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1화 (13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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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신기루

이후 플루비는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물기를 투다다 털어낸 어린 와이번은 언제 기운 없이 비실거렸냐는 듯 삑삑거리며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말로는 투덜거린 바이칼도 놈을 향한 시선엔 흐뭇한 기색이 가득했다.

확연히 건강해진 모습을 확인한 나머지 일행들도 긴장을 풀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주고받았다.

“사실 보면서 잘못될까 조마조마했었는데. 이제야 좀 안심이네요.”

세이지가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걱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구나.”

“네, 제가 돌봐준 적은 별로 없지만요. 그러니까 어, 그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나 봐요.”

플루비를 주로 돌본 건 바이칼이었지만 그간 함께 다니면서 모두에게 예쁨을 받았다.

사람에게 거부감이 없는 와이번은 여기저기 잘도 애교를 부려 댔다. 넉살좋게 먹을 것도 얻어먹고 이 품 저 품 옮겨 다니며 안겨 있기까지 했다.

플루비는 일행에 합류한 이래로 빠르게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이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없어서는 안 될 기사단의 마스코트가 되어버렸으니 다들 알게 모르게 녀석의 부상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와이번은 예전처럼 이리저리 우다다 뛰어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 이제 가도 됨?」

순간 모두의 시선이 선인장에게로 향했다.

마치 소임을 다했으니 떠나겠다는 홀가분한 말투였다.

“어디로 가게?”

「아, 몰랑. 혼자 있고 싶음. 다 비켜주세요.」

“그러고 보니 넌 천년목이었지. 일반 선인장과는 좀 삶의 방식이 다르겠네. 무슨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거야?”

「식물이 목적 가지고 사는 거 봤음? 그냥 사는 거임.」

선인장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에 질문한 바이칼만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뭐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웠다.”

「오냐.」

그럼 이만, 하고 모래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한 선인장을 향해 누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큐미나타!”

「……?」

아벨이었다.

멀뚱히 멈춰 선 선인장에게 가까이 다가선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곳이 정해진 게 아니라면.”

짧은 심호흡을 사이에 두고 정중한 요청이 이어졌다.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함께’……?」

선인장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양 머뭇거렸다.

실제 그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부터 처음 들어본 제안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드넓은 오지랖, 비록 식물이지만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물이기도 하였으므로 외로움도 잘 탔다.

또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잡아가거나 악용하려는 무리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사람을 겁냈다.

친사회적 성격과 공포심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특성이 마음속에 공존한 채 오랜 세월 살아가게 되자 선인장은 쉽게 지쳤다.

이젠 마른 모래언덕에서 멍하니 햇볕을 즐기는 시간이 차라리 편할 지경이었다.

“알투르케에는 새 주민이 필요합니다.”

「알투르케? 아항. 새로 지은 투르케의 지도자가 너구나.」

“도박이라 칭하셨지만 당신의 꽃은 낫기 힘든 병도 치유할 수 있는 기능을 하니 사막주민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선인장은 희망이란 낯선 단어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한 번도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 조합이었다.

거기에 아벨은 쐐기를 박았다.

“투르케의 수호목이 되어주십시오.”

「허억. 낯간지러워서 심장이 멈출 것 같당.」

“……식물 주제에 심장도 있냐?”

바이칼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선인장은 사춘기 소녀마냥 새침하게 답했다.

「수호목까진 오바임. 나란 나무, 연약한 나무.」

“우리도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사막부족의 마지막 후손과 하는 약속이면 좀 끌리긴 하네. 함정은 아니겠지? 이거 믿어도 되는 각?」

선인장이 미심쩍다는 태도를 보이자 아벨의 정령 투르키가 대신 씩씩하게 답했다.

“아벨 약속 잘 지킨다! 바보라서 함정 같은 거 못 판다.”

“……투르키, 그건 자랑이 아니야.”

실제로 함정을 파서 누군가를 계략에 빠뜨릴 심성은 못 되는 아벨이었지만 자기 정령으로부터 바보 소리를 듣게 된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근데 ‘아큐미나타’는 내 이름 아님.」

“예?”

「원래 이름은 그거보다 훨씬 김. 인간들이 기억 못할 만큼.」

선인장은 식물마다 타고나는 이름이 있다며 쫑알댔다.

식물의 이름이란 누가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그 생명을 품은 씨앗에서부터 이미 자신만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손가락에 각기 다른 지문을 달고 태어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리고 그 타고난 이름은 한 호흡에 미처 다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선인장은 자신의 이름을 책으로 쓰면 두꺼운 사전 한 권을 꽉 채우고도 남을 거라며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너희들에겐 짧은 이름이 편하지? 그럼 그냥 아큐미나타라고 치지 뭐.」

“그렇다는 건.”

「너 진짜 바보 맞구나?」

신중하게 선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벨은 쿨럭 헛기침을 뱉었다.

「호칭을 정한다는 건 스카우트 제의를 승낙한단 뜻임. 알간?」

“아.”

「캬, 나 정말 겁나게 친절한 듯! 그래서 네 이름은?」

그는 선인장의 페이스에 말려 입만 뻐끔거리고만 있다가 그제야 환히 웃으며 답했다.

“아벨 투르케입니다.”

* * *

단순히 꽃을 얻으러 출발했던 수색조는 아큐미나타와 함께 알투르케로 귀환했다.

움직이며 말하는 선인장을 본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왕 선인장이다!”

“가시 안 따가워요? 만져 봐도 돼요?”

“입이 없는데 어떻게 말해요? 우우, 샌드웜처럼 똥꼬로 말하나?”

