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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이보슈. 귀족나리들. 쿨럭쿨럭, 정말 이대로 떠나는 거여?”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문지방까지 따라 나와 물었다.
처음 마을에 방문한 낯선 객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순간부터 주민들은 사실 벌을 받게 되리라 각오했다.
“설마하니 우릴 이해한다는 건 아니겠고.”
“…….”
쥬다스는 폭우가 쏟아지는 문간에 서서 잔잔히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실린 서늘함을 느낀 노인이 자조적으로 쓰게 웃었다.
“그려. 귀한 분들 눈에 우리는 감히 귀족을 해한 범죄자일 뿐이잖우. 굳이 여길 찾아온 건 죄상을 밝혀 벌하려던 게 아니었소?”
살기 위해 사령술사 앞에 엎드렸고, 그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리고 잔혹하게 살해당한 가족들의 복수를 이루었다.
노인들은 이를 두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나라가 정한 법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었다.
“이곳에 분명 죄인은 있으나.”
콰르릉!
새하얀 번개가 천지를 감쌌다.
잠깐이지만 본래의 은발처럼 물든 머리카락이 달처럼 빛났다.
쥬다스는 그대로 돌아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루바르잔의 국민은 없으니. 우리에겐 이들을 벌할 이유가 없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었다. 문이 열려 있었기에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노인들도 묘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자신들이 늘 부정해 온 나라에서 역으로 그들을 부정하는 것.
모인 이들 전부 살 만큼 살았다고 여긴 나이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벌하지 않는다 하니 기뻐야 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평생을 따라다닌 갑갑함만이 목을 옥죄어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리만치 기분 나쁜 침묵만이 주민들 사이에 감돌았다.
한편, 마을을 떠나 말을 타고 빗길을 달리기 시작한 일행도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빗물에 푹 젖어 얼굴에 자꾸 달라붙는 붉은 머리카락을 털어낸 세이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님. 그래도 귀족을 해한 자들입니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하면 너는 어찌 하였으면 좋겠느냐?”
쥬다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동생에게 도로 의견을 물었다.
“아무리 악하게 굴었다 한들 황제폐하께서 임명하신 귀족을 벌할 수 있는 건 황실, 그리고 오직 국법에 의한 재판뿐입니다.”
“과연 그 말이 옳구나. 하여?”
“하여, 이와 같이 지엄한 국법을 어긴 죄인들이니 무릇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옳다. 네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구나.”
“그리 말씀하시면서 어찌 형님께선 그들을 벌하지 않으십니까?”
쥬다스는 잠시 눈을 들어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사들이 시야 마법을 발동하여 말을 달리는 데엔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주변이 밝았지만 폭우를 쏟아내 하늘만큼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위선자.’
기억 저편에서 한때 자신에게 복수를 요구했던 자들의 원망이 떠올랐다.
이루어지지 못한 간절함은 곧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그 힘을 가지고도 기생하는 악을 못 본 채 등 돌리는, 너 같은 위선자야말로 악마가 아닌가!’
그는 갈 곳 잃은 분노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노인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찢기고 덧나길 반복해 피고름이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라도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그들을 사면한 건 아니었다.
“불가항력이라, 그들이 하는 말도 역시 틀리지 않았단다.”
이도저도 틀리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오자 세이지는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황자라곤 하나 아직 열네 살에 불과한 세이지가 상반되는 두 의견의 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하는 얼굴을 힐끗 쳐다본 쥬다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지배층의 행실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약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모른 척 방관하는 것이 권력은 아닐 터.”
“그 말씀은……. 지배층에게 죄가 있기에 하층민들도 죄를 짓게 되었단 뜻인가요?”
“예컨대 만일 논밭을 관리하는 농부가 물길이 닿지 못해 말라가는 농작물을 발견하지 못해 시들어 죽게 만들었다면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질 않겠느냐. 방치도 결국 학대다. 그리 따지자면 제국의 모든 권력자에게는 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죄가 있는 것이야.”
“그럴 수가.”
“그것이 권력이란 힘의 무게다. 비뚤어진 계층구조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테지.”
마을에서 벗어나 다시 반듯하게 정돈된 오솔길로 진입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세이지는 괜히 빗물에 푹 젖은 후드를 털어 내리며 시무룩하게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하지만 쥬다스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지,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죗값을 받고 있단다.”
“네? 아무도 그들을 벌하지 않았잖습니까?”
“한평생을 자신의 죄에 쫓겨 죄인으로 숨어사는 이들이야. 네 보기엔 그들이 우리가 귀족임을 알고 두려워하더냐?”
“아뇨! 너무도 당당했습니다. 오히려 반기는 듯도 하였고요.”
“그랬지. 꼭 누군가 자신들을 벌해주기만을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바이칼도 씁쓸한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숲 속이 흡사 수풀로 꽁꽁 싸맨 감옥 같기도 해보였다. 우중충한 분위기를 느낀 플루비가 고개를 치켜들고 삐익삐익 울었다.
“지금 그들을 처벌한다면 도리어 죄책감을 덜어낼 빌미를 제공해 줄 뿐이지. 저들에겐 이미 삶 자체가 형벌일 게야. 저 숲에 스스로 발을 묶은 채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사후엔 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터.’
굳이 뒷내용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영특한 동생은 지금 이야기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하였고 또 충격 받은 상태였다.
쥬다스는 뼈로 만들어진 드래곤을 부렸다는 증언에서 노인들이 영웅이라 생각하는 자가 프리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최강, 최악의 제네럴급 사령술사 프리드 길리아노.
사령은 무조건적으로 계약자를 위해 움직이는 정령과는 다르다.
사령의 힘을 빌렸다면 그들의 영혼에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한 표식이 새겨졌을 것이다.
