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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치유술사의 활약으로 바이칼은 빠르게 부상을 회복해 나갔다.
그 결과 사흘째 되는 날 상처는 전부 사라져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겉은 멀쩡해졌더라도 내상이 남아 아직 여행길을 떠나기엔 무리였기에 그들은 며칠 더 휴게소에 머물렀다.
회복이 더딘 건 오히려 플루비 쪽이었다.
바이칼을 감싸느라 날개가 찢어지고 비늘이 뜯기다 못해 쩍쩍 갈라질 정도로 공격을 받은 플루비는 상처가 나은 후에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비실거렸다.
작아진 채로 품에 안겨 하루 중 대부분을 수면 상태에 빠져 있는 플루비를 돌보는 건 역시 바이칼의 몫이었다.
이번엔 딱히 그러라고 시킨 사람은 없었는데도 대신 봐주겠다는 동료들의 제안마저 거절하고 그가 스스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원들은 뱀을 그리도 질색하더니 이젠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냐며 놀려 댔다.
‘뱀이 좋아진 게 아니라 와이번이 아주 조금 편해졌을 뿐이라고! 무엇보다 이놈에게 목숨 빚을 졌으니까.’
파충류는 아직도 질색이었다.
뱀 비늘과 뱀눈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플루비에 한해서만큼은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바이칼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정성껏 플루비의 비늘을 닦아주고 때마다 물을 먹이는 등 소중히 대했다.
그러는 사이 유리엘은 교황청에서 데리러 온 사제들을 따라 먼저 사막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다시 한 번 일행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정말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특히 바이칼 경, 저 때문에 말려들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알고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나쁜 짓한 놈들이 나쁜 거지, 같은 피해자끼리 죄책감 느끼지 맙시다.”
“아.”
바이칼은 손톱만큼도 유리엘을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곧 에단으로부터 받게 될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지옥훈련을 걱정하느라 연신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의 품에 안긴 플루비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유리엘을 향해 삑삑 울었다.
“그리고…….”
유리엘은 망설이다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꾸벅 인사했다.
“크리스 경,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
“다, 다음에! 제가 정말로 자신의 감정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된 후에. 그때 다시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딴엔 큰 결심을 하고 떨리는 주먹마저 뒤로 감춘 채 묻는 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찾든 말든 그건 그대의 자유겠지. 개인의 행동마저 제한하진 않아.”
“저어, 그럼 혹시 경의 본가를 알려주신다면.”
“델피아.”
“……에?”
수려한 입술 사이로 막힘없이 흘러나온 가문 명에 유리엘의 표정이 띵 하니 굳었다.
크리스티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뱉으며 머리띠를 풀었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찬란하게 반짝였다.
흡사 바다를 보는 듯 두 가지 푸른빛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긴 크리스티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티나는 오만한 눈으로 유리엘의 착각을 단방에 깨뜨렸다.
“정확히는 기사가 아니라 여기 계신 전하께 검을 바친 델피아의 딸이다.”
“……!”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붉게 물들어 있던 유리엘의 얼굴이 다른 의미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크리스 경이 아니라 델피아 가문의 크리스티나 공녀님? 그러니까 결국.’
사모하던 대상이 처음부터 같은 여자였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깨달은 유리엘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그만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어으. 그럼 어떡, 으아아.”
창피함과 실망, 실연의 상처 등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그녀의 귓가로 또다시 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피해할 일인가.”
유리엘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갑지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바닷빛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비록 그대의 행동이 내게 불쾌를 안겨주긴 했으나.”
“윽.”
“자신만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허황된 거짓으로 이 나를 기만했다는 뜻일 터.”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고백을 민망하리만치 딱 잘라 거절했었지만 그 진심마저 외면한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리엘은 복잡하던 머릿속을 전부 날려 버리고 생긋 웃었다.
“정말, 정말로 좋아했어요. 거짓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하, 그래. 모자란 것보단 단순한 게 차라리 낫군.”
“헤헤.”
칭찬이 아닌 소리에도 그저 웃음만 나왔다.
마냥 웃던 유리엘을 잠시 내려다보던 크리스티나는 다시 머리를 정리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단순한 용기만큼은 봐줄 만 해.”
‘……역시 ‘크리스 경’은 상냥해요.’
유리엘은 살짝 고이려던 눈물방울을 얼른 소매로 훔치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언젠가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꿋꿋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교황청 사제들과 함께 투르케 사막을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집에 돌려보내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까요? 저렇게 되면 어째 우리가 가출을 더 부추긴 느낌이.”
“허허. 가출이 아니라 출가가 된 셈이 아니겠소이까?”
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의견을 덧붙였다.
그 말에 에단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녀 스스로 버틸 수 있으니 버티고 있을 뿐.”
집을 나와 겪게 된 갖은 설욕과 공포 등에 버티지 못했다면 이미 포기하고 돌아갔었을 테였다.
하지만 유리엘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마치 쥬다스를 중심으로 뭉쳐 각자의 맹세를 이루려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그들처럼.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후에야 일행은 푹 쉬어 빤질빤질 윤기가 나는 말에 올라 휴게소를 떠났다.
푹푹 꺼지는 모래에도 크게 방해를 받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인챈트 효과 덕분에 말들은 신나게 사막을 가로질렀다.
중간에 들릴 목적지는 투르케 사막영토를 관리하는 중앙마을 알투르케였다.
정식명칭은 ‘투르케 리제너레이션 존(Trukei Regeneration Zone)’.
