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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죽긴 누가 죽는다고. 어때, 그 꽃인가 뭔가로 살릴 수 있겠냐?”
「안 알려줌.」
무척이나 당당한 거절 의사였다.
황당함이 실린 침묵이 한 차례 선인장 밭을 감돌았다.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슥 훔치며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요. 말할 때까지 불 고문이라도 해볼까요?”
「끼야악! 인간이 어쩜 그렇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그러는 너야말로 인간도 아닐뿐더러 피도 눈물도 없지 않냐?”
선인장은 분노에 가시를 부르르 떨다가 이내 퉁명스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솔직히 진짜 몰라. 모르는 걸 어떻게 장담함? 난 양심이 반듯한 식물이라 그렇게는 못함.」
“만병통치약이라던데.”
「만병통치약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어깨 뭉친 게 풀어지는 정도일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아예 효과가 없을 수도 있음.」
“허어?”
「대박 아니면 쪽박. 것도 아니면 꽝이 뜨기도 하는 선인장꽃도박! 어때? 끌림? 끌리면 한번 시도나 해보시든가. 근데 좀 신중해야 할걸. 꽃을 피우는 과정이 좀 아프거든.」
도박장 직원처럼 쫑알쫑알 설명을 늘어놓던 선인장은 다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슬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정 도박하고 싶다면.」
선인장이 바이칼을 향해 손을 내밀 듯 스르르 가지를 뻗었다.
「나한테 피를 먹여줘.」
“잠깐. 뭘 달라고?”
「피. 갓 짜낸 따끈따끈한 피 말이야. 아, 너무 적으면 꽃이 안 피니까 양은 적당히. 많을수록 좋고? 그리고 저 와이번이랑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효과가 좋…….」
“이 돌팔이 선인장이 어디서 약을 팔아!”
얼토당토 안 되는 조건이라 여긴 바이칼이 버럭 소리치며 스태프를 말아 쥐었다.
주변에 몰려든 마력이 이글이글 금방이라도 화염 마법을 시전할 기세로 변모하자 선인장은 화들짝 놀라 사람 키보다 작게 쭈그러들었다.
「왜 이래 이 사람아. 싫음 말고! 애 떨어질 뻔했네.」
순식간에 기가 팍 죽은 선인장을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가 바이칼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이 아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닌 것 같구나, 바이칼.”
“하오나 피를 탐하는 식물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무턱대고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쪽은 우리이질 않느냐. 꽃을 피우는 데에 피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도 역시 우리의 선택이지.”
「고럼고럼, 내 말이 고거시다! 역시 보스, 멋졍!」
바이칼은 옆에서 방정맞게 구는 선인장에게 찜찜한 시선을 주었다.
“이봐. 피는 뭐, 얼마나 필요한데?”
「니 꼴리는 대로 주세요.」
선인장의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언행에 인상을 팍 찡그리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일행을 돌아보았다.
“……제가 합니까?”
“그럼 누구보고 하라는 거지?”
에단이 간결하게 덧붙였다.
“신룡의 기사님.”
“으아아아! 제가 할 테니까 제발 그 호칭 좀 넣어두십쇼.”
사색이 되어 치를 떤 바이칼은 터덜터덜 선인장 앞에 섰다.
“근데 피는 어떻게 뿌려야. 어어, 손바닥이라도 찢어야 하나?”
「아, 그거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해.」
선인장은 푸근한 어조로 말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짜잔. 프리허그!」
“선인장 주제에 뭔.”
「아니, 농담 아니고 진짜 피는 많이 흘릴수록 효과가 짱짱함.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난 죽으라고?”
바이칼이 황당하게 되묻는 순간이었다.
“치유술사들이 대기 중이니 죽진 않을 거다.”
다시 한 번 끼어든 에단이 무심한 손짓으로 뒤에 대기 중인 기사단원들을 가리켰다.
그 안엔 칼에 찔리고 뼈가 부러지는 치명상조차 즉각 치료가 가능한 실력파 치유술사가 둘이나 섞여 있었다.
바이칼은 허탈하게 웃으며 양팔을 쭉 뻗은 선인장을 바라보았다.
