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26화 (12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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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일행은 소소한 잡담을 뒤로한 채 다시 이동에 집중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에서는 뜨거운 태양광이 내리쬐었다.

잠시 뒤 그들은 달리던 속도를 줄이며 위치를 점검했다.

“뭔가 빙빙 도는 느낌인데요. 단장, 우리가 지금 어디쯤 온 겁니까?”

“지도상으론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위치다.”

출발할 때 예측했던 도착 예정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그들은 알투르케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을은 고사하고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너른 모래사막을 바라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 장난을 쳐둔 모양입니다.”

챙!

그러곤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허공을 그었다.

그 여파에 대기가 물결치듯 울렁거리더니 스르르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쥬다스도 느긋하게 웃으며 에단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런. 다 같이 꼼짝없이 걸려들었구나.”

“예? 설마 앞에 결계라도 있는 겁니까?”

바이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묻자 크리스티나가 차갑게 답했다.

“명색이 마법기사란 자가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그대가 눈치 채지 못했다면 마법이 아니라 다른 요소겠지.”

“아니,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결계 효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마법 외에 또 있습니까?”

“암, 있고말고. 세상엔 마법 이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무수히 많단다.”

쥬다스는 냉기를 풀풀 날리는 크리스티나와 달리 친절히 풀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보거라. 이건 아주 낯설지만은 않질 않느냐?”

말에서 내린 쥬다스가 벽을 짚듯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녹색 기류가 화악 뻗어 나가 땅과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거대한 경계선을 표시하기라도 하듯 녹빛으로 차오른 대지를 보자 바이칼도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물질계 거울의 정령……!”

아벨의 정령, ‘투르키’의 힘이었다.

수년간 계약자를 따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투르키는 비치는 모든 것을 반사해 내는 고유 성질을 이용하여 사막지형마저 복제해 냈다.

이러한 물질계 정령의 특성은 자연계 정령들이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번 눈치챈 이상, 보다 상위 존재인 정령왕의 힘으로 이를 깨뜨릴 순 있었다.

녹색으로 뒤덮인 단면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치듯 쩌저적 금이 갔다.

「헤~ 에, 제법이네. 깜빡 속아 넘어갔잖아?」

유니가 까르륵 웃으며 손뼉을 치자 사막을 통째로 반사시키던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 깨져 버렸다.

“와, 이게 전부 거울이었단 말이에요?”

거울이 깨어지며 드러난 광경을 보며 세이지가 나직하게 감탄을 흘렸다.

일행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거울조각이 태양광을 받아 반딧불처럼 빛났다.

조각난 파편은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고 그대로 증발하여 사라졌다.

“그래, 도착했구나.”

쥬다스도 바람의 힘을 거두며 눈앞에 펼쳐진 목적지를 응시했다.

“사막도시 ‘알투르케’에.”

그들이 지나온 거친 모래와는 다르게 순백의 고운 모래로 지어진 성벽이 보였다.

마치 아이들이 백사장에서 바닷물에 반죽하여 지은 모래성처럼 마을 전체가 하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감탄도 잠시 거울이 깨어진 자리에 스르륵 잿빛 머리의 소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거울.」

「지금은 투르키라고 했다요!」

「아참! 그랬지? 헤헤, 미안.」

“…….”

정령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투르키는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그들을 멍한 기색으로 훑었다.

그러더니 이내 쥬다스를 발견하곤 활짝 미소 지었다.

“다시 만났다.”

목소리마저 곱고 청아했다.

외형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때에 비해 확연히 인간적인 면모를 풍기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향해 모두가 놀란 시선을 던졌다.

오직 쥬다스만이 놀라지 않고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네가 이곳을 지켜주고 있었구나. 투르키.”

“응! 투르키, 아벨 돕는다.”

기운차게 주먹을 말아 쥐고 고개를 끄덕인 투르키는 매우 반가운 기색을 풍겼다.

