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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사령의 저주는 순식간에 플루비의 정신에 침투했다.
‘신룡이여, 제물을 바칠 테니 부디 자비를.’
‘꺄아악!’
‘신룡님이 노하셨다―!’
처음부터 자신을 두려워하고 멀리서 먹이만 가져다 놓던 인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블루 와이번은 천성적으로 양순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종족이다.
또한 외로움을 잘 타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루비의 외향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숭배하여 신룡으로 떠받들 뿐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홀로 호수에 갇히다시피 하여 백 년이란 세월을 외롭게 보내야 했던 플루비는 그 쓸쓸함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다.
사령은 바로 그 고독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주홍빛 동공을 제외한 눈알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맙소사, 해변에 몬스터가 나타났어!’
‘죽여!’
‘대포를 쏴!’
태어나 처음 바다에 갔을 때도 플루비는 혼자였다.
동족에게 핍박받아 해변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나마 백 년간 보아온 인간이란 존재에 반가움을 느끼고 다가갔지만 그들은 자신을 보고 포탄과 마법을 갈기며 쫓아냈을 뿐이었다.
“크르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쥬다스 일행과의 만남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잊혀졌다.
플루비는 검게 물든 눈으로 스륵 고개를 들었다.
“이봐, 플루비?”
“크워어엉!”
사령에게 반쯤 잠식당한 플루비는 괴성을 내지르며 입안에 불길을 머금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후욱 내뿜었다.
타오르는 화염은 송이버섯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다 다시 한 번 천장에 맞닿아 폭발했다.
그 바람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정지 마법이 풀려 모래폭포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쿠쿵, 날뛰는 플루비에 의해 지하공간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할더를 제외한 사령술사들은 우왕좌왕거리다 무너지는 모래더미를 피해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유리엘도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래세례를 받으면서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할더와 바이칼 둘뿐이었다.
“펫을 쓸쓸하게 만드는 주인이라니. 떠올리기 싫을 만도 하군요.”
“…….”
“그래서 잘 돌보지 못할 거면 함부로 펫을 기르는 게 아니라고 하죠.”
대답이 없는 바이칼을 빤히 쳐다보던 할더는 무표정한 채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까딱였다.
그러자 플루비가 마치 잘 훈련된 돌고래처럼 즉각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더 이상 쓸쓸해하지 않을 겁니다. 무능한 주인 대신 제가 잘 길러드릴 테니까요.”
“……마.”
양순하게 고개를 숙인 블루 와이번의 뿔을 매만지던 찰나였다.
할더는 무심한 눈으로 다시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가지 마, 플루비.”
도발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오직 플루비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채로도 자신의 동료를 걱정하는 바이칼을 보며 할더가 처음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조소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함께 가면 되겠네요.”
슈욱-
할더의 손아귀에 검은 기운이 뭉쳐 무구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어린 소년이 들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다란 창이었다.
할더는 가뿐히 이를 들고 바이칼을 겨누었다.
“영원히.”
다트를 던지듯 한 손으로 던진 창은 휙 날아가 바이칼의 어깨에 꽂혔다.
피한다고 피한 건데도 워낙 빠르게 날아와 심장 대신 어깨를 관통해 버린 것이다.
창대를 잡고 이를 악문 바이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게…… 신경 쓰이는 뱀대가리 같으니…….”
후두둑-
모래뿐 아니라 짙은 핏물이 함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혈향을 맡은 플루비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꾸구국?”
“그 비둘기 소리는 또 언제 배워왔냐.”
말은 진짜 더럽게 안 듣지, 바이칼이 투덜거리며 플루비의 앞까지 다가왔다.
뼈째 집어삼키라는 사령의 지배를 듣지 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는 플루비를 보며 할더가 한숨과 함께 허리에 손을 얹었다.
‘프리드가 했다면 완벽했겠지만 역시 내 정신지배는 이 정도까지인가. 흠, 공포심을 건드려 본다면 어떨까?’