반짝!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가시는 흡사 상어 이빨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바이칼이 품에 안고 있던 플루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플루비.’
지하에서 사령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를 찾아온 플루비가 온몸으로 그 공격을 막아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날개가 찢어지고 비늘이 계란 깨지듯 쩍쩍 갈라질 정도였으니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꿈쩍 않고 그를 지켰다.
귓가에 놈의 울부짖던 소리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바이칼은 한숨을 쉬며 로브를 벗었다.
‘겨우 이 정도로 약한 소리해서는 너한테 너무 미안하지.’
그러곤 플루비를 아기처럼 로브에 잘 싸매 에단에게 넘겨주었다.
뜨거운 사막을 지나가느라 로브 속에는 얇은 티 한 장만 자리했다. 소매를 걷어붙이자 그의 살갗 위로 건조한 모래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꽉 깨문 바이칼이 눈을 질끈 감으며 팔을 뻗었다.
“거, 거짓말이면 진짜 태워 버릴 거다.”
「아이 부끄러웡.」
수줍어하는 선인장을 살짝 끌어안자, 따끔하고 가시가 살을 파고들었다.
어찌나 뾰족하고 날카롭던지 맨살은 고사하고 옷자락마저 뚫고 온몸을 붉게 물들였다.
생살을 파고드는 선인장 가시에 시큰해지는 코를 훌쩍이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냐?”
「뭐래. 이래 가지곤 택도 없음. 젊은 애가 넘나 비실비실한 것…….」
청천벽력 같은 답이었다.
가시가 잔뜩 돋아난 선인장을 계속 안고 있어야 한다니, 그야말로 고문도 이런 고문이 따로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바이칼은 속으로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래. 남자는 한 방이지. 계속 얇고 길게 고통받느니, 한 방에 굵고 짧게 가자!’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박력 있게 선인장을 콱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선인장이 가시를 팍 줄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영영 눈을 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한 방에 다량의 피가 가시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피를 머금은 선인장의 팔 끝에서 푹 익힌 고구마 속살같이 샛노란 꽃이 사라락 피어올랐다.
「와, 패기 보소? 진심 반하겠당. 야! 너 나랑 살자!」
필요 이상의 피를 흡수한 선인장은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작 쇼크사할 뻔했던 바이칼은 치유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상처를 치유했다.
수하의 돌발행동에 할 말을 잊고 이마를 짚은 에단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질타했다.
“……대체, 무모함도 정도가 있지. 그리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나.”
“어으윽.”
바이칼은 가까스로 충격적인 고통으로 놓아버렸던 정신을 되찾았다.
치유술로 상처는 즉시 회복되었지만 옷이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찢어진데다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걸레짝마냥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완전히 넝마가 된 꼴로 모래밭에 대자로 널브러진 그는 킬킬 웃으며 답했다.
“단장보다 십 년은 더 살고 갈 생각이니 걱정 붙들어 매쇼.”
“그 꼴로 입만 살았군.”
“추하면 어떻습니까? 결과가 중요하죠. 제 한 몸 희생해서 저렇게 꽃을 피워냈지 말입니다?”
바이칼은 자신 있게 선인장을 턱짓했다.
노랗게 활짝 피어난 꽃은 주먹 하나 크기였다.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한 꽃 한 송이가 앙증맞게 선인장 팔에 달려 있었다.
작은 황색 꽃과 칭찬을 바라는 의기양양한 태도를 번갈아 본 쥬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플루비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아주 잘 담겨 있는 꽃이로구나.”
“아니, 그렇다고 저걸 제 마음이라고 칭하시면 뭔가 좀.”
꽃이라곤 달랑 한 송이 핀 데다, 크기도 작고 영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큰맘 먹고 선인장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대가치곤 뭔가 좀 시원찮았다.
「옛다! 가루로 빻아서 맥이든 목욕물로 달여서 흡수시키든 편할 대로 해. 효과가 어떨진 모르겠고. 알아서 하셔들.」
“협조해 줘서 고맙다.”