「똥꼬 없거든? 식물이거든? 난 똥도 안 싸거든?」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우 귀에 꼬리까지 달고 있는 수인족 아이들의 눈에도 아큐미나타는 충분히 독특하고 신기한 존재였다.

와 하고 몰려든 아이들의 관심을 어색해하면서도 선인장은 그 관심에 일일이 상대하느라 바빴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되게 의심하더니.”

선인장은 여기저기 매달리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가시를 일부러 뭉툭하게 바꾸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영물로서 살아온 천년목이었지만 지금처럼 한 번에 많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친 사람을 도울 때에도 슬쩍 와서 그들이 흘린 피를 흡수하여 꽃만 피워다 주고 신기루처럼 홀랑 떠나곤 했던 아큐미나타였다.

사람들 틈에 아무 걱정 없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인장은 무척 기뻐했다.

「의심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님? 너그들도 나만큼 오래 도망 다녀보던가. 딱 이렇게 백 년만 살아봐. 의심병 오짐.」

“근데 용케 믿고 따라왔네? 말마따나 천 년도 넘게 인간을 피해 도망 다녔으면 별로 믿음도 안 갔을 거 아냐.”

「솔직히 너넨 다 안 믿었음. 자연에게 사랑받는 인간을 믿은 거.」

아큐미나타는 쥬다스의 곁을 가호하고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진작 알아보고 있었다.

처음 그들이 찾아왔을 때 금방 경계를 푼 것은 그 탓이었다.

나무가 거센 폭풍우 앞에서 저항하려하지 않듯 아큐미나타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뜻에 순응했다.

「자연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많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아큐미나타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정령왕의 계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플루비가 건강을 다 회복할 때까지 며칠 더 알투르케에서 머물며 조화롭게 뒤섞여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을 지켜본 쥬다스는 떠날 무렵 아벨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게 진정 감탄했다. 여기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

“예, 예? 아뇨, 그런. 어찌 제게.”

그동안 늠름한 사막부족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벨은 쥬다스 앞에 서자마자 다시 예전의 소심한 아이로 돌아가 허둥거렸다.

“나중에 또 들리마.”

마치 친구 집에 놀러왔다 떠나는 듯 잔잔한 인사였다.

그 말에 멈칫한 아벨은 이내 경직된 자세를 풀고 편안하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 편히 찾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있는 건 아벨 자신이었다.

잿빛 눈동자 위로 물감처럼 번져온 따스함이 일렁였다.

“……쥬다스 님.”

친우로서의 인사였다.

검을 바친 군신관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세이지는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사람 사이란 한 가지 관계로만 정립되는 게 아니구나.’

부모와 자녀, 주인과 신하, 그리고 친구관계는 전부 그 선이 나뉘어져있다고만 생각해 온 세이지에게는 상당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형님인 쥬다스와 마냥 형제간의 대화만 나누는 건 아니었다.

때에 따라 부모처럼 따르기도 했고 선생님이나 상관을 대하듯 깍듯할 때가 있었다.

세이지가 두 사람을 보며 인간관계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생각하게 된 사이, 아벨은 투르키에게 부탁하여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여럿 들고 오게 했다.

“참, 여러분께 드리고자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상자들을 품에 한 가득 안아 들고 온 투르키가 사람마다 하나씩 건네주었다.

제 몫으로 주는 상자를 받아 든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이를 열었다.

“짜식. 뭘 이런 걸 다 주고 그러냐.”

내심 기대하고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바이칼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거 설마 샌드웜에서 나온.”

“화이트루비를 가공하여 만든 장신구들입니다. 순도 높은 보석인지라 마법 인챈트를 부여하면 효과가 아주 좋을 겁니다.”

목걸이나 반지, 팔찌 등으로 우아하게 가공된 화이트루비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색과 형태는 무척 오묘하고 아름다웠으나 채득 과정을 알고 있는 일행의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졌다.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쥬다스가 자신 몫의 상자에 곱게 포장되어있던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하얀 깃털을 부드러운 결까지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핀 브로치였다.

‘백로인가.’

루바흐를 다닐 당시 붙여진 별칭을 떠올린 쥬다스는 브로치를 손에 말아 쥔 채 작게 웃었다.

처음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던 ‘백로황자’란 별칭은 그가 졸업할 무렵에는 뜻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새.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오른 백로처럼 그는 순식간에 비상했다.

이젠 그 누구도 백로황자를 조롱의 의미로 여기지 않았다. 감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봐 온 아벨이었으니 하얀 깃털이 상징하는 바는 고귀한 백로에 대한 경애였다.

쥬다스는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쓰고 다니던 모자 대신 브로치에다 새로 변장 인챈트를 걸도록 명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옷에 달았다.

상관이 모범을 보이자 나머지 일행도 그를 따라 선물 받은 장신구를 착용했다.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겠구나. 고맙다, 아벨.”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 어떤 보석보다 깔끔하고 영롱하게 빛났다.

에단이 받은 것은 검집에 달아둘 수 있는 장식이었고 크리스티나의 경우 팔찌였다.

알이 굵은 반지를 받은 바이칼은 차마 손에 끼진 못하고 고민하다 플루비의 목걸이에 달아주었다.

진심 어린 감사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알투르케를 떠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5장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 '16장. 불가항력'챕터가 이어집니다.ㅎ

아쉽게도(?) 선인장씨와는 이렇게 투르케사막에서 헤어졌습니다. (에스티오 곁에서 다시 만나요...쿨럭)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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