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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그들은 밤새도록 쉼 없이 말을 달려오느라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먼저 숙소를 잡았다.
비에 젖었던 옷을 갈아입고 깔끔하게 씻은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이동하기 전 이것저것 꼼꼼히 재정비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들이 택한 장소는 국경도시 베르디에서 가장 큰 숙박 시설이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도 거뜬히 수용한 커다란 건물에선 식당과 카페, 숙박을 겸했다.
짐을 풀고 모처럼 제대로 된 휴식시간을 갖게 된 일행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비를 관리하는 이들은 마법 인챈트를 점검하고 내구도가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하여 새 것으로 갈았다. 그리고 향후 필요한 품목이 있으면 넉넉히 구비하여 채워 놓았다.
그렇게 제 할 일을 마친 사람 순서대로 자유롭게 식당에 내려와 식사를 시작했다.
직접 그 과정을 지도한 후에야 1층에 내려온 쥬다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대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고새 바글바글해졌네.」
만석이었다.
그들 일행뿐 아니라 점심시간을 맞아 우르르 몰려나온 병사들과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식당은 무척 붐비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그냥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으려나.’
12살 이래로 건강을 되찾았다곤 하여도, 그는 기본적으로 에단이나 다른 기사들만큼 체력파가 아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어도 비까지 맞아가며 밤새 말을 달린 일정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가 굳이 저 복잡한 사이에 끼어 식사를 하느니 도로 올라가서 쉬는 게 낫다고 판단한 순간이었다.
“쥬다스 님?”
“왜 그러고 서 계십니까?”
곧장 뒤따라 내려온 에단과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바이칼은 북적이는 식당 내부를 쓱 훑어보곤 알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휴, 식당 한번 복잡하네요.”
그러곤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훗,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럴 줄 알고 미리 자리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가시죠.”
“…….”
쥬다스는 차마 호의를 거절하진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들의 예약석은 커다란 파라솔로 햇볕을 가린 테라스에 위치한 큰 테이블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붙어 다니던 호위들이 각기 흩어진 데다 세이지도 지칠 대로 지쳐 먼저 쉬러 간 탓에 간만에 루바흐 시절 조합인 넷이서 마주 앉게 되었다.
그래서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그들은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담소를 나눴다.
“여긴 점심시간에 늘 이렇게 붐비는 모양입니다.”
“흠, 대부분 군복을 입은 자들이군요. 국경이라 그런가?”
제국의 위대성을 교육받고 자란 귀족 자제들은 대부분 실상 동쪽 국경지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다.
나라에선 전쟁의 승패가 기록된 역사와 영토를 표기해 놓은 지리, 땅을 지배하는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가르칠 뿐이었다.
영토전쟁을 종료한 지 백 년도 넘게 지났지만 분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역사서는커녕 이를 관리해야 할 수뇌부에게 제대로 전달조차 되지 못했다.
“단순히 그렇다 치기엔 분위기가 영 아닌데요.”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기며 거리를 내다보았다.
뻥 뚫린 1층 테라스자리에선 베르디 도시 거리가 코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전운이 가득했다. 식당 고객은 물론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도 대부분 병사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건물들은 폭격을 맞고 무너진 기둥, 깨진 벽돌 더미를 채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에 더해 도시 상공에는 동그란 구체 형태를 띤 마력구가 이리저리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늘에서 전방을 감시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용 마법 아티팩트였다.
“뭐든 철저하면 좋다지만, 이건 마치 전쟁 시절 그대로인 듯한…….”
“그건 호족 놈들 때문에 그래.”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혹시 자리 비었으면 합석 괜찮아? 베르디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내가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는데.”
옆과 뒤는 깔끔하게 밀어 윗선만 짧게 남겨둔 살구색 머리에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서글서글하니 웃으며 빈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소매를 접어 올려 팔뚝을 훤히 드러낸 군복차림에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목걸이형 동 계급패가 베르디의 병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은 6인석이었고 넷이 앉았으니 두 자리가 빈 상태였다.
대단한 격식을 차릴 공간도 아닐뿐더러 지금처럼 복잡하고 자리가 없는 상황에선 충분히 합석을 청할 만했다.
의심이 한 꺼풀 거둬지자 에단이 테이블 아래로 쥐고 있던 검에서 손을 놓았다.
“빈자리이니 앉으셔도 좋습니다.”
