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2화 (13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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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쥬다스 일행이 알투르케를 벗어난 지 며칠 후, 드디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드넓은 사막이 그 마지막을 드러냈다.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모래언덕이 사라지고 드문드문 비쭉 솟은 나무가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사막을 벗어났다는 신호처럼 가랑비도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풀잎 사이로 사막에선 보기 어려웠던 들꽃들이 봉우리를 터뜨렸다.

갓 피어난 꽃잎은 선인장에서 피는 억센 것과 달리 아기 피부처럼 얇고 부드러웠다.

낮은 키의 풀밭 위를 달린 그들은 오래지 않아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 진입했다.

두 갈래 길이 나오자 꼼꼼히 지도를 살펴두었던 에단이 즉각 설명에 나섰다.

“계속 직진하면 디올레 숲에 진입합니다. 숲 길이는 반나절 안에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짧다고 하며 곧장 국경지대와 이어집니다. 이 우측으로 난 샛길을 타고 가면 남부지방과 이어지는 산을 오르게 됩니다.”

「응, 꼬마가 설명 잘해주네.」

늘 새로운 지역에 대한 브리핑을 맡아왔던 유니는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치 베테랑 가이드가 착실히 맡은 역할을 잘해내는 신입사원을 바라보듯 만족스러운 시선이었다.

선택지를 받은 쥬다스는 국경을 지나 해동국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직진을 택했다.

디올레 숲에 진입하면서 점차 커다란 나무가 주변에 가득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사막을 지나왔다곤 생각하기 힘든 울창한 숲이었다.

「근데 한 가지 더 있어. 숲 속에 쪼끄만 마을이 하나 있대.」

에단의 설명에는 포함되지 않은 정보였다.

유니는 녹색바람을 가지고 실타래 엮듯 손장난 치며 말을 이었다.

「아마 지도엔 없을걸. 국가에 신고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모양이야. 뭔가 죄를 짓고 도망간 사람들이 아닐까?」

“흐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잠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쥬다스 님?”

“근처에 부락이 하나 있다는구나. 위치가 위치이니 한 번 들려 볼까 한다.”

“이런 숲 속에요?”

세이지가 의문스런 눈으로 물었다.

확실히 마을이 자리 잡기엔 조건이 너무 열악했다.

근처에 교류할 만한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게 관리되는 숲도 아니었다.

길이라곤 숲을 통과하기 위해 내어놓은 호젓한 오솔길이 전부였다.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걸 보니 그림자 마을인 모양이군요.”

유니가 알려준 것처럼 나라에 신고하지 않고 몰래 부락을 이루는 곳을 은어로 ‘그림자 마을’이라 칭했다.

세상에 떳떳하게 드러나 있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숨어사는 이들을 뜻하는 표현이었는데 실제 수배 중인 범죄자나 빚을 갚지 못해 도주하는 등 사연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주로 이러한 형태를 이루었다.

그들은 바람의 안내를 따라 직진으로 뻗은 길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정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고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숲은 자연 그대로였다.

따로 길을 내거나 나무를 베는 등 훼손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리송한 기분으로 정령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일행의 시야에 나뭇가지 틈으로 허름한 굴뚝이 하나 보였다.

막 불을 지핀 듯 뽀얀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쪽인가 봅니다.”

안내를 마친 바람이 스르륵 흩어졌다.

잔가지를 헤치며 가까이 다가가자 제법 커다란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그 집을 중심으로 다른 자그마한 오두막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다른 집에선 불을 때지 않아 냉기만 가득했다.

유독 크기가 크고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통나무집에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잠시 마을 전체를 둘러본 일행은 그 제일 큰 오두막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활기차게 도란거리던 대화 소리가 뚝 멈추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집 분위기에 일행 사이에도 덩달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에단은 재차 노크하며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다.

“계십니까?”

몇 초가량 더 침묵이 감돌았다.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통나무집을 앞에 두고 일행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조금 더 기다려 보자꾸나.”

쥬다스는 느긋하게 답했다. 그들이 순순히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통나무집 문이 끼익 열렸다.

“뉘슈?”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된 노인은 언뜻 보기에도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지팡이를 짚은 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잔기침을 쿨럭이는 노인을 향해 쥬다스가 대표로 말을 건넸다.

“저흰 국경지대로 향하는 여행객들입니다.”

“여행객?”

“그간 사막을 건너오느라 일행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더구나 챙겨 온 물과 음식이 전부 떨어져 숲을 헤매던 참이었습니다. 실례지만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는지요?”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일행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사막을 건너오느라 고생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모두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이 발갛게 타기까지 하여 피로한 행색이었다.

노인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을 엿본 쥬다스가 그 고민을 잠재울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례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쿨럭, 쿨럭. 여긴 객들이 묵을 만한 곳은 따로 없수.”

기침과 함께 문을 열어 제친 노인이 먼저 돌아서며 안을 턱짓했다.

“그나마 이곳이 제일 큰 집이라오. 좁으시겠지만 방이 없으니 참으시구랴.”

작은 마을에는 마구간이 따로 없었기에 그들은 근처 굵다란 나무기둥에 말들을 매어두고 노인을 따라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노인의 말대로 집 안에는 따로 방이 없었다.

화로를 중심으로 널찍한 거실이 이어졌다.

그곳엔 십여 명의 주민이 둥글게 모여앉아 말린 야채나 견과류 따위를 늘어놓고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뭐시여. 영감 아는 애들이우?”

