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3화 (13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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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아직까진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한평생 죽도록 원망했던 자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원망에서 미련으로, 미련에서 후회로. 아마 눈 감는 그날까지 놓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느냐.”

“하지만 아까는 분명.”

“한두 명도 아니고 여기 모인 주민들 전체가 자기 자식을 죽인 악독한 원수를 그저 가슴에 묻고 평화로이 지낼 수 있다는 게 이상하더구나.”

“보통은 그렇게 하지 못하나요?”

“글쎄다. 아마도 원망할 대상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

그 말에 세이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삼십 년이나 지난 이야기인데. 자연사했을 수도 있겠네요.”

“하나 그랬다면 굳이 그 점을 숨길 필요까진 없었을 겁니다.”

에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세이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죽였다……?”

멀리 허름한 우물이 보였다.

쥬다스는 우물을 향해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 말을 받았다.

“숲 속에 생긴 그림자 마을, 그에 더해 마을 주민 전원이 노인으로 구성된 것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는 아닐 거란 이야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더냐.”

그는 우물 덮개를 열었다. 물에 비친 노을이 피처럼 붉었다.

“가려진 진실은 거짓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쥬다스는 물을 동이에 퍼 담는 대신 루니를 실체화시켰다.

푸르륵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타난 푸른 늑대는 살갑게 그의 손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우아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애교 어린 몸짓에 세이지가 신기한 시선을 주었다.

“루니.”

「말해라. 무엇을 하길 바라지?」

쥬다스가 정령들에게 특정 소망을 요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 바람의 정령인 유니는 유용한 정보를 알아오는 역할이라도 맡았지만 나머지 정령들에게는 딱히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계약자는 남과 함부로 싸우는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상을 뒤엎어 지배하고자 할 정도로 야망이 높은 인물도 아니었다.

전생의 ‘이그레트’ 시절, 방방곡곡 떠돌아다니면서 그가 정령들에게 부탁한 일이라곤 주로 소소한 것들뿐이었다.

허허벌판에서 물을 끓여 달라거나 맨 땅에서 신선한 허브 잎사귀를 자라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정령들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자 하였지만 정작 본인이 힘을 사용할 생각이 그다지 없으니 특별히 나설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루니를 비롯한 자연계 정령왕들은 지금처럼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합이 들어갔다.

루니는 평소의 근엄함조차 집어던지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자신의 계약자를 올려다보았다.

심지어 늘 고고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풍성한 꼬리마저 살랑거리고 있었다.

늑대라기보단 애완견을 연상시키는 태도에 쥬다스는 살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밤 이 마을에 비를 내려주련.”

「밤 내내 이 마을에만 비를?」

“그래, 천둥번개가 칠 정도로 강한 비라면 좋겠어.”

「……네 뜻대로. 이그레트.」

푸른 늑대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수락했다. 그 대신 지켜보던 세이지가 물었다.

“형님, 비는 갑자기 왜요?”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기 때문에.”

“예?”

“때론 계기만 준다면 작은 변화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지.”

그가 손수 가져온 동이에 물을 채워 넣자 에단이 이를 서둘러 받아 들었다.

그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인 쥬다스는 붉은 노을을 흘끗 올려다보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거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통나무집으로 돌아갔다.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다 함께 스프를 끓여 먹고 식수를 마련하였다. 수십 년 동안 단체 생활에 익숙해진 노인들은 굳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볼 자식도 손자도 없는 마을에선 집이란 딱히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늘 큰 집에 모여 공동식사를 하였고 피곤하면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잠들었다. 이 통나무집은 마치 노인들을 위한 일종의 요양시설과도 같았다.

저녁이 되자 낮 동안 가볍게 가랑비만 뿌리고 지나갔던 비구름이 도로 몰려들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댔다.

“아이구, 허리야. 비가 오려는감?”

한 노인이 허리를 두들기며 창가로 다가갔다.

조악하게 깎아 만든 나무창 너머로는 벌써 한두 방울씩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혀를 끌끌 찬 노인이 창문을 닫았다.

곧이어 우지끈 나무기둥 부러지는 소리처럼 천둥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빗소리가 거세지자 담소를 나누며 평화롭던 노인들의 분위기가 싸악 굳어졌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잔기침만 쿨럭이던 중 한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구만.”

“무엇이 그리 이상하십니까?”

쥬다스가 슬쩍 물었다.

“여긴 원래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비가 와두 해 뜰 때 내린 부슬비 정도지. 이 정도로 쏟아붓는 비는 본 적이 없으이.”

“옛날 생각나는구만.”

“그러게 말이여.”

노인들은 짤막하게 맞장구치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옛날 사시던 동네에선 이런 비가 자주 왔나 봅니다.”

“에잉, 거기서도 자주까진 아니었지.”

“그려. 영감은 그 시절에도 천둥만 쳤다 하면 하늘이 노했다고 벌벌 떨었잖여.”

“떨긴 누가 떨었다그려? 그러는 영감탱이야말로 그날 오줌보가 터져서는 아주 꼴이 우스웠지그래.”

옥신각신하며 서로를 흉보던 노인들은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막말로 하늘이 노한 게 맞지. 안 그려? 그놈들 죄다 천벌 받았잖여.”

“이 양반이 노망이 났나. 그게 왜 천벌이여 천벌이길? 그 시부럴 놈 때문에 같이 죽은 애들은 무슨 죄여!”

“어차피 그냥 뒀으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었어. 사실 걔들도 그놈 밑에서 일했으니 벌을 받은 거잖수.”