쥬다스가 친절히 답해주자 청년은 꾸벅 목례를 하고 비어 있던 자리에 합석했다.
“고마워. 어휴, 교대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 시간에 나왔더니만. 꼼짝없이 굶는 줄 알았네.”
“베르디 병사로 근무하시나 봅니다.”
“뭐 아직은 근무고 뭐고 그냥 신참이지. 미성년자 딱지 뗀 지 얼마 안 됐거든!”
병사 지원은 제국법상으로 19세가 지난 성인부터 가능하다.
청년은 뿌듯한 얼굴로 누런 동패를 만지작거렸다.
“참, 나는 마빈. 그쪽은 친구들끼리 외국 여행? 세계 일주라도 가?”
「나쁜 앤 아닌 것 같아. 뭔가 복잡한 의도를 가질 만큼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마빈은 오히려 좀 둔한 성격이었다.
경계심이 별로 없어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지금처럼 편히 대했다. 병사가 되기엔 잔정이 많고 어수룩한 청년이었다.
식당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 중엔 주인의 안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친위기사단원이 상당수 섞여 있었지만 마빈은 그마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에단과 눈길조차 주지 않는 크리스티나를 대신하여 바이칼이 상대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응수했다.
“뭐 비슷한 거지. 일단 국경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분위기가 별로인 것 같아서 걱정되던 참이었어. 요즘 여기에 뭔 일 있어?”
“요즘? 그럴 리가. 정확히 백 하나.”
마빈은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멍하니 쳐다보는 시선들을 향해 씩 웃은 그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백 년 하고도 일 년을 더 싸우는 중이라고. 우리야 어릴 때부터 전쟁교육받고 자란다지만 멀리서 놀러오는 여행객들은 죄다 놀라더라?”
“그 백 년하고도 일 년도 전에 전쟁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응, 딱 그렇게들 알지. 하긴 전쟁까진 아니고 좀 잦은 분쟁 정도야. 백 년 전에 영토전쟁에서 지고 쫓겨난 ‘호족’놈들이 계속 반기를 드는 거라서. 자기들 땅을 되찾겠다나?”
거기까지 설명할 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기름에 바싹 튀긴 닭다리를 뜯으며 마빈은 자릿세를 지불하듯 설명을 계속했다.
“솔직히 지들도 게임이 안 되는 걸 알아서 정면승부는 못 걸고. 게릴라전만 주구장창! 불시에 숨어들어 테러 뻑! 터뜨리고 하는데 당하는 입장에선 솔직히 미쳐 버리지 아주.”
“……위험하군.”
짐작한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깨달은 에단이 작게 탄식했다.
바이칼은 탄식 선에서 그치지 않고 따져 물었다.
“이봐, 왜 그냥 지원군 요청해서 확 쓸어버리지 않고서? 설마하니 백 년 동안이나 놈들 위치를 모르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모르긴 왜 몰라. 아주 호족 놈들 주둔지부터 본거지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지. 문젠 그게 아니라.”
“아니라?”
“상부 허가가 안 떨어져서 선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하? 그건 또 무슨 소리…….”
“영토전쟁이 쫑 났으니까. 기껏 잠잠해진 마당에 군대를 움직여 국경 밖을 쓸러 나가면 뭔 규율에 위반된다나 뭐라나. 수비는 되는데 진군은 불가능하대. 겁나게 얻어터지는데 나라에서 싸우지 말라고만 하니 별수 있나. 그쪽은 신나게 쳐들어오고, 우린 열심히 막고.”
황당한 이야기였다.
공격을 받는데 반격을 가할 수 없다는 기막힌 사정을 듣게 되자 크리스티나마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정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루바르잔의 권위가 떨어질 텐데. 제대로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게 맞나?”
“저기, 나 신병이거든요. 여기서 나고 자라면서 들은 얘기는 있어도 그런 자세한 내막까진 몰라.”
마빈이 들려주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로부터 얻을 게 없다 판단한 크리스티나는 곧장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그러자 마빈은 닭고기를 우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애가 차갑기는 얼음장이 따로 없네. 이럴 게 아니라 ‘오빠앙, 소녀 궁금하와용’ 하고 애교 한 방이면 장군님도 녹으실 텐…….”
“와하하! 애교 없는 여자도 있을 수 있지 왜 이러시나. 사람마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법이지.”