「알면 됐음.」
선인장의 꽃을 구했으나 플루비는 여전히 수면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거의 기절 수준으로 깨워도 미동 없는 플루비에게 직접 먹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꽃물을 달여 플루비를 그 안에 집어넣고 몸으로 흡수할 수 있게끔 돕는 방법을 택했다.
장소를 옮길 것도 없이 곧장 사막 한복판에 널찍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정령들의 힘으로 땅이 파이고 그 안에 곧장 뜨겁게 부글부글 끓는 온수가 들어차 찰랑거렸다.
그야말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온천이었다.
본래 온기를 좋아하여 호수를 거의 용암에 가까운 열기로 끓여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던 플루비였으니 이 정도는 단순히 시원한 목욕물에 불과했다.
쥬다스는 정령들이 만든 임시 욕탕 안에 선인장으로부터 얻어낸 꽃을 넣고 찻물 우리듯 달였다.
그리고 충분히 꽃이 달여졌다 싶을 무렵엔 플루비도 조심스레 그 안에 입수시켰다.
아픈 동안엔 아무리 물을 부어줘도 흡수시키지 못하고 도로 토해내던 녀석이었으니 다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 상태를 살폈다.
팔팔 끓는 물웅덩이 안으로 뽀그르르 가라앉은 플루비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몸이 커지는 일도 없었다.
그저 정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를 보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선인장을 끌어안기까지 했던 바이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이 걱정되느냐.”
“예? 예에.”
멍하니 웅덩이 가에 앉아 물에 잠긴 플루비를 바라보던 그의 곁에 쥬다스가 함께 와 앉았다.
처음엔 어정쩡하게 답했던 바이칼은 곧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저 녀석, 저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더 신경이 쓰입니다.”
「올. 아닌 척하더니 내 말 믿어주는 거임?」
선인장이 몸을 비비 꼬며 기뻐했지만 바이칼은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못들은 척 말을 이었다.
“죽지 않겠죠? 쥬다스 님. 다시 건강해져서 시끄럽게 빽빽 울겠죠?”
쥬다스는 확신을 바라는 상대에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잔잔하게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이대로 죽으면 불쌍해서 어떡합니까. 동족에게 버림받고 제대로 날지도 못한 놈인데. 뱀대가리 자식, 그러게 왜 괜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인간 따위나 감싸다가…… 에이 씨.”
선인장 가시에 몸에 구멍이 났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사실을 창피해할 겨를도 없이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예?”
“플루비 말이다. 가시에 찔릴 걸 알면서도 그 아일 살리고자 선인장을 껴안은 너와 같은 심정이었지 않을까.”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바이칼은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위험에 처한 걸 알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날개를 폈다.”
“날았…… 습니까?”
“그래. 꼭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게 있다는 듯이.”
“…….”
“그리 날더구나.”
말을 마친 쥬다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살짝 손을 내젓자 뜨겁게 끓어오르던 물이 순식간에 식어 잠잠해졌다.
“그러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란다. 용기의 다른 표현일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다.
그 말을 되뇌는 사이 이변을 눈치챈 일행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벌떡, 바이칼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덩이 밑바닥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촤아악!
사방으로 미적지근하게 식은 물이 튀었다.
본래 몸 크기는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블루 와이번이 주홍빛 눈을 빛내며 생기 있는 목소리로 울었다.
“삐이이!”
“하.”
바이칼은 웃는 것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숨을 뱉으며 웃었다.
작은 송아지만 한 체구로 그에게 달려간 플루비가 와락 품에 안겨들었다.
“잘 잤냐?”
“삐이! 삐이이!”
“하여간 누가 뱀대가리 아니랄까 봐. 이젠 하다하다 겨울잠까지 자냐.”
「워어, 꽃도박에 성공하신 걸 축하합니다.」
그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멀뚱멀뚱 지켜보던 선인장이 별 감흥 없는 어조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SYSTEM : "플루비(lv.7)"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실패 시 강화재료는 사라지고 펫 등급은 한 단계 강등됩니다.
...는 무슨 드립인지 모르겠네요. 게임하고 싶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네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