는 억울함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생명에는 죽음을.」
「순수에는 타락을.」
「인간의 영혼…… 먹고 싶어.」
“으아아아, 시끄럽네 정말! 사람 피 말리지 말고 덤비려면 덤비든가!”
두 사람을 둥글게 포위한 채 점차 다가오는 사령들을 보며 바이칼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자 사령들은 움찔 조용해졌다.
「계약하자.」
「네 영혼을 걸고.」
「그래, 산 육체를 먹는 것보다 그쪽이 더.」
“닥쳐! 영혼을 먹겠다는 놈들이랑 계약 따윌 하겠냐!”
바이칼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마력을 움직여 마법진을 생성해 냈다.
화염계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를 터뜨릴 새도 없이 갑자기 천장에서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텅― 쿠쿵― 콰콰콱―
가만 듣고 있자니 거대한 무언가가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또 뭔데?”
불안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한 바이칼의 얼굴 위로 사르륵 모래가 떨어졌다.
그 순간 위험을 감지한 사령들이 스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친, 엎드려요!”
“네? 엄마야아아!”
콰앙!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가 지하공간을 덮쳤다.
바이칼이 유리엘을 감싸며 서둘러 엎드린 탓에 크게 타격을 받진 않았지만 코와 입으로 들어간 모래 때문에 정신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바이칼과 유리엘은 쿨럭이며 모래를 헤치고 일어섰다.
“으으으. 괜찮아요, 바이칼 경?”
“이게 지금 괜찮아 보입니까?”
“어, 아뇨.”
본래 밤색이었던 머리는 모래먼지와 피가 뒤섞여 잔뜩 떡이 져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모래에 맞아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피부는 척 보기에도 아파 보였고 장비도 없이 연이어 마법을 사용하느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유리엘이 그를 부축했다.
“휴우, 놀래라. 이대로 모래에 파묻혀 죽는 건가 했어요.”
“크르르르.”
지척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유리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번뜩이고 있는 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차라리 모래에 파묻히는 게 나았을지도…….”
맹수의 뜨거운 콧김이 후욱 그들을 덮쳤다.
유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 달리 부축하고 있던 바이칼이 불쑥 앞으로 몸을 이끌었다.
그 바람에 함께 딸려간 유리엘이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와씨! 야 플루비―! 너 이 빌어먹게 기특한 자식. 여길 어떻게!”
“끼우우웅.”
바이칼이 덥석 주둥이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아는 사이세요?”
“플루빕니다, 플루비. 그러고 보니 유리엘 양도 봤었잖아요?”
“제가요? 언제?”
거대한 푸른 와이번이 비둘기처럼 꾸구국 목을 울렸다.
“여기 오기 직전에, 오아시스 앞에서.”
그 말에 유리엘은 오아시스 앞에서 쫑쫑 뛰어다니던 미니 와이번을 떠올렸다.
기껏해야 대형견 크기였던 플루비였지만 확실히 푸른 비늘이며 날개, 짧은 다리와 긴 꼬리 등 생김새는 전부 일치했다.
그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이 바이칼은 플루비의 콧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플루비, 너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다시 나갈 수 있냐?”
“꾸앙?”
거대한 블루 와이번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놈의 큰 몸통 위로 꾸물꾸물 저절로 다시 막혀 버리는 천장이 보였다.
“그건 불가능해, 친구. 보다시피 여긴 사령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니까.”
갑작스레 그들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번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수 없는 곳이지.”
플루비가 사납게 크르륵거렸다.
검은색 후드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건 한 무리의 사령술사였다.
대충 세기에도 머릿수가 열이 넘었다.
그 주변으로 사령이 스르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바이칼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더 개 같은 곳이네.”
“제법 수준 높은 마법사였던 모양이지? 별 기대 없이 데려온 게 하필 이능력자라. 좋은 제물이 되겠어.”
사령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을 먹이로서 가장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순결한 처녀가 가진 생명력도 선호하며 또한 이능을 가진 존재를 제물로 바칠 경우 그 힘을 흡수하여 강력한 죽음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바이칼은 기분이 더 개 같아지고 말았다.
꼭 A급 판정을 받은 돼지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플루비가 입안에 후욱 뜨거운 열기를 머금었다.
날카로운 잇새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붉은 불꽃으로 변해 토해졌다.
지하공간이 지진이라도 나듯 흔들렸고 땅에서 불길이 치솟아 사령 몇 마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후끈하게 덮쳐오는 열기에 닿은 사령들은 솜사탕 물에 녹듯 녹아 사라져 버렸다.
“이 멍청한! 사령의 힘이 부족해지면 이 지하공간도 무너져 내린다고!”
사령술사들이 분개하여 소리쳤지만 바이칼은 코웃음을 치며 플루비의 등에 올라탔다.
유리엘도 얼떨결에 손을 잡혀 함께 와이번 위로 끌려 올라가 덜덜 떨었다.
“내 알 바냐. 깔려 죽나 먹혀서 죽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뭐?”