살벌하게 얼어붙는 분위기를 눈치 챈 바이칼이 필사적으로 눈치 없는 젊은 병사의 입방정을 말렸다.
하지만 마빈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 친구, 남자 사귀어본 적 없지?”
“…….”
직설적이면서도 무례한 질문에 정곡을 찔린 크리스티나는 그만 분노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빈은 곧장 바닷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무관심하게 있을 때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완전히 분위기가 천지 차이였다.
늘씬하고 키가 큰 그녀였으나 가녀리다고 하기보단 강인하단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드레스가 아닌 여행자 차림이라 약간 중성적인 느낌도 들었다.
화장기 없이 꾸미지 않은 얼굴은 제 본연의 색만으로도 충분히 또렷했으며 조각상같이 단정하고 완벽해 보였다.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특유의 오만한 빛으로 상대를 내려다본다.
순순히 아무에게나 함락당하지 않을 고압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눈이었다.
그 뛰어난 미색에 내심 감탄한 마빈이 잠시 넋을 놓았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이건 나쁜 뜻이 아니라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내 여동생이 딱 너 같거든.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남자는 싫어하지? 또 그렇다고 먼저 살갑게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
“이 오빠가 딱 보니까 넌 전형적인 마음고생 심하게 할 타입이네.”
두 사람 다 열아홉 살로 동년배였지만 마빈은 동네오빠의 마음으로 그녀에게 조언했다.
“들어봐. 예쁘면 땡이라는 말이 진리긴 한데 이거 간혹 안 먹힐 때도 있어. 남자란 기본적으로 살랑살랑, 따끈따끈에 매력을 느끼는 동물이라. 그렇게 벽치고 차갑게 굴면 아무리 예뻐도 여자로 못 느낄 수가 있다?”
‘감히…… 여자로 보이고 싶다고 바라는 건…….’
저도 모르게 멍하니 속으로 생각하던 크리스티나는 냉정하게 휙 시선을 거두었다.
“쓸데없는 소리.”
“아하하, 너무 끼어들었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 동생 녀석이 생각나서 그만.”
마빈은 머쓱해져서 뒷목만 만지작거렸다.
가만 지켜보기만 하다 불편해하는 기색을 읽은 쥬다스가 넌지시 끼어들어 화두를 틀었다.
“동생에 대해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 징글징글한 녀석들? 말도 마.”
“형제가 여럿입니까?”
“8남매 중 내가 넷째야. 난 딱 중간인데 내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줄줄이, 으휴. 여자 하나에 남자 셋. 전부 내 손으로 키우다시피 했지 뭐.”
8남매라는 말에 에단, 바이칼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이를 필요한 만큼만 낳아 번듯하게 교육시키는 제국 귀족사회에선 자녀수가 보통 하나에서 둘, 많아야 서넛이었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혁명이라 불린 ‘포탈’이며 ‘박스’ 등을 개발했을 정도로 마법개발강국인 루바르잔에선 아티팩트에 대한 개발 및 실험을 황실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부부생활 중 임신을 원치 않는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도 여럿 출시되어 있었다.
때문에 귀족을 비롯한 부유층은 자녀수를 조절하는 게 가능했고 가난한 평민의 경우 그저 생기는 대로 전부 낳아 길렀다.
그러다보니 마빈처럼 중간 형제가 동생들을 도맡아 키우는 부모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네 사람은 그제야 그의 사교적이고 수다스러운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 중에선 막내로 보이는데. 차분하고 어른스러워서 형누나들 속 썩일 것 같진 않네.”
“흠, 글쎄요. 형누나들 속이 안 썩을 것 같진 않은데.”
쥬다스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해 버린 탓에 ‘형누나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묘해졌다.
사정을 모르는 마빈만 홀로 호탕하게 웃으며 이유를 물었다.
“왜? 형들이 과보호라도 하나?”
“그런 듯도 싶군요. 다들 잔걱정이 많은 편이라.”
“그…… 아니…….”
바이칼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손을 내저었지만 결국 무어라 말은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정신연령 109살짜리 막내(?)에게 듣는 형누나....쿨럭.
참, 원하시는 내용에 관련된 외전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여유가 되거나 완결난 즈음에 써볼까 합니다.ㅎㅎㅎ 말씀해주시는 소재(?) 열심히 메모해두는 중입니다!
출판본에 합류되지 못할 정도로 짧거나 가볍게 다루는 내용인 경우엔 블로그 공개로...허헛.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