“아니, 그래도 이 영감탱이가?”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닫아놓은 창틈으로 번쩍 새어 들어온 번갯빛이 노인들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소란이 일어났다.

“나 원 우스워서. 그놈 목을 베어달라고 손이 발이 되게 빌 때는 언제고? 그렇게 그놈들 벌 받는 게 싫었으면 복수를 바라지도 말았어야지.”

“그래서 지만 깨끗하다는 거여?”

“지? 지금 지라고 했냐, 이 자식아. 내가 네놈보다 못해도 십 년은 더 살았다!”

“같이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 십 년 더 산 게 대수여!”

감정이 격해지자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멍하니 보고 있던 세이지는 오싹 소름이 돋아 뒤로 물러섰다.

‘정말 저들이 복수를 위해 영주를 죽인 건가? ……평민이 귀족의 목을 벴다고?’

선량하게만 보였던 노인들의 얼굴이 더 이상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지는 흔들리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소란이 일어난 와중에도 느긋하게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맑은 금안을 보자 세이지도 차츰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사이 언쟁을 벌이던 노인들은 씩씩거리며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그만들 혀. 다 지난 일 아니우?”

“아, 근데 저 영감탱이가 천벌이라고 자꾸 우기잖어.”

“천벌이지! 천벌이 아니고서야 그날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시우?”

“그 ‘천벌’은 누가 내렸습니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몰렸다. 쥬다스는 벽에 기대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노인을 마주보았다.

“하늘입니까? 아니면.”

“…….”

“하늘이라 믿고 싶은 무법자인가.”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집 안에는 요란한 빗소리만 가득했다.

심지어 엉성하게 지어놓은 천장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노인들은 움찔 한 발짝씩 물러섰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을 상대로 기가 눌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 그들 사이에 헛기침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중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나선 노인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크흠. 살 만큼 살고 나면 말이여. 젊은 애들 딴엔 숨긴다고 숨기는 게 어찌 이리 선명하게 보이는지.”

“…….”

“자네들, 귀족 도련님들이지?”

쥬다스는 이를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앞에 나서서 말을 꺼낸 노인은 클클 웃기까지 했다.

“보믄 알겄지만 우린 귀족이 싫어. 귀족이란 것들에게 부인과 딸자식을 빼앗기고 젊음과 아들은 한평생 노역에 바쳐졌지.”

옛 생각에 다시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들어보시오, 귀족 나리들. 칼과 채찍으로 다스려지는 우리가 개돼지와 다를 게 뭐요. 나라가 정한 법은 대체 누굴 위한 법이란 말이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 두려울 게 없어진 노인들은 귀족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욕하거나 날붙이를 겨누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늘인지 무법자인지 난 모르겠고. 그 끔찍한 현실 속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었지. 바로 그분이 하늘도 법도 외면한 파리 목숨들을 구원해줬단 말이요.”

“누군가 대신 복수해 줬단 말입니까?”

세이지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나그네였지. 딱 자네들처럼 귀하게 생긴 상에 지옥에서 올라온 해골들을 부리던, 그야말로 죽음을 초월한 사내였어. 악신도 신이라면 그분은 진정 신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우리가 그에게 복수해 달라고 빌기야 했소. 믿기 어렵겠지만 뼈로 만들어진 용이 나타나 폭풍을 불러왔지. 아직도 기억한다오. 오늘처럼 굉장한 폭우가 쏟아졌거든.”

노인들은 맞장구치며 구원자를 찬양했다.

단번에 그들이 말하는 영웅이 누구인지 눈치챈 쥬다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수라…….”

“나리들께서 이 늙은이들을 벌하신다 해도 미련은 없소. 우린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이니!”

“정당하다 여겼으면 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도 살던 곳에서 떠나온 것입니까.”

“그건, 커흠. 문제가 조금 있었지비.”

노인들은 시선을 피했다.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이 이어졌다.

“그놈, 영주의 병사는……. 강제로 징병된 젊은이들이었지. 거 왜, 복수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그들도 함께 희생되었으니 어찌들 낯이 있겠수. 복수를 빌었던 우리가 그 땅을 떠나는 수밖에.”

자기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다른 희생자를 낳았다.

사령술사에게 복수를 사주한 장본인들은 새로운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추방당하다시피 땅에서 쫓겨났다.

이를 두고 후회하는 노인도 있었고, 어쩔 수 없었다 말하는 노인도 있었다.

그 차이가 갑작스런 폭우를 시발점으로 조금 전 언쟁을 불러일으켰던 셈이다.

“하나 그대로 있었으면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을게요. 그놈은 천벌을……!”

“에단.”

무어라 더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노인을 내버려 둔 채 쥬다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이만 가자.”

“예.”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비를 챙겨 집밖으로 우르르 나가는 일행을 보며 노인들이 당황하여 눈을 끔뻑거리던 찰나였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부었다.

“우리는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곳엔 벌할 사람이 없구나.”

“……뭐?”

평민이 귀족을 죽여 달라 사주했다는 소릴 듣고도 그냥 지나가겠다는 말에 노인들은 의아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덧 2월의 마지막날이네요. ㅎㅎ

독자님들 모두 한주의 시작과 더불어 달의 마지막날인 오늘 하루, 평안히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 밤 12시경에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P.s. 참, 요즘 시간이 없어 연참이 어렵습니다 ㅠㅠㅠ 조만간 여유가 생기면 화끈하게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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