“웬 젊은이들인감?”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선 오히려 마을을 방문한 젊은 사람들이 더욱 신기했다.

조금 전 침묵은 내숭이라도 되는 듯 주민들은 다시 껄껄거리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쿨럭, 나도 몰러. 물어보니깐 여행자라대? 어린 친구들이 피곤하다잖어 글쎄.”

대표로 나왔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암, 그렇담 응당 집에 들여 줘야지. 잘했네, 잘했어.”

“뉘집 애들인지 훤칠하게도 생겼다.”

“아니, 곱다 해야 하질 않누? 요즘 애들은 다 예쁘게 자라서 사내앤지 기집인지 구분이 안 간단 말이여.”

“아, 거기 서있지 말고 일로 좀 가까이 와보아.”

“여기 앉으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입담에 어색하게 서있던 일행은 천천히 노인들 근처로 다가가 앉았다.

자리에 앉으며 바이칼이 찜찜한 표정으로 에단을 향해 속닥거렸다.

“여기 그냥 노장마을인 것 같은데요.”

“…….”

“나이 든 사람들끼리 모여 여가를 즐기는 모임 같은 거 아닐까요? 딱히 수상해 보이는 건 없는, 윽!”

거기까지 말하던 바이칼은 머리를 꽁 내려치는 타격감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떼끼! 어른들 앞에서 누가 그리 버릇없이 속닥거리누?”

지팡이를 쥔 노인으로부터 호통을 듣게 된 그들은 더 딴짓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혹시 이 마을엔 어르신들뿐입니까?”

“으응? 아녀아녀. 볕 좋다고 버섯 따러간 할망구들도 있지. 커허허.”

“그 소리가 아니잖여! 젊은 애들 없냐고 묻는 말이지.”

“잉? 그런 건가?”

노인들은 대체로 수다스러웠다.

“그려. 이 마을엔 늙은이들뿐이지.”

“젊은 것들은 진즉에 다 죽었지. 이젠 애들 얼굴이 기억도 안나.”

“에에이! 썩을 나라 같으니. 애들 살아갈 세상이 아니었던 게지. 죽은 애들만 불쌍하이.”

한 노인이 말라비틀어진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한탄했다.

젊은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이지가 그를 향해 물었다.

“다 죽었다니? 관리의 잘못이……있었습니까?”

아직 평민을 대하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은 세이지의 어설픈 말투에도 노인들은 아기 재롱 보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잘못 정도인감? 사람 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것들을 두고 귀족이라 봉하니. 평민 목숨은 파리 목숨도 아니라 이거지.”

“그니까 나라가 이 꼴인 거여.”

“썩을 대로 썩었지.”

주민들은 전부 권력층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귀족 출신인 일행 입장에선 껄끄러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버릇없다며 한 대 얻어맞은 바이칼은 물론이고 에단과 크리스티나, 친위기사단 전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노인들 틈에서 제일 자연스럽게 적응한 두 사람이 있었다.

“허허,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허나 또 나이가 들면 세상일에 신경 쓰고 살기 피곤하지요.”

“그래서 우리도 세상일 안 보고 안 들으려 여기 모여 있는 거요. 근디 그쪽은 아직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우?”

“동안이란 소리 많이 듣소이다. 벌써 일흔도 넘었다 하면 안 놀라는 사람이 없지.”

“일흔? 으허헛, 정말로 동안이구만!”

잔잔한 웃음이 한차례 터져 나왔다.

본래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십 년도 더 젊어 보이는 콜이 첫 번째로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원망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네. 내 장장 삼십 년을 원망했으이. 원망하고 또 원망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얼마 남지 않은 생에서 그네들을 원망해서 무에 좋겠느냐고.”

“용서는 못해도 물 흐르듯 흘려보낼 수는 있더군요. 처음엔 몰랐지요. 용서하는 것과 흐려지는 건 다른 문제인 것을.”

“어떻게 그놈들을 용서할 수 있겠어. 다만 가슴에 묻을 뿐이지. 그래, 자네 말이 맞으이. 흐려질 뿐이야.”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아직 십 대에 불과한 그는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더니 심지어 노인들을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이칼이 차마 겉으로 표현하진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어른스러우신 줄은 알았는데, 그 점이 노인들한테도 먹힐 줄이야.’

의외의 활약을 통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단순했다.

그들은 본래 삼십 년 전쯤, 근처 영지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치 레이븐 영지에서 비리를 일삼던 영주처럼, 그들을 지배하던 자 또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오히려 목숨을 빼앗는 일에는 누명을 씌우는 등 치밀하게 굴었던 레이븐 백작과는 다르게 이번 영주는 거리낄 것 없이 반항하는 자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로 인해 부모자식이 사별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죄를 짓거나 누군가에게 쫓겨 숲 속으로 도망 온 게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억울하게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으로부터 달아난 이들이라 했다.

“이런 일이 이토록 흔하다니.”

잠시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는 핑계로 쥬다스, 에단과 함께 통나무집에서 나온 세이지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눈먼 힘에는 희생자가 따르게 마련이야.”

“도저히 저들을 볼 낯이 서질 않아요.”

“세이지.”

힘 있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세이지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분명 희생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다.”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말씀이세요?”

이젠 제법 눈치 빠르게 의도를 읽어오는 동생을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늙은 동생(?)들과 어울려주는 이그레트 할아부지(전생+현생 도합 109세)....ㄷㄷ

크으으으 내일만 버티면 주말이네요. 다들 하루만 더 힘냅시다.ㅠㅠ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격려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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