“그럴 바엔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그야말로 단순무식한 발언이었다.
황당함으로 가득 찬 사령술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이칼은 플루비의 뿔을 단단히 붙들었다.
“마음껏 날뛰어라, 플루비.”
“……!”
곧이어 블루 와이번의 포효 소리가 지하공간을 가득 메웠다.
포효만으로 지진이라도 나듯 땅이 흔들렸다.
플루비는 퍼드득 날아올라 천장을 향해 마구잡이로 브레스를 뿜었다.
쾅! 콰앙!
한번 불길이 치솟을 때마다 사령술로 유지되고 있던 천장에서 우수수 모래가 떨어졌다.
거대한 와이번이 날뛰는 통에 브레스에 맞아 타죽거나 부상을 입는 사령술사들도 속출했다.
당황한 사령술사 무리는 급히 사령을 부려 와이번을 제압하려 들었다.
“캬아앙!”
그러나 명색이 용족에 해당하는 와이번이 몸부림치자 아직 힘이 약한 하급 사령들은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천장이 쩌적 갈라지며 모래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와이번의 등에 매달려 있던 유리엘이 울먹거리며 물었다.
“지, 진짜 깔려 죽으려고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바이칼은 씩 웃으며 그동안 배열하고 있던 마력을 한 번에 움직였다.
“타임 포즈(Time Pause)!”
우웅-
천장에 마법진이 나타나며 쏟아지던 모래가 그대로 정지했다.
“맙소사, 모래폭포가 멈췄네요!”
“하아……. 일시적이긴 하지만 플루비가 뚫고 나갈 정도는 가능하겠죠.”
마력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바이칼이 창백한 얼굴로 호흡을 골랐다.
그사이 바이칼의 의도를 알아차린 플루비가 쏜살같이 구멍이 뚫린 천장으로 방향을 틀어 날았다.
그리고 곧장 모래폭포를 뚫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검은 사슬이 날아와 플루비의 뒷다리를 포박했다.
그 바람에 위로 솟구치던 플루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연이어 날아온 다른 사슬들이 플루비의 두 날개도 마저 포박하자, 그들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 크게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쿵 하고 굉장한 소리가 났다.
“블루 와이번, 성가신 펫이로군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다리와 날개가 쇠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 플루비를 향해 후드를 뒤집어쓴 작은 소년이 걸어왔다.
“그냥 죽이기엔 아까울 정도로.”
그는 그리 말하며 후드를 벗었다.
흑갈색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도 까맸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서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홀로 빛났다.
“오셨습니까, 할더 님.”
‘할더?’
기껏해야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을 향해 사령술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추락하는 바람에 플루비의 등에서 굴러 떨어졌던 바이칼은 쓰러진 채 흐려지는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단순한 어린애는 아닌 것 같은데. 이놈들 우두머리인가? 망할! 이젠 정말 더 이상 쓰고 죽으래도 사용할 마력이 없다고.’
부상당한 몸으로 무리에 무리를 더해 한계에 치달았다.
정말 죽을 각오로 마력을 끌어모아도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간신히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피가 섞인 모래를 퉤 뱉어내며 갑자기 난입한 소년 할더를 바라보았다.
“남의 걸 빼앗는 건 내 전공이 아닌데…….”
할더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짚었다.
“흠, 하는 수 없네요. 프리드를 조금 흉내 내볼까.”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플루비를 향해 들어 올렸다.
우웅-
할더의 손바닥에서 검은 사령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바람처럼 날아가 포박당한 플루비를 감싸기 시작했다.
“플루비! 젠장, 플루비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괴로워하는 플루비를 돌아본 바이칼이 맨손으로 할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심히 그를 쳐다본 할더가 반대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장막이 생겨났다.
퍽 하고 장막에 부딪힌 바이칼이 쓰러지자 할더는 천천히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생의 와이번이라면 사령의 힘을 사용한다 해도 길들일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신기하네요, 인간을 따르는 용족이라.”
“……이 자식.”
“그 마음을 약간만 오염시킨다면 아름답고도 비천한 악룡을 탄생시킬 수 있겠죠.”
어린아이의 외형이면서도 표정만큼은 지독하게 무감정했다.
바이칼은 쓰러진 채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도망쳐, 플루비!”
“소용없어요. 이제 곧 내 것이 될 테니. 아, 마침 당신이 제물이 되어준다면 좋겠군요.”
소년 특유의 미성이 그의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랑스러운 자의 영혼을 먹고 타락하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뭐죠, 왜 연휴가 끝나있는걸까요...! 시간여행이라도 한 기분입니다. 으헐.
벌써 또 일하는 날이 돌아오다니ㅠㅠ
예전에 스치듯 지나간 이름이긴 하지만 '할더'는 과거 이그레트를 배신했던 3인조(?)중 한명입니다. 프리드, 할더, 그리고 레이야라는 노예소녀가 있었습니다.
코멘트, 추천,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리며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