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29화 (12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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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메마른 화분처럼 바싹 말라 시름시름 앓고 있는 플루비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바이칼이 적극적으로 나선 탓에 아큐미나타 꽃 탐색에 대한 일정이 곧장 잡혔다.

날이 밝으면 다 함께 천년목을 찾으러 가자는 결론을 끝으로 그들은 자리를 파했다.

아벨은 일행을 편히 쉴 수 있는 개인 객실로 안내했다.

각자 휴식을 위해 뿔뿔이 흩어지자 쥬다스도 모처럼 독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사막도시는 어둔 밤중에도 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무리가 지평선에 맞닿아 고운 가루를 흩뿌려놓은 듯하였다.

쥬다스는 여독에 지친 몸을 쉬는 대신 창틀에 기대 하염없이 그 경관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소매를 누군가 살짝 잡아당겼다.

「이그레트.」

투르키를 만난 이후 손가락만 한 크기가 아니라 실제 소녀의 외향을 유지하고 있던 카니였다.

쥬다스는 그녀의 순한 다홍빛 눈망울에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보구나.”

「응. 하나만 대답해 줘요. 이그레트, 지우고 싶나요?」

계약자가 느끼는 감정과 사고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정령들은 이미 그의 고뇌를 알고 있었다.

붉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하얀 옷자락과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의 기운도 사막의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일렁였다.

흡사 불의 여신마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의 후회. 너를 괴롭게 만드는 그 아이들. 죽이고 싶어요?」

“카니.”

순진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로 잔혹한 말을 입에 담는다.

맑고 깨끗한 정령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세상만물을 사랑으로 감싸는 신과는 달랐다.

자연이란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지만 때론 무섭도록 냉정했으며 아무에게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녀가 순진한 아이같이 구는 건 오로지 계약자에 한할 뿐이었다.

카니는 자신의 계약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재차 질문했다.

「아니면, 그 애들이 죽고 나서가 두려운 거예요?」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사람의 심리에 해박한 불의 정령왕은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곤 했다.

쥬다스가 답하지 않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팔짱을 낀 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끄응, 과거의 인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건 알겠지만. 너 지금 좀 위태로워 보인다구.」

“……내가?”

「응. 꼭 쓴 약을 두고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아이 같아.」

「헤에, 뭐 하러 고민한다요? 그냥 한입에 꿀꺽 삼키면 되는 거다요.」

토니의 간단명료한 해답에 유니가 손을 내저었다.

「약을 마셔야 병이 낫는 걸 아는데도, 마신 후에 그 쓴맛을 견딜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여.」

사실이 그랬다.

그가 가진 힘이라면 할더와 레이야가 마침 한 장소에 나타났을 때 한순간에 그 숨통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가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이 그들을 숨 멎게 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 나는 자신이 없어. 사실은 지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과거가 사라져야 모든 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그를 등진 아이들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견뎌야만 했다.

그리 생각한 쥬다스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폭풍처럼 가슴속을 헤집던 불안을 잠재웠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그에게 있어 오랜 시간 몸에 익힌 봉술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그의 침묵을 지켜보던 카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자그마한 크기로 모습을 되돌렸다.

「으응,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마음이 편할 때까지 고민해 봐요. 그러고 나서.」

새빨간 불씨 같은 깃털 하나가 쥬다스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그레트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우리에게 알려줘요.」

―너는 그저 바라기만 하면 돼.

언제나 그래 왔듯 정령들은 오직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무게에 대해 누구보다 크게 실감하고 있는 쥬다스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사막의 냉혹한 밤바람과 함께 그날 하루가 저물었다.

날이 밝자, 일행은 전날 이야기했던 대로 천년목 아큐미나타 수색에 나섰다.

수색조엔 아벨도 함께였다.

“생김새는 일반 용신목에 해당하며 크기는 성인 남성 평균 키의 다섯 배 정도, 꽃은 황백색입니다. 식물이지만 말할 줄 알고 자의로 움직일 줄도 안다고 들었습니다.”

아벨이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토니가 투르케 사막 전역의 식물에 대해 탐색을 시작했다.

땅을 지배하는 정령왕의 수색망에선 제아무리 천 년을 넘게 산 영물이라 할지라도 벗어날 수 없다.

탐색 결과, 다행히도 아큐미나타는 알투르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더운 바람이 부는 눈부신 모래언덕 사이로 선인장들이 하이에나 떼마냥 한꺼번에 우그르르 자라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 키만 한 선인장을 기웃거리던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다 키가 고만고만한데요.”

“그러게? 특별히 꽃이 피었다거나 눈에 띄게 커다란 개체는 보이지 않는데.”

세이지도 동의를 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행 중 누구도 아벨의 정보에 들어맞는 선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누군가 일부러 밭을 만들어놓기라도 하듯 선인장들이 몰려 자라고 있는 특이한 구역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천년목 아큐미나타는 보이지 않았다.

“헛헛. 그야말로 숨은그림찾기로군요?”

콜이 여유로이 너털웃음을 짓자 쥬다스도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답했다.

“한번 재미 삼아 찾아보시렵니까, 스승님?”

“아니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져서 말이지요.”

“흠, 그렇습니까. 아직 정정하실 나이인데요.”

“……자꾸 놀리지 마십시오. 소신은 이렇게 나이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럽습니다.”

나이 칠십 먹은 노제자의 면구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도 쥬다스는 농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안에는 블루베리가 특효라 하더군요. 으음, 식이요법이 확실히 효능이 있었던 것도 같고…….”

“정말 이러시깁니까?”

“옳거니. 마침 잘되었군요. 내년 봄에는 레이븐 시티에서 열매를 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쥬다스 님.”

