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28화 (12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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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분명 신기하긴 한데.’

그리 썩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는 가공 과정이었다.

여전히 큰 몸통을 꿈틀거리고 있는 샌드웜들을 힐끗 쳐다본 세이지는 목선을 따라 돋은 소름을 문질거리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일행의 불편해하는 기색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챈 아벨이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였다.

“멋지구나.”

“옛?”

어느 틈엔가 쥬다스가 샌드웜 한 마리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하는 표정으로 잠든 플루비를 어깨에 둘러업은 바이칼이 그 뒤로 슬금슬금 따라붙었다.

“……쥬다스 님?”

“이런 발전이 가능하다니.”

전생의 이그레트가 그저 모든 자연을 다루는 탓에 현자라는 호칭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는 본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데에 흥미가 많았고 생태계에 일어나는 자연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높았다.

늘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굴던 그가 유일하게 아이처럼 설레는 순간이 바로 지금처럼 새로운 발견을 찾아냈을 때였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순환이야…….”

그는 서커스를 구경하듯 샌드웜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꺼칠한 모래가 샌드웜의 둥근 입으로 들어가 꿀렁거리는 주름을 지나 결국 화이트샌드가 되어 우수수 쏟아지는 과정까지 빠짐없이 관찰한 그는 그 모래로 지어진 알투르케의 성벽과 건물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장소였다. 생명도, 기술도 없던 척박한 땅.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공존하여.’

쥬다스는 진정으로 아벨의 능력에 경탄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땅을 만들었구나.’

아벨은 누가 뭐래도 사막부족 투르케의 후예였다.

소심하고 남들보다 느릴지언정 그만큼 만사 꼼꼼하게 살폈으며 자신이 배척받은 경험을 통해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뿐 아니라 귀나 꼬리가 달린 수인족도, 크고 징그러운 샌드웜도 전부 알투르케의 주민으로 살아간다.

그건 어느 지도자도 아닌 아벨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퀘엑. 우웨웨엑.”

그리고 그가 감탄하는 사이, 나머지 수하들도 본의 아니게 함께 샌드웜 농장을 진득하니 관람했다.

“전하께서 환형동물에 관심이 많으셨을 줄은.”

“……바이칼, 조용히.”

수하의 경박한 입놀림을 제지하긴 했지만 에단도 조금은 당혹스런 눈길로 자신들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늘 생각이 깊고 인자한 성인같이 보이다가도 가끔 이렇듯 엉뚱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에단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모든 걸 한 번에 다 이해하기보단 일단 지켜보며 따른 후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쥬다스는 곧 샌드웜 농장에서 발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벨의 처소가 있었다.

귀족 저택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제법 크고 깔끔했으며 손님들이 머물 만한 여유 공간도 충분했다.

짐을 풀고 호위들을 쉬게 한 후, 편한 차림으로 다시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자 원탁에 둘러앉았다.

“본디 네 고향이라고는 하나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리느라 많이 힘들었겠구나. 지금 크게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없느냐?”

“아, 아닙니다. 알투르케는 이제 막 작은 싹을 틔운 셈이니 할 일이 많긴 해도 관리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곧 사람들이 더 유입되면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하니 그때부터가 난관이리라 미리 마음먹고 있습니다.”

소심함에 책임감이 더해지자 치밀함과 신중함이란 결과를 낳았다.

5년 전 루바흐에서 투르케의 전멸소식을 들은 당시, 정령 폭주를 일으키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더라면 결단코 이룰 수 없을 발전이었다.

그런 아벨을 장한 시선으로 바라본 쥬다스가 턱을 괴며 넌지시 물었다.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온 연유는 묻질 않는 게냐.”

“어찌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의문을 가, 갖겠습니까.”

뜬금없이 여행객 차림으로 나타난 쥬다스 일행에게 아벨은 일말의 의문도 갖지 않고 그들을 대접했다.

