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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자신이 만들어낸 불씨가 결국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까 불안했다.
쥬다스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는 과거의 잔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절벽 위에 핀 꽃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려 눈을 감아 보았지만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찌 쉬지 않고 여기까지 나온 게냐.”
“……쥬다스 님.”
쥬다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어느 틈엔가 와서 올곧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서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내가 오늘 너희에게 퍽 미덥지 못하게 굴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크리스티나는 오히려.”
그녀는 쥬다스의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미욱한 자신보다 전하를 더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염려하는 뜻이야 주군을 섬기는 신하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니 사과를 거두어주시길 청합니다.”
“그건.”
“감히 말씀을 끊는 불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 저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입니다.”
에단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향해 크리스티나가 놀란 시선을 던졌다.
에단은 천천히 그의 앞에 걸어가 허리를 숙였다.
“원컨대 혹여 책하는 마음이 드시거든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저희를 꾸중하시어 바로잡으소서.”
“맞습니다, 형님. 아무것도 못한 건 저인걸요.”
에단과 반대편에서 나타난 세이지가 동의를 표했다.
어쩌다 보니 작정하고 모인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그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하나같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 녀석들. 죄 잠 못 들고 이리 산책을 나온 게냐? 하하, 다들 젊어서 그런지 새벽부터 기운도 좋구나.”
「아니, 그건 너도…….」
눈을 가늘게 뜨고 뚱하니 쳐다보는 유니를 손안에 감싸든 쥬다스가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고맙다.”
“…….”
세이지는 살짝 고개를 숙였으며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들썩인 건 비단 쥬다스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책을 했고, 더러는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떳떳이 그의 곁을 지킬 수 있을지 막막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한자리에 모인 셋은 같은 소망을 품었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이는 중상을 입어 병동 신세를 지고 있는 바이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나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어떤 방향으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위협하는 적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전하께서 등을 맡기실 수 있도록.’
친위기사단장이자 무에 대한 감각이 남달리 뛰어난 에단은 물리적인 강함을 원했으며,
‘한 발짝 뒤. 언제든 돌아보실 때마다 막힘없이 응답할 수 있는 거리만 된다면. 거기까지가 나의 역할이다.’
크리스티나는 그가 기댈 수 있는 강한 신뢰관계를 원했고,
‘전하께서 구해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죽을 셈이었냐.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지켜드리는 건 고사하고 민폐나 되지 말아야……. 그리고 플루비도 제대로 훈련을 해야겠어.’
이번 사태에서 엉망으로 당하고 돌아온 바이칼이야말로 실질적인 힘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와이번에 대한 책임감을 덩달아 실감하였다.
‘나는 형님과 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이지는.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해서 정말로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형님의 뒤에 숨어 있을 뿐인 지금의 내가 가출 소녀와 다를 게 뭐야. 그녀는 차라리 용감하기라도 했지! 나도 무언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해.’
본격적으로 다시 마법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다.
날 때부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어느 정도 기초 지식과 마법의 발현은 가능한 상태였으니 마법서적만 바이칼에게서 빌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정체되어 있던 소년소녀들의 성장이 더디게나마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맹세를 품고 거친 모래언덕에서 내려왔다.
* * *
동이 트자마자 쥬다스는 부상자들을 모아둔 임시 병동을 찾아가 한 명씩 상태를 살폈다.
빠르게 대처한다고 했지만 21명의 구조자 중 사망자가 셋이나 나왔다.
치명상을 입고 상태 회복에 애를 먹는 이들도 반은 되었으며 팔이나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된 피해자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산지옥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쥬다스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흑흑, 차라리 아이가 죽을 때 나도 같이 죽게 놔두지 그랬어요…….”
“이 다리를 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엄마는요? 우리 엄마도 찾아주세요. 네?”
쥬다스는 절망하여 오열하는 자들 앞에서 쩔쩔매는 대신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삶이며 그들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래였다.
그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절망 속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사람들이 감정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 일행이 이곳을 떠난 후에도 연락을 받은 재난 관리팀에서 그들이 모두 있어야 할 장소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로 하였다.
그렇게 깔끔하게 상황 정리를 하고 돌아선 쥬다스 대신 버럭 화를 내는 이가 있었다.
“거, 입 좀 다물지. 지하에 하도 갇혀 있었더니 머리까지 돌았답니까? 도와준 사람보고 보따리 내놔라 짖어 대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국법이요?”
“네놈은 또 뭐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비딱한 자세로 벽에 기대 앉아 있던 바이칼이었다.
무릎에는 작게 변한 플루비가 둥글게 꼬리를 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멀쩡한 왼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말했다.
“뭐긴 뭐야. 댁들처럼 모래늪에 끌려들어가서 숨질 뻔한 인간이지.”
“너, 너는 잃은 게 없지? 우리처럼 가족을 잃고 팔다리를 잃은 게 아니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잖아! 우린 얼마나……!”
콰아앙!
잘려 나간 다리를 가리키며 시끄럽게 소리쳐 대던 피해자는 조개처럼 합 입을 다물었다.
소규모긴 하지만 화염 마법에 의해 누군가의 짐가방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왼손만으로 마법을 시전한 바이칼이 성난 짐승마냥 위험스레 웃으며 말했다.
“주둥아리 안 닥칩니까?”