사령의 제물로 바쳐진 영혼은 죽어도 편히 눈감지 못한다.
사야 황후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쥬다스는 굳이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일행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그렇게 숲을 빠져나왔다.
오솔길이 끝나갈 무렵 어슴푸레 연한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던 새벽하늘은 점차 남색이 섞인 오묘한 다홍색으로 바뀌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기라도 하듯 숲을 벗어나자마자 구름 낀 지평선 사이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봄꽃이 달린 키 작은 나무가 늘어선 널찍한 평야가 펼쳐졌다.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광활한 풍경이었다.
“어후! 이제야 좀 살겠네요.”
“디올레 숲이 어지간히도 불편했나보군.”
“말이라고요. 불편해서 발바닥에 땀띠 날 뻔했습니다. 저럴 바엔 차라리 괴물이 튀어나오는 게 낫죠.”
“경솔한 언행은 삼가라. 전하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편이 좋다는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괜히 호들갑 떨다가 일침을 맞은 바이칼은 고삐를 한 손으로 쥔 채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지켜드릴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주군을 위험에 빠뜨릴 괴물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바이칼에게로 크리스티나가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본인 뒤통수나 잘 지키지 그래.”
“옙? 크리스티나 님, 그때 일은 제가 방심해서.”
“그 와이번 꼬마도.”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는 일행 중 유일하게 사고를 일으킨 한 세트였다.
투르케 사막에서 납치를 당했던 일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바이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밤새 숲을 빠져나와 날이 밝도록 이동하느라 일행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그러나 평야가 끝나면 곧장 국경도시 ‘베르디’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숙 없이 곧장 달렸다.
그 예상대로 점심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엔 평야를 벗어나 국경도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국경도시 베르디는 제국 동쪽 제일 끄트머리에 위치한 구역입니다. 이 뒤로는 국경선을 지키는 병사들 뿐, 사실상 제국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국민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국 영토라 보시면 됩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베르디는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보안이 철저했다.
황실 소속 공방에서 세밀하게 만들어둔 합법적 위장 신분으로 수월히 발을 들이긴 했으나 그마저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꼼꼼히 확인하느라 관문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다.
빈틈없이 쌓아올린 성벽과 마력포를 발사할 수 있는 포문, 그리고 높게 솟은 망루까지 도시라기보단 하나의 요새였다.
내부에 들어가서도 다른 도시들과는 상이한 광경이 이어졌다.
길목을 돌아다니는 대부분이 군복을 입은 병사였다.
어리면 열아홉에서부터 오십 대 중후한 나이까지, 심지어 여성 병사도 종종 보였다.
국경도시 베르디에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임하였으며 무기상점이나 마법정비소, 의료원 등이 눈에 띄게 많았다.
도시 내 모든 시설이 거주나 관광보다는 전투에 최적화된 상태였다.
심지어 음식도 주문하면 3분 안에 받아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이 주를 이루었다.
「꼭 전쟁을 앞둔 모습 같아요.」
「전쟁? 전쟁하는 거다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쥬다스의 머리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던 토니가 카니의 감상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전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게릴라들이 자주 습격하나 봐.」
「우앙? 루바르잔이 제일 강하다고 하지 않았다요?」
「바보야. 인간이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종족이라면 복잡한 세계사가 왜 있니? 독립운동은 왜 있어?」
「에에…….」
포로록 날아올라 손가락을 들이밀며 이어지는 타박에 토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크고 강한 나라라는 건 결국 남의 걸 빼앗아서 이루어진 거거든. 동물의 세계로 치면 약육강식. 다른 점은 인간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거?」
루바르잔은 영토 전쟁을 통해 땅을 취한 강대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드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모든 약소국이 그 발밑에 엎드린 건 아니었다.
「간절히 되찾고 싶은 거지. 안될 걸 알면서도.」
게릴라단체는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공격했다.
「이해가 안 간다요. 이런 도시를 공격해 봤자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요?」
「침략에 성공하면 물자 정도는 얻겠지. 자신들이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뭐 이런 의미도 전달할 수 있고.」
「의미 전달! 그걸 하면 뭐가 달라진다요?」
「낸들 아니?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봐.」
「힝.」
귀찮음에 손을 훠이훠이 내젓는 유니의 태도에 토니는 시무룩하게 질문 공세를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역시 이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게릴라인가.”
“베르디를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자국영토가 아니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에단의 걱정스런 말에 바이칼이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겠네요.”
“제국어를 공용어로 배급 중이긴 하나 아직 다 익히지 않은 자들도 많다 들었습니다.”
타국에선 언어의 장벽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좋은 가문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해외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코르토반, 자네도 국외로 나가본 적이 없어?”
문득 세이지가 제일 나이가 많은 콜을 돌아보며 물었다.
“허허, 소인은…….”
어쩐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 것도 같아 쥬다스는 미리 작게 한숨을 뱉었다.
“스승님의 뒤를 쫓느라 그럴 경황이 없었지요. 워낙에 나라 밖으로는 한 발짝도 걸음하지 않던 분이신지라.”
“당신 스승이라면 그 대현자 이그레트를 말하는 겁니까? 하긴, 위인전에도 그가 제국 밖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었으니. 그렇다는 건…… 애국자였나?”
“…….”
단순히 낯선 땅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쥬다스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3월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네요. ^^
(삼일절... 하필 본편 내용이 좀 공교롭게도 전쟁이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이야기가 ㄷㄷ;; 의도한 건 아닙니다.ㅠ)
뿐만 아니라 한달의 시작이자 봄의 시작, 학생분들은 새학기를 여는 등 여러 모로 뜻깊은 날이네요. 평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