그는 사령을 슬쩍 플루비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공포에 침투시켰다.
보통 가장 두려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에 쉽사리 지배당하는 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플루비에게만큼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됐냐? 너 날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붙어 있을 테니까. 어디 한번 날갯짓 해보든지.’
‘멈추지 말고 계속해 봐!’
‘자, 자, 자자자잠깐!?’
플루비가 가장 큰 공포 상황이라 느끼는 순간은 고공비행을 할 때였다.
하지만 첫 비행부터 죽 플루비와 함께 공포에 떨었던 존재가 있었다.
사령의 침식에 시달리던 와이번은 밑으로 가라앉았던 기억 속에서 그를 발견해 냈다.
플루비의 검게 물든 눈이 점차 본래 색을 되찾아갔다.
“크르륵.”
그렇지만 사령으로부터 완벽히 제정신을 찾은 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이칼을 쳐다보던 플루비는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 거칠게 포효했다.
놈의 잇새 사이로 몰려드는 뜨거운 브레스를 발견한 바이칼이 자리에 푹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돌겠네.”
“안 돼!”
할더는 멈칫 고개를 돌려 그들 사이에 끼어든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바이칼도 그녀를 발견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엘 양?!”
양팔을 벌려 바이칼의 앞을 막아선 유리엘은 공포에 희게 질렸으면서도 꿋꿋한 눈으로 플루비를 올려다보았다.
“허, 도망친 게 아니었습니까?”
“도망치고 싶었죠. 지금도 도망가고 싶은데 어차피 여길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잠시 떨리는 호흡을 고른 유리엘이 다시 말했다.
“사령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자기가 주인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린 채 죽이려 하다니! 그런 건 너무 비참해요.”
그녀 스스로는 그저 순수하게 애통함을 느껴 무턱대고 앞을 막아섰을 뿐이지만 바이칼과 할더는 동시에 유리엘이 가진 힘을 눈치챘다.
신성력.
마치 사령과 정령이 상극의 힘이듯, 죽음의 기운을 양분 삼아 움직이는 사령과 신의 축복이 가득한 신성력도 역시 상극이다.
신성과 정령은 둘 다 생명을 사랑하고 축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다만 정령의 힘은 각 속성과 계약자에게 한해서만 발동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뿐이다.
타인을 축복하거나 그 뜻이 공평하지 않다.
반면 신성력은 조건 없이 발동되며 누구나 기꺼이 공평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제대로 발현된 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신성력에 의해 사령이 조금씩 플루비의 정신세계에서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다. 신성력에 의한 ‘정화’였다.
이를 확인한 할더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아, 귀찮게 됐네요.”
우우우우-
검은 사령들이 사방에서 땅을 뚫고 치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흡사 무덤을 열고 나오는 좀비와도 같았다.
단 하나의 사령술사가 바라는 의지에 따라 수십의 사령이 군대처럼 움직였다.
보아하니 다른 사령술사들은 기껏해야 각기 서너 마리를 다루고 있었고, 지하공간을 유지하는 사령들은 할더의 계약하에 움직이는 게 태반이었다.
할더는 프리드가 다루는 릴리스처럼 사령왕급의 거대한 힘은 아니더라도 한꺼번에 많은 사령을 부릴 수 있었다.
“정리하죠. 모아둔 제물은 지금 즉시 흡수하도록 하세요. 이 시간 이후 여긴 폐쇄합니다.”
“예! 할더 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사령술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죽음을 직감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너 이 자식,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차라리 없애야죠. 남도 가질 수 없도록.”
할더는 엉망진창으로 다친 채 그를 노려보는 바이칼과 제정신을 차린 플루비, 그리고 유리엘을 한 차례씩 훑어보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입은 게 아니잖아요?”
“미친놈.”
쌈박한 평가를 듣고도 할더의 표정에는 털끝만큼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미친놈이 세상 살기엔 편하더군요.”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기어 나온 사령들이 손톱을 길게 빼고 달려들었다.