콜이 거의 울 것 같이 눈꺼풀을 부르르 떤 후에야 그의 어린 스승은 농담을 멈추었다.

“토니.”

「저거다요!」

똑같이 생긴 선인장이 잔뜩 자라난 모래밭에서 토니는 정확하게 한 그루를 가리켰다.

크기로 보나 외형으로 보나 몹시 평범하게 생긴 선인장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 두 팔을 활짝 펼친 선인장에는 세로결을 따라 스티치 자국처럼 뾰족한 가시가 자라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선인장 앞에 파닥거리며 내려앉은 토니가 손가락으로 가시가 없는 매끈한 부분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얘한테서 특이한 냄새가 난다요. 천 년 이상 오래도록 생기를 품어온 식물 냄새?」

「으, 천 년을 품어온 냄새라고 하니까 뭔가 이미지가 구리구리해지잖아.」

실제로 체향이 나는 건 아니었다.

땅의 정령인 토니가 영물이 지닌 기운을 알아보고 있을 뿐이지만 질 낮은 표현을 접한 유니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이겁니까? 들은 것보다 훨씬 작은데요. 꽃도 달려 있지 않고.”

“……꽃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바이칼과 에단도 영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천년목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아벨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를 살폈다.

“그, 제가 들은 건 사막에 도는 전설 같은 거라 어느 정도 왜곡된 부분도 있긴 할 겁니다.”

“야야. 암만 그래도 꽃은 달려 있어야지. 그래야 뽕도 따고 임도 볼 거 아냐.”

바이칼이 스태프로 선인장을 툭툭 건드리며 투덜거렸다.

“아예 뿌리째 뽑아서 화분에 심어놓고 꽃이 자랄 때까지 지켜봐야 하나?”

움찔, 평범한 식물인 양 고요하던 선인장이 미동했다.

바이칼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아벨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어쩔래? 네가 가져가서 그 전설이 사실인지 실험해 보든가.”

“제, 제가요?”

“엉. 우리야 이거 꽃 피울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릴 순 없으니까.”

그는 우물쭈물거리는 아벨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근데 이거 어떻게 뽑……?”

다시 선인장 쪽을 쳐다본 바이칼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태양을 가리고 우뚝 치솟은 선인장이 보였다.

“……저기 혹시 선인장이란 것들도 와이번처럼 물 뿌리면 쑥쑥 자랍니까?”

우드득!

앙증맞게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던 가지에서 사람 손가락보다 더 굵은 가시가 돋아났다.

이젠 가시가 아니라 칼날 수준으로 번뜩이고 있는 모양새를 발견한 에단이 제일 먼저 검을 빼 들었다.

“물러서라.”

“옙.”

더 이상 평범한 선인장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선인장이 날카롭게 자라난 가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마치 잔뜩 성난 고양이가 털을 부풀린 자세와도 비슷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선인장이 사람처럼 두 발로 일어섰다.

그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 무섭.」

“……?”

「흡. 잔인해. 어떻게 뿌리째 뽑는다는 이야길 할 수가!」

정령들과 비슷하게 사념파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특정 대상에게만 들리는 정령 언어와 다르게 선인장의 말은 장내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분위기로 울먹거리던 거대 선인장은 이내 폭발적으로 소리쳤다.

「으아아아, 손 내려놓고 칼 들어!」

“바, 반대 아냐?”

「닥쳐!」

선인장은 가시를 바들바들 떨며 위협적으로 팔을 붕붕 휘둘렀다.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본 일행이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자 선인장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네 이 간악무도한 놈들! 뿌리째 뽑겠다는 말을 취소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정작 본인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하는 주제에 입만 당당했다.

나설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정령들 대신 쥬다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서운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나 우린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지!」

“뿌리째 뽑지도, 칼을 휘두르지도 않으마.”

그 말에 따라 에단을 선두로 모든 기사단원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상대가 먼저 날붙이를 갈무리하자 선인장도 기세를 누그러뜨렸으나 여전히 미심쩍은 어조로 다시 물었다.

「뭐야, 뭐야. 네가 보스임? 여긴 그럼 뭐하러 왔음? 만에 하나 수상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면!」

「어머? 태우지 않겠단 말은 안 했는데.」

화륵!

마른 허공에서 불길이 피어올라 선인장의 팔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팔위에 위협적으로 돋아났던 가시들이 홀라당 타서 사라져 버리자 선인장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그러니까 입조심하세요. 알겠죠?」

「넹.」

해맑게 방긋 웃는 카니를 앞에 둔 선인장은 오들오들 떨며 냉큼 수긍했다.

쥬다스는 살짝 한숨을 쉬곤 카니를 손바닥에 감싸 안았다.

“아픈 친구가 하나 있어. 상태가 계속 좋지 않던 참에 네 꽃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거란다.”

「아프다고?」

그 말에 선인장이 관심을 보였다.

놈은 겁이 많고 경계를 잘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해칠 심성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죽어가는 자나 병마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자를 보면 슬쩍 꽃을 선물해 주고 갈 정도로 생명을 아끼는 편이었다.

「누가?」

“이 녀석.”

물러서 있던 바이칼이 품에서 잠든 와이번을 꺼내놓았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플루비를 향해 스르르 가지를 뻗은 선인장이 곧 알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게, 아파 보이네. 그냥 두면 올 해 안에 죽을 듯.」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한성깔하는 카니....

오늘 보름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봤습니다.ㅠㅠ 내일은 보름 비스므리한 거라도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ㅎ 아쉽습니다.

(사족으로 조만간 다른 글들도 연재재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그럼 이번 한 주도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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