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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수인족이라고요?!”
세상에는 다양한 종족이 공존한다.
그중 지능이 높고 개체수가 많은 인간이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미개척 영역이나 인간이 살기 어려운 야생 등에서는 이종족들이 존재했다.
이종족이라 함인즉, 드래곤이나 와이번 같은 용족뿐 아니라 위그드라실이나 페가수스 같은 신성족, 일반 몬스터와 짐승뿐 아니라 수인족 또한 상당수 보고가 되는 편이었다.
다만 수인족의 경우 인간과 섞여 살지 않고 거친 야생에서 조용히 숨어 사는 편이기 때문에 그들을 목격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중 황량한 사막에서만 살아간다는 사막 여우 수인족을 이렇게 대놓고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인 바이칼의 표정이 튀김옷에 갇힌 새우마냥 찌그러들었다.
“어!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바보야, 선생님이 낯선 사람 보면 먼저 숨으라고 했잖아?”
“아냐, 알투르케에선 안 그래도 된다구 하지 않았어?”
신나서 문 밖으로 달려 나온 아이들은 쥬다스 일행을 발견하고 주춤 멈춰 섰다.
그리곤 저들끼리 모여 수군수군 의견을 나누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엉덩이에 달린 꼬리가 바람 앞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속닥거리던 사막 여우 아이들은 문득 투르키를 발견하고 왁 소리쳤다.
“투르키!”
“에이, 뭐야. 투르키가 데려온 거면 괜찮아.”
어린 강아지들처럼 주변을 뽈뽈거리고 맴도는 아이들을 향해 투르키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그리 살가운 반응이 아니었는데도 아이들은 와! 하고 거울정령을 둘러쌌다.
“근데요.”
투르키에게 몰려든 아이들 틈에서 한 수인 여자아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키가 겨우 쥬다스의 허리에 닿을락 말락한 작은 소녀였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발에는 신발 대신 보드라운 크림색 털이 뒤덮고 있었고 짐승처럼 손톱발톱이 갈고리 형태였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코 양쪽으로 긴 여우 수염도 세 가닥씩 자라 있었다.
“누구세요? 어디서 왔어요? 여기 왜 왔어요? 그리구…….”
“이런, 질문이 너무 빠르구나.”
스륵-
쥬다스는 옷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자리에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따뜻한 금안과 시선을 마주한 여우족 소녀는 움찔 커다란 여우 귀를 까딱였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주지 않으련? 아가.”
“……아가 아닌데, 제 이름은 류히인데요.”
“그래, 류히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단다. 여기엔 아벨을 만나러 왔어,”
류히는 아벨이란 이름에 반응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벨 님을 만나러? 그럼 아벨 님 친구예요?”
그 순진한 물음에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아벨의 학교 친구란다.”
“화, 황공할 따름입니다.”
류히의 뒤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학교 밖으로 나온 아벨이 그의 앞에 엎드리다시피 무릎 꿇었다.
“전……!”
“학우가 아니더냐.”
‘전하’로 이어져야 할 인사말이 뚝 끊어졌다.
쥬다스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느라 꿇어 안고 있던 무릎을 펴며 엎드린 아벨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아벨.”
“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벨은 내밀어진 손을 덜덜 떨며 맞잡고 일어섰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아벨 투르케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예전의 비실비실하던 체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구릿빛으로 탄 피부에 잘 단련한 근육이 구석구석 자리 잡았다. 거기다가 키도 훌쩍 자라 쥬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했다. 심지어 같은 나이 대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에단보다도 더 컸다.
아벨은 과거 루바흐 학창 시절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폭력에 당하기만 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용맹한 사막 부족 투르케를 이끄는 수장이었던 아비를 닮아 훤칠하게 잘 자라 있었다.
사자 갈기처럼 어깨선까지 투박하게 자라난 잿빛 머리카락이 건조한 사막바람을 타고 살짝 흩날렸다.
“예! 투르케의 친우이자 스승이 되어주신.”
아벨의 잿빛 눈동자에 일렁이는 물기가 맺혔다.