“이…….”
“닥치라고요. 누가 그랬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아까 죽고 싶다던 사람만 계속 떠드세요.”
“…….”
단체 환자를 수용 중이던 임시 병동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확 침묵이 감돌았다.
마지막으로 유리엘의 상태를 보러온 쥬다스만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저어.”
“음?”
그를 향해 유리엘이 우울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바이칼과 플루비와 달리 유리엘은 큰 상처 없이 자잘한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 생기발랄하던 모습과 달리 잔뜩 기가 죽은 상태였다.
병동이라곤 해도 임시로 꾸려진 천막이었기에 침대는커녕 제대로 된 이불도 없었다.
보급용으로 주어진 두터운 갈색 담요를 두르고 앉은 유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쥬다스를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신을 잃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큰일을 겪어 많이 놀랐겠습니다.”
“네, 정말 놀랐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저 중간에 한 번 깼었는데. 그때 분명 본 것 같아요. 아니, 봤어요.”
유리엘은 잔뜩 긴장한 채로 안절부절못해했다.
그 반응을 보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쥬다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게, 저. 본래는 은발이시죠?”
“음.”
“그, 그럼! 정말로 황……!”
저도 모르게 ‘황태자 전하’라고 소리칠 뻔했던 유리엘은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한 쥬다스를 보고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쥬다스는 난감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발언을 막고는 고개를 저었다.
“숨기고 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유리엘은 무형의 벽에 가로막힌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답을 받으니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그럼 크리스 경은 누구지? 황태자 전하의 호위씩이나 된다면 평범한 기사는 아닐 텐데!’
황태자의 호위는 처음부터 높은 품격을 지니고 엘리트 과정을 밟아 훈련받은 귀족만이 맡을 수 있다.
아무리 세상 이치에 맹한 유리엘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귀족적 상식은 알고 있었다.
잠시 크리스티나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유리엘은 이내 그 상념이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고 후우 한숨을 뱉었다.
“죄송해요. 계속 폐만 끼치고. 저 때문에 바이칼 경까지.”
“그건 너의 탓이라고만 볼 수 없다. 방심하고 있던 우리 모두의 실책이지.”
“그치만, 전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부모님 말씀대로 얌전히 결혼이나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유리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담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아갈게요. 더 이상 고집 부려봤자 상황만 나빠질 뿐이니까요.”
“그런가. 원치 않는 결혼으로 힘들지 않겠느냐.”
“네! 괜찮아요. 해볼 만큼 해봤으니까요. 이젠 다 괜찮을 거예요.”
유리엘은 붕대로 감아둔 손바닥을 반대쪽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 정말 이걸로 된 거야.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응석받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대로 돌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
거기까지 생각한 유리엘은 참고 있던 눈물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때 고개 숙인 그녀의 귓가로 가버렸으리라 여긴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말이다.”
“네……?”
“다들 그렇단다. 알고 보면 정말 힘든데도, 아주아주 힘들어서 미칠 것 같다고 느끼고 있어도.”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더욱 고개를 들기 힘들어졌다.
그런 유리엘을 다독거리기라도 하듯 쥬다스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이 힘들다 보니 지금 힘들단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게다. ……그래, 누구나 겪는, 아니, 겪어야만 하는, 그래야만 하는 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잊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테지.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야.”
마치 그녀의 부모처럼 따뜻하게 어르는 어조였다.
유리엘은 뿌옇게 번진 시야를 들어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어렸지만 훨씬 강하며 어른스러웠다.
그러나 그만큼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얘야. 사는 게 늘 괜찮은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단다. 그러니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쥬다스가 내민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크로스목걸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교황청 엘리시움에서 신성력을 판별하기 위해 제작한 특수 목걸이었다.
신성력을 가진 자가 이 목걸이를 걸면 은 목걸이가 신성력에 반응하여 붉게 물든다.
강한 신성력을 가질수록 그 붉은색이 강해지며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위그드라실이 착용할 경우 주변을 빨갛게 비추는 빛이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유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처음엔 연한 분홍색으로 바뀌다가 이내 피처럼 붉게 변해버렸다.
색깔로만 보면 그 잠재능력이 굉장한 수준이었다.
“교황청에 내 벗이 하나 있다. 네 이야기를 해주면 반갑게 맞이해 줄 테지. 자, 이제 선택지가 한 가지 더 생긴 셈이로구나. 어찌하겠느냐?”
유리엘은 크로스를 손바닥에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물방울이 남아 있는 얼굴 위로 해사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발렌타인 때 애인이 있는데도 여친분께 초콜릿 못받으신 독자님...ㅠㅠ 세상이 그런 겁니다.(?) ...아, 아니 속상하셨겠습니다!ㅠㅠ;; 비록 저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요! (주르륵)
Q. 작가님은... 남자분이셨나요?...
A. ...아하하.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이 생길까 일부러 밝히지는 않는 편입니다만, 아마도 독자님들이 생각하시는 그 성별이 맞을 겁니다.ㅎ
Q. 작가님... 제 초코라도... (남자입니다...)ㄸㄹㄹ...
A. .....크흡 친절하신 분....ㅠㅠ!! 사랑합니다. 그럼 화이트데이땐 제가 사탕을...(?)
늘 감사드리며, 행복한 월요일 보내셨길 바랍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