천장에선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렸고 땅에선 죽은 자들의 군단이 솟아나와 몰려든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 바이칼과 유리엘을 플루비가 확 온몸으로 막아섰다.
“플루비!?”
제아무리 단단한 와이번의 비늘이라 해도 사령의 공격에 멀쩡할 리가 없었다.
바이칼이 놈을 밀쳐내려 했지만 단단한 성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려 거대한 날개를 휘장처럼 펼친 채 두 사람을 감싸 대신 공격을 대신 받아낸 플루비는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작게 울었다.
“끼이이―”
“이 멍청아. 울긴 왜 울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거든?”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선 바이칼이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며 울고 있는 플루비의 주둥이를 끌어안았다.
꽈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감싼 날개가 꿰뚫렸다.
푸른 비늘이 조각나 깨어지고 구멍 난 날개 사이사이로 붉은 안광이 빛났다.
먹이를 쫓는 박쥐 떼처럼 몰려든 사령들이 어둠보다 더 검게 물든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통에 울부짖은 플루비를 끌어안은 채 바이칼이 속삭였다.
“찾아와 줘서 고마웠다, 친구.”
마지막 인사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유리엘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머리 위에서 파스스 흩날리는 푸른 비늘 가루와 피 냄새, 울부짖는 소리를 견디다 결국 공포에 사로잡혀 풀썩 기절하고 말았다.
동시에 플루비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목이 쓰러지듯 쿠웅 쓰러져 버렸다.
바이칼은 쓰러진 유리엘 쪽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플루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플…… 루비…….”
에너지원으로 물을 사용하는 블루 와이번은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자 다시 미니사이즈로 돌아갔다.
닭 한 마리 크기로 줄어든 플루비를 품에 안아 든 바이칼의 뒤에서 사령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뚝!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하듯 쏟아지던 모래와 모든 사령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거슬리는 존재들을 치우고 갈 셈으로 끝까지 지켜보던 할더의 무감정하던 눈에 흥미가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이건.”
드드드득-
모래로 된 천장이 종이가 찢기듯 간단히 갈라졌다.
제법 깊은 지하공간이었는데도 단번에 밤하늘이 올려다 보일 정도로 갈라진 땅 사이로 녹색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뜨거운 화염을 실은 바람이 벼락처럼 대지에 내리꽂혔다.
화륵!
플루비를 안아 든 바이칼과 유리엘을 중심으로 화염이 파문처럼 타올랐다.
불길에 닿은 사령들은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순식간에 깔끔하게 주변을 태워 버린 불길 속에서 바이칼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볼에 남은 눈물자국도 잊고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 늦으셨잖습니까, 주군.”
“그 꼴을 하고 할 말인가? 창피한 줄을 알아라.”
녹색 바람을 타고 그들 앞으로 훌쩍 뛰어내린 크리스티나가 핀잔을 주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뛰어내려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사막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르르 전투배치가 완성되었다.
“……그래,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야. 미안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쥬다스가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바닥에 툭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제국 유일의 은발은 달처럼 빛났다.
“많이 다쳤구나.”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플루비가.”
쥬다스는 어버버거리며 고개를 내젓는 바이칼의 머리를 툭 두들겨 주고 그를 지나쳤다.
“치료하라.”
“예!”
명을 받은 치유술사들이 달려와 바이칼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기 전 바이칼은 플루비의 상태를 먼저 봐줄 것을 요구했다.
“함께 봐드리겠습니다. 와이번은 이쪽으로.”
다행히 플루비는 상태가 심각하긴 해도 죽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플루비와 함께 치료를 받으며 바이칼은 멍한 표정으로 쥬다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쩐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농을 농으로 받지 않으며 늘 부드럽게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아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드디어 과거-현재 대립구도의 시작입니다. 근데 아직 초반부라는 게 함정....
(...)
어찌어찌 한주의 마지막이 왔네요. 행복한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ㅎ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