본래는 사막부족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곳이었지만 수년 전 사령술사 프리드의 습격으로 전멸한 이후 복원에 애를 먹은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 부족민 전원 몰살이라는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난 탓에 텅 빈 고향으로 돌아온 아벨 투르케는 새로운 부족민들을 모아 중앙마을을 재건해 냈다.
그 위치가 바로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알트루케다.
“그러고 보니 아벨 그 녀석 말입니다. 영 소심해서 재건이니 부흥이니 제대로 못할 줄 알았는데. 용케 해낸 모양이네요.”
거의 알투르케에 근접한 지점에서 바이칼이 문득 입을 열었다.
거기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동조했다.
“확실히. 그건 예상외였지.”
“과거 투르케 부족마을 그 이상으로 재건설해 냈다더군. 델피아까지 그에 대한 호평이 들려올 정도니.”
부족민부터 규율, 건축양식까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투르케 사막 전역을 관리하기란 아직 역부족이었지만 아벨 투르케는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착실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완벽하게 착공하고 있었다.
그 첫 시도인 알투르케의 재건은 가히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이었다.
이에 대해 잠시 사담을 나누던 그들은 문득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는 지난 모래늪 사건 이후로 줄곧 말을 아꼈다.
평소보다 좀 더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쥬다스 님.”
지금처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작게 한숨을 쉬는 크리스티나를 힐끔 쳐다본 유니가 그의 볼을 쿡쿡 찌르며 정신을 일깨웠다.
「이그레트.」
“……응?”
「애들이 너 불러.」
정령의 부름을 듣고서야 그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내게 할 말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주겠느냐?”
“아닙니다. 특별히 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에단이 고개를 저었고 세이지가 대신 말을 이었다.
“형님, 아벨 투르케가 그 물질계 거울정령과 계약했다는 사람이죠?”
아벨이 루바흐의 정령학 연구시설에 머무는 동안 세이지는 내내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직접적인 접점은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래. 지금쯤 둘 다 많이 자랐겠어.”
“둘 다요?”
세이지뿐 아니라 그 대화에 참여하고 있던 전원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쥬다스는 이에 대해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벨의 정령 투르키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야. 계약 초반의 정령은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아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술사의 성향과 정신력에 비례해서 정령도 함께 성장하니 지금쯤 너희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차이가 클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 거울정령 녀석, 제대로 말도 못했었죠.”
바이칼이 턱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지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겨우 아벨의 말끝만 ‘~니다!’, ‘~했다아!’거리면서 따라했던 투르키였으니 과연 갓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와도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이칼은 문득 한 가지 더 의문점이 들어 슬쩍 손을 들었다.
“어, 그 말씀은 혹시.”
“음?”
“정령등급과 관계없이 새로운 술사와 계약을 할 때마다 정령의 능력치가 초기화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질문에 답해준 건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인 콜이었다.
“어허, 반은 맞고 반은 틀리외다. 계약 시 능력치가 초기화되는 건 사실이지만 등급에는 분명히 영향을 받지요.”
“등급에는 영향을 받는다고요?”
“출발선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요. 하급 봄바람의 정령이 따뜻한 미풍을 부르는 정도에서 시작한다면 최상급 봄바람의 정령은 크기가 작고 지속력이 낮은 토네이도를 만들어낼 수 있소이다.”
“와. 역시 타고나길 잘 타고나야…….”
콜의 예시를 통해 극명한 차이를 깨달은 바이칼이 감탄하는 사이 에단이 점잖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하면, 정령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크흠. 정령왕이라면.”
콜은 묘한 시선으로 일행의 주변을 감싸 내내 가호하고 있는 녹색 바람결을 훑었다.
“……술사가 원한다면야 한여름에라도 제국 전역을 뒤덮는 눈보라를 불러올 수 있겠지요.”
“눈은 물 계열 아닌가요?”
“정령왕급 정도가 되면 더 이상 속성은 큰 의미가 없지요. 바람의 정령왕이 허리케인을 몰고 오거나, 물의 정령왕이 뜨겁게 끓는 용암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 이를 어느 한 속성이라 정의하기 힘들지 않겠소이까?”
“크. 완전 사기네요, 사기. 그런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넷씩이나 단 한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가 있다니.”
바이칼은 할아버지에게 옛 이야기를 듣는 손자처럼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제일 존경하던 이가 다름 아닌 ‘이그레트’였으니 거침없이 찬사가 튀어나왔다.
“역시 그는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드래곤이나 신이 아닐까!”
물론 그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옆에서 보고 있는 장본인으로서는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 그건 좀 비약인 듯싶구나.”
“예? 쥬다스 님도 자연계 4속과 전부 계약하셨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더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플루비 이놈을 보니 용족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 말이죠. 아마도 용보다는 인간 세상에 현신한 천족 같은 게 아닐까요?”
“…….”
들뜬 얼굴에 대고 더 이상 뭐라 부정하기도 힘들어진 쥬다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사정을 알고 있는 콜만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5장 : 신기루' 챕터의 시작입니다.ㅎ
헉, 셋째 품으신 독자님 축하드립니다!! +_+ 올해 말 즈음엔 좋은 소식 들을 수 있는 건가요? (두근두근)
Q. 보답으로 크리스티나가 쥬다스한테 츤츤거리며 사탕주는거라도... 주륵...
A. 상상했다가 잘 어울려서 혼자 큭큭웃었네요. ㅋㅋㅋ 화이트데이즈음에 짤막하게 들고 오겠습니다 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