그녀는 마치 매우 어린 새끼 때 다른 집으로 분양된 강아지가 성견이 된 후 본래 주인댁을 다시 만난 것마냥 가슴 깊이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는 정령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끌리고 마는 본능 같은 애착이었다.

쥬다스에게 어린아이처럼 와락 안겨 들려는 투르키의 뒷덜미를 누군가 확 잡아챘다.

“……!”

「어머, 실례. 내 계약자거든요?」

새빨간 깃털이 이리저리 모래바람에 섞여 흩날렸다.

급한 나머지 손가락 만하던 크기에서 보통 십 대 후반의 소녀 체구로 외형을 되돌린 카니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투르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불의 정령왕의 개입에 투르키는 덜미를 대롱대롱 잡힌 채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안 돼?”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그치만 카니 너, 또 틀렸어.」

뒤에서 덜미를 잡아챈 카니와 함께 투르키의 앞에 나타나 가로막은 유니가 단호히 콧방귀를 뀌었다.

「자꾸 헷갈리나 본데, 이그레트는 ‘우리’의 계약자거든?」

「쳇.」

「뭐가 ‘쳇’이야!?」

덜미를 붙들린 채 멍하니 두 정령을 번갈아보던 투르키는 밑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물어 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건조한 사막에서도 촉촉한 물거품을 유지하고 있는 우아한 푸른 늑대가 물고 있던 옷자락을 놔주며 이야기했다.

「……내용이 딴 길로 샜다만 계약자에 대한 선은 지켜 달란 뜻이다.」

“선?”

「아마도, 정령사회에서의 도의적 책임 문제?」

그저 정령의 본능처럼 내재되어 있는 계약자에 대한 독점욕일 뿐이었지만 같은 정령인 투르키는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도 곧잘 이해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다. 계약, 도의적 책임! 투르키 꼭 지킨다.”

많이 성장하긴 했으나 투르키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대부분이었다.

카니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예기치 못한 정령들 간의 알력다툼에 일행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쥬다스의 머리 위에 엎드려 말똥말똥 이 광경을 지켜보던 토니가 배시시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헤헤. 그래도 다시 보니까 좋다요.」

“응. 투르키, 안내한다.”

사박거리며 모래 위에 내려선 투르키는 알투르케의 새하얀 성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요새이기 때문

에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투르키는 굳건히 닫힌 문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예의 바르게 노크했다.

똑똑!

딱히 신분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 육중한 문이 쿵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투르키를 따라 그 안에 발을 디딘 바이칼이 뒷목을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보안이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허술하다고 해야 할지.”

“아마 알투르케 전체를 투르키가 직접 가호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작은 중얼거림마저 듣고 친절히 답해준 쥬다스를 향해 이번엔 세이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형님. 정령의 시험에 통과한 자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뭐 그런 건가요?”

“에헤이, 저 거울 녀석이요? 그런 중직을 맡기엔 좀 띨해 보이는데.”

그때 앞서가던 투르키가 홱 돌아섰다.

‘드, 들었나?’

괜히 찔끔한 바이칼이 지레 움츠러든 사이 투르키는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벨, 저 안에 있다.”

직접 들어와서 본 알투르케는 그들이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발전된 도시였다.

하얗고 고운 모래로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기본이 2층이었고 높게는 5층에서 최고 7층까지도 지어져 있었다.

마치 하얀 성벽이 미로처럼 겹겹이 지어진 듯한 모양새였다.

건물들 사이사이엔 선인장이 가로수처럼 줄지어 자라고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 하얗기만 한 건물을 깔끔하게 돋보여 주었다.

사막이라고 해서 삭막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제법 디자인까지 살려 도시를 재구성해 낸 아벨의 감각에 모두가 감탄했다.

그 건물들 중 투르키가 가리킨 건 3층짜리 중간 규모 건물이었다.

일반 주택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노란 간판을 달고 그 안에 스마일 표식을 그려놓았다.

“호오, 학교로군요.”