그는 맑게 빛나는 눈으로 쥬다스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을 뵙습니다.”
「얘가 그때 걔 맞아? 엄~ 청 씩씩하게 자랐네.」
「말 더듬는 버릇도 사라졌다요!」
「맞아요, 그거 은근 신경 쓰였었는데.」
정작 쥬다스는 편안하게 인사를 받고 있었지만 정령들 사이에선 워어 하는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실체화가 되어 있지 않아 정령들의 반응은 눈치채지 못한 아벨을 향해 투르키가 달려가 와락 목에 매달렸다.
그러고 있으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매처럼 보였다.
“그, 우, 우선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말 더듬는 건 아직 못 고친 것 같은데?」
「지금은 긴장해서 그런 것도 같아요. 원래 소심한 성격이었으니까요.」
카니의 짐작대로 아벨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황하여 무척 긴장한 채였다.
수인족 아이들은 오히려 긴장한 아벨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주위에서 쫑알거려 댔다.
“친구인데 어떻게 스승님도 될 수 있어요?”
“친구인데 왜 존댓말해요?”
“…….”
아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어서 집에 가세요.”
“네에.”
다행히도 수인족 아이들은 아벨을 무척 잘 따르는 편이었다.
꼬리를 살랑이며 와르르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푹 한숨을 쉬었다.
“……보셨다시피 지금은 사막 여우 수인족이 투르케의 주민입니다.”
아벨은 앞장서서 알투르케의 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설명대로 거리에 돌아다니는 주민 대부분은 여우 귀와 꼬리가 달린 수인족이었다.
신체적인 특성이 다를 뿐 감성과 인지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여우 수인족들은 평화롭게 투르케를 지켰다.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도 있고 학교나 의원 같은 복지 시설도 존재했다.
“특이하군. 저들과는 어떻게 연이 맺어진 거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은 에단의 물음에 아벨은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투르케가 얼어붙은 동안 사막 여우족도 큰 피해를 입은 모양인지라, 제가 여기에 돌아왔을 때엔 다들 배를 곯아 무척 흉포해져 있었습니다.”
“……그 흉포해진 이들을 주민으로 받아들였다?”
“예, 먼저 칼을 버리고 대화를 청했습니다. 다행히도 도울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아 어찌어찌 잘 해결을 하여.”
“아벨, 거짓말한다. 그때 여우한테 물려 죽을 뻔했다.”
대충 둘러 설명하던 걸 투르키가 순진한 얼굴로 홀랑 끄집어냈다.
그 바람에 아벨이 난감한 목소리로 투르키를 불렀지만 이미 쥬다스의 흥미를 산 후였다.
“흐음. 이빨을 드러낸 여우들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대화를 청한 게냐?”
“아, 예에. 그게 그땐 벌써 2년 전이기도 하고……. 지,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미숙했던 때였는지라.”
“투르키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볼 뻔했구나. 무모한지고.”
나무라는 말을 하면서도 쥬다스는 쿡쿡 작게 웃었다.
투르키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 말에 동조했다.
“맞다, 무모! 아벨은 바보다. 무식하다. 점점 더 멍청해진다.”
“투르키이이…….”
거울정령의 당돌한 반란에 아벨은 이마를 짚고 끙 하는 소릴 냈다.
“그만큼 자신의 정령인 투르키 널 믿었다는 뜻도 되겠지. 상대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바보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믿음이, 강해?”
“그래, 아벨이 너를 진실로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야.”
투르키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아벨을 휙 돌아보았다.
자기 정령과 눈이 마주친 아벨은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제, 제가 잘못했던 일입니다. 그날 투르키를 많이 놀라게 했죠.”
“그래도 그 결과 이리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거로구나. 수인족과의 공생이라. 마을이 아주 생기가 넘치고 보기 좋아졌어. 축하한다, 아벨.”
“감사…… 합니다.”