아벨에게 있어서 쥬다스는 여전히 제 목숨과 삶을 바친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에 대한 신뢰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지금 당장 갑자기 자결하라 명령해도 아벨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꺼이 검을 들어 제 목을 그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 꿇었다.

“명하소서. 따르겠나이다.”

학원 루바흐에서부터 이어져 온 충성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이런. 네게 무언가를 부탁하고자 온 게 아니란다, 아벨. 그저 보러왔을 뿐이야.”

“……예?”

공손히 무릎 꿇었던 아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전혀 변하지 않은 금빛의 눈동자가 따스함을 담고 그를 향하고 있었다.

“말했지 않느냐. 나는 지금 너의 학교 친구라고.”

“그, 그런.”

“음? 혹시 친구라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던 게냐? 이거 민망한 일이로세.”

“아,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벨은 쥬다스의 농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오히려 그의 정령인 투르키가 순진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아벨, 친구 없다. 친구는 같이 있을 때 편한 거랬다. 친구끼린 솔직해야 하고 의리란 걸 지켜야 한댔다! 근데 아벨 지금 편하지 않다. 왕왕 부담 느끼는데 아닌 척한다. 그러니까 여기엔 친구 없다아.”

“투르키, 제발.”

진솔하다 못해 눈치 없기까지 한 정령의 주책에 아벨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우울하게 고개를 푹 숙이는 걸 본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가 그럽디까? 친구는 뭐 편하고 솔직하고 의리 있고.”

“그, 그게.”

“거, 친구를 글로 배우셨습니까요, 투르케 영주님?”

실제로 친구란 개념을 책에서 배운 아벨은 아무 말 못 하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들긴 바이칼이 연이어 말을 건넸다.

“어이구, 무슨 버프 마법이냐? 같이 있으면 편해지게. 편하기만 한 친구란 건 없어. 솔직히 친구끼리도 감추는 거 많지. 무슨 영혼의 동반자도 아니고 살면서 친구끼리 모든 걸 오픈하고 다닐 리가.”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칼의 뒤에서 이마를 짚은 에단이 한숨과 함께 동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놀 때 편한 친구가 있으면, 좀 불편해도 더 신뢰가 가는 친구가 있는 거고. 진지한 얘기하기엔 좋은데 취미가 맞지 않아서 잘 안 만나는 놈, 혹은 엄청 편한데 속 얘기 터놓기엔 영 좋지 않은 친구도 있고.”

“그 말씀은 친구에도 종류가 있다는 뜻입니까?”

“뭐 비슷해.”

“그, 그럼!”

“엉?”

아벨은 마치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긴장된 얼굴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몹시 부담스러워진 바이칼이 슬쩍 뒤로 물러서는 순간 소심한 질문이 들려왔다.

“저…… 저…… 저도 정녕 여러분의 학우…… 였습니까?”

“뭐래,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이 학우 소릴.”

다시 시무룩해지려는 아벨을 향해 바이칼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낯간지러우니까 한 번만 말한다. 햇수로 따지면 5년.”

“……?”

“그때부터 아벨 너랑 친했던 것 같다고. 오 년 지기, 이해됐냐?”

“아.”

그의 당당한 태도에 아벨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말을 꺼낸 바이칼은 밀려오는 낯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괜히 새근새근 잠든 플루비를 흔들어 깨웠다.

“이 뱀대가리는 겨울도 끝나 가는데 동면이냐. 일어나, 짜샤.”

“삐이이…….”

플루비는 눈도 뜨지 않고 힘없이 울먹인 뒤 다시 날개에 코를 묻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기운 없는 모습을 본 아벨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건?”

“아, 이 녀석? 플루비다. 종족은 블루 와이번.”

“와, 와이번입니까? 그런데 어디 아픈 것 같은…….”

“삐액.”