루바흐에서 교사로 부임한 적 있던 콜이 가장 먼저 표식을 알아보았다.

루바흐의 교기(校旗)는 따로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지도나 서적 등에서 학교를 상징하는 표식은 바로 저 노란 스마일이었다.

제국 내에서 ‘학교’란 평민과 귀족을 통틀어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다.

귀족계 학교는 오직 루바흐뿐이며 평민을 대상으로 한 시설은 학교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비공식, 비전문적인 교육 시설이 몇 군데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루바흐처럼 국가에서 따로 인계를 내주고 지원하는 국공립시설이 아니라 일부 재력가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 시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평민 학교는 이익 창출이 쉽지 않아 오래 유지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평민들은 귀족처럼 우아하고 경쟁적인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그들의 학교는 몹시 자율적이며 제한이 없고 배움의 폭 또한 정해진 바가 없어 무작위로 공부하는 형식이었다.

학교를 나와 졸업장을 받아보았자 딱히 쓸 곳도 없다.

그중 특출나게 뛰어난 성적을 보이거나 이능을 가졌다 보고되는 아이들의 경우만 제국 인재관리팀에서 따로 스카우트하여 데려가 키웠다.

여기서 운이 아주 좋다면 이름뿐이라곤 하나 낮은 귀족 작위까지도 얻을 수 있다.

그런 판국에 이제 막 재건하여 일어서고 있는 투르케 사막에 존재하는 학교란 시설은 일행의 시선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비록 함께 졸업하진 못하였으나 루바흐의 가르침을 받은 자답군.”

고향을 멋지게 재건하겠다는 아벨의 노력은 크리스티나마저 인정하게 만들었다.

수익이 나오지 않는 평민 학교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시설 유치였다.

“그런데 아벨 그놈은 저 안에서 뭐 하는 걸까요? 그래도 명색이 사막의 지도자라는 녀석이 직접 교사일이라도 뛴답니까?”

“……그렇진 않을 거다. 그도 귀족의 배움과 평민의 배움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테니.”

그래도 루바흐를 떠나기 전까진 아벨을 종종 만났었던 그들이었다.

투르케가 사령술사에게 공습받아 한 번 멸망하고 나서 정령폭주까지 일으킨 아벨은 더 이상 떳떳한 귀족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가뜩이나 루바흐 안에서 학교 폭력을 당하며 겉돌고 있던 아벨은 정령폭주 이후 아예 학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다.

당시 비에 젖은 낙엽 신세가 되어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 게 쥬다스였고 아벨은 정령학연구소에서 정령술을 배우며 조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귀한 품격을 키우는 귀족들 사회였다.

평민과 귀족은 사는 사회가 달랐다.

그들은 귀족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아벨이 사막 부족을 위해 지어둔 학교 안에서 무얼 하는지에 대해 일행이 의구심을 품는 순간 학교 문이 열렸다.

“엇! 마침 나오는……?”

와아아!

문을 열고 환호와 함께 우르르 몰려나오는 건 아직 조그만 아이들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그쪽을 쳐다보던 바이칼이 헛 하고 숨을 들이켜며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일행 대부분이 표정을 굳혔다.

“저, 저거!”

“흐음.”

쥬다스도 턱을 짚으며 흥미로운 눈으로 아이들을 응시했다.

수업이 끝나 저들끼리 신나 조잘거리며 밖으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라 키와 체구가 들쭉날쭉했다.

나이대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보통 아이처럼 신난 표정에 대화 내용조차 평범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에게선 눈에 확 띌 만한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커다란 크림색 여우귀가 살짝살짝 팔랑거렸다.

심지어 복슬복슬한 꼬리마저 바지나 치마 사이로 빠져나와 있었다.

이를 확인한 쥬다스가 태평한 어조로 그 정체를 규명했다.

“수인족이로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이고 ㅠㅠ 어젯밤에 그만 깜빡 잠들어버렸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며,

다음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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