뜻밖의 칭찬을 듣게 된 아벨은 완전히 예전의 소심했던 모습으로 돌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옛날 왜소했던 소년이 아니라 떡 벌어진 덩치로 짓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본 일행은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세이지가 주변 건축물을 손으로 살짝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건물들은 전부 모래로 지은 겁니까? 희한하게 감촉이 부드러운데도 엄청 단단하네요.”
“아, 그건 그냥 모래가 아닙니다.”
아벨의 답변을 들은 세이지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응? 그냥 모래가 아니면 무슨 모래죠?”
“사막 여우족으로부터 알게 된 기술입니다만, 건축에 적합한 모래를 만드는 법이 따로 있습니다. 저쪽을 봐주시겠습니까?”
아벨은 농작지로 보이는 한 울타리를 가리켰다.
그의 소개를 따라 울타리로 가까이 다가간 일행은 순간 전투태세를 취할 뻔했다.
“샌드웜……!”
“퀘에엑. 웨엑.”
거대한 그림자가 모래밭을 점령하고 있었다.
황소 한 마리 굵기에 마디마디마다 꿀렁이는 주름, 길게 늘어진 몸통은 꼬리를 제외하고 땅에 파묻혀 있어 전신을 다 볼 수가 없었다.
흡사 거대한 지렁이를 연상케 하는 몬스터, ‘샌드웜’이었다.
놈들은 전체적으로 붉은 팥색이었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라 척 보기에도 열 마리는 넘는 숫자가 그 모래밭에 서식했다.
연신 몸통 주름을 꿀럭꿀럭거리는 커다란 샌드웜을 보며 검집에 손을 올린 에단을 향해 아벨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샌드웜은 육식성 몬스터가 아닙니다. 돌이나 모래를 먹고 살아요. 뿐만 아니라 건축용 모래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하?”
놈들의 머리 부분에는 눈도 코도 없이 오로지 타원형으로 길게 찢어진 입이 자리해 있었다.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다닥다닥 엿보였는데 그 사이로 여러 갈래 갈라진 혓바닥이 쉼 없이 날름거렸다.
샌드웜들은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도 반응하지 않고 열심히 모래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땅 밖으로 빼꼼 내민 꼬리를 통해 하얀 배설물을 쏟아냈다.
“웨에에엑.”
“…….”
배설물을 뱉는 소리가 마치 사람이 구토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각자 틀어쥐었던 무기에서 손을 뗀 기사단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웩웩거리는 샌드웜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벨이 그들이 뱉어놓은 하얀 배설물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이게 바로 건축용이나 도구 제작용으로 사용되는 모래입니다. 티끌조차 없이 새하얀 색이라 저희끼린 ‘화이트샌드’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학계에는 발표되지 않은 재료인지라.”
일반적인 상식으론 사막에서 출몰하는 거대 몬스터 ‘샌드웜’은 위험한 존재였다.
몸통의 대부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어 실제 모습과 길이를 추측하기 어려우며, 외피가 끈끈한 액체로 뒤덮여 있어 미끈거리는데다 두껍기까지 해 어지간한 날붙이는 꿰뚫지 못했다.
그리고 모래 속 이동속도가 독수리보다 빨라 사막에선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징그러운 외형과 쉽게 잡을 수 없는 특징들을 보고 사막의 괴수라 부르며 샌드웜을 만날 경우 사냥하여 죽이려 들 거나 도망쳤다.
그러니 이 샌드웜이란 존재가 사막의 모래를 귀한 재료로 변환시켜 주는 순기능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이트샌드는 굳으면 시간이 지나 상태에 따라 종종 보석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정식 명칭은 없지만 색과 형태가 아름다워 알투르케에선 장신구로 가공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각진 보석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 화이트루비입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는 똥.
으아아, 요즘 왜 11시만 되면 잠드는지 무슨 잠자는 숲속의 뭐시기라도 된 기분입니다. ㅠㅠ...죄송합니다.... (꾸벅)
그래서 자꾸 상쾌한 아침에 뵙게 되네요! 아하하.;;
한주의 마지막인 불금이네요. 독자님들 모두 오늘 하루도 파이팅하시고, 행복한 주말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