자꾸 건드리는 손길이 귀찮아진 플루비가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치유술사들의 힘으로 다 나았지만 사령들에게 입은 손상은 쉽사리 낫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아무리 물을 먹여도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푹 젖은 스펀지마냥 물을 도로 줄줄 토해냈다.

하루 중 대부분은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 있는 시간도 잠시 칭얼거리다 축 처질 뿐이었다.

내심 걱정하던 바이칼은 찡찡 우는 플루비를 익숙한 손길로 다독이며 말했다.

“그게, 사령들한테 당했어. 좀 지독하게 당한 거라 그런지 잘 낫질 않네.”

유심히 플루비의 상태를 살핀 아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뭐가? 왜?”

“아, 아뇨. 수인족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대충 동물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게 되어서. 용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위험하다는 건 무슨 소린데.”

아벨은 난감한 얼굴로 플루비의 콧등을 살짝 매만졌다.

“한 번씩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눈빛이 너무 흐립니다. 특히 지금처럼 꼬리가 펴지지 않고 계속 휘어진 채로 있다면 상태가 정말 나쁘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건 용족에게도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동물은 냄새로 정보를 판별해야 하는데 코끝이 이렇게 메말라 있다는 건 위험신호라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바이칼은 끙 소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태가 나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치유술로도 처치가 안 되는 걸 당최 어떻게 해야 좋아질지.”

“그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플루비를 향한 걱정 가득한 시선을 눈치챈 아벨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 투르케 사막에는 ‘아큐미나타’라 불리는 천년목이 있습니다.”

“아큐미나타?”

“예, 천 년 이상 묵어 영물이 된 선인장입니다. 아큐미나타는 선인장이 피우는 꽃 이름이기도 한데……. 본래는 용신목에 해당하는 선인장이라 하더군요. 이 아큐미나타 꽃을 달여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그 어떤 상처나 병도 씻은 듯이 낫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 그 천 년 묵었다는 선인장 꽃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바이칼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아벨은 꿋꿋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능을 본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슨 문제?”

“아큐미나타는 호기심이 많은 동시에 겁이 많은 선인장이라……. 한 자리에 있질 않고 이리저리 사막 전역을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신기루처럼 나타나 꽃을 선물하고 사라진다고…….”

나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바이칼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은 사과처럼 찌그러졌다.

“와씨, 소름. 그게 뭐야. 괴담이냐?”

“저, 전설입니다만.”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한마디씩 보탰다.

“전설치곤 꽤나 세세하군.”

“놈의 꽃이 그 정도로 효과가 좋은 영약이라면 어째서 사냥하려는 자는 없는가.”

“그것이, 천년목 아큐미나타에 관한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전설까진 아닙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실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을 직접 봤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천 년이 넘게 살아오며 숨는 데에는 도가 튼 선인장이라. 일부러 잡으려는 사람 눈에는 절대로 띄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나 참, 겁나게 도도한 선인장이네.”

바이칼은 투덜거리며 플루비를 코앞까지 들어 올렸다.

기운 없이 눈을 깜빡인 플루비가 삐잉 울었다.

“얌마, 들었냐. 천 년이나 묵었다는 할배 선인장, 찾으러 가볼까?”

“삐이?”

“그래. 내일 날이 밝거든 같이 찾으러 가보자꾸나.”

조용히 듣고만 있던 쥬다스가 대신 대답했다.

뒷동산에 산책 가자는 제안처럼 가볍게 건넨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황토빛으로 반짝이는 땅의 정령을 손에 얹은 쥬다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땅에 관해선 숨은그림찾기에 자신이 있는 친구가 하나 있으니 말이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크흠. 선인장에게서 뭔가 낯익은 느낌을 받으셨다면..... 그 느낌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쿨럭.

평화로운 주말이네요!

저는 어제 불금을 홀로 불태우려고 신나게 편의점을 털어(?)왔는데 결국 또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ㅠㅠ 뜯어놓고 한모금 마신 아까운 드라이피니시만 날아갔습니다. 흑..

그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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