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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엇차차! 늦겠다.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끼워줘서 고마웠어, 친구들!”
마빈은 병사였기에 정해진 시간 안에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오지랖 넓고 유쾌한 성격의 병사는 즐거웠다는 인사와 함께 국경을 지날 때는 꼭 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후다닥 먼저 자리를 떠났다.
본래 일행끼리만 남은 테이블엔 한층 편안한 기류가 감돌았다.
그러자 그동안 로브 속에 꾸욱 눌려 있던 플루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처량하게 울었다.
“삐이이.”
“안 돼. 기다려.”
바이칼이 바둥거리며 사람 음식을 탐내는 와이번을 매몰차게 훈육했다.
그간 투닥거림을 통해 고집을 부려 봐야 옴짝달싹못하도록 구속마법에 걸릴 뿐이라는 사실을 학습해 온 플루비는 전략을 바꾸었다.
녀석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떼쓰는 대신 시무룩하게 날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긴 꼬리를 살랑이기 시작했다. 주홍빛 눈망울이 막 깨뜨린 달걀노른자처럼 촉촉하게 반짝였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먹고 싶냐.”
바이칼은 질린 눈으로 와이번의 애교를 바라보았다.
남은 감자튀김 따위를 집어다주자 플루비는 날카로운 이빨로 주는 족족 씹어 삼켰다.
주식이 물이라곤 하나 신룡으로 떠받들어지며 인간이 주는 제물로 배를 채우던 플루비였기에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한 맛을 즐길 줄 알았다.
행복한 얼굴로 남은 음식을 와작와작 해치우고 있는 플루비를 떨떠름하게 내려다본 바이칼이 문득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그 호족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게릴라니 테러니 하던 것들 말입니다.”
“병사가 거짓을 알려줄 이유는 없지. 다만.”
에단은 자신이 말하고도 찜찜함을 느끼곤 미간을 살짝 좁혔다.
“상황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군.”
“그럼 뭐 역시 직접 알아보는 게 빠르겠네요.”
쥬다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것보다 베르디 거주자들의 안전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분위기를 보아선 군 시설뿐 아니라 일반 민가에도 테러를 가하는 모양이니 말이야.”
「잠깐, 이그레트. 당장 가보려고?」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휙 날아올라 그의 코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곤란해. 너 지금 상태가 별로란 말이야. 그러다 또 예전처럼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잔소리하는 부모마냥 타박을 놓는 정령을 향해 쥬다스는 난감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유니.”
「……그러니까 곤란하다구!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알아올게. 응?」
뾰로통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부름에 거역하진 못했다.
계약자를 사랑하는 바람의 정령은 순순히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작은 미풍이 주위를 감돌며 불만을 표시했다.
실체화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녹색 기류를 알아본 세 명의 수하가 멈칫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부리는 자연의 정령들은 어지간해서는 지금처럼 먼저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에 특별한 이변이 있을 때 나타나 살며시 일러주는 정도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 아이가 내게 전하려는 이야기가 있어 말이다. 시간을 지체하여 미안하구나.”
“아뇨.”
크리스티나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냉정하지만 쥬다스에게만큼은 그 모든 경계가 풀어지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는 올곧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며 자신의 사견을 밝혔다.
“쥬다스 님께 정령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상황에 알맞은 이야기를 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령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늘 계약자를 행동의 중심에 두고 움직였다.
계약자란 정령들이 움직이는 목적 그 자체이자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주인에게 충의를 바친 종보다 훨씬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관계다.
루바흐에서 수년간 그의 학우로서 붙어 다닌 셋은 그런 정령들의 습성을 어느 정도 파악해 냈다.
정령이 계약자에게 제동을 걸었을 때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 생각하고 보니 평소보다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이기도 했다.
몇 가지 힌트를 토대로 쥬다스의 상태를 알아차린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해졌다.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시길 청합니다. 국경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적합한 인원을 보내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으응? 아니, 크리스티나야. 내 그리할 정도까진 아니다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의 항변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 소견도 같습니다.”
에단마저 우직하게 뜻을 보탰다.
“이는 저희들에겐 주군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뜻이 맞지 않을 땐 서로에게 가차 없으면서 이럴 때는 참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플루비를 안아 든 바이칼이 한 축 보탰다.
“우리 애들 일 잘하지 않습니까? 그 녀석들 평소에 하는 일도 없는데 이럴 때 좀 시키죠.”
딴에는 친위기사단이란 표현을 자중하여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어쩐지 시정잡배라도 된 양 껄렁한 게 어감이 영 좋질 않았다.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바이칼은 도리어 자기 말이 틀렸냐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들을 응시하던 쥬다스는 한숨과 함께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 과보호라 할 수 밖에.’
결국 쥬다스는 고집을 꺾고 잔걱정 많은 친우들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머무는 숙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편의시설이었다.
보안이 철저한 성이나 저택은 아니었기에 호위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보안에 힘썼다.
정령은 술사가 잠들거나 정신을 잃었을 때엔 실체화할 수 없다. 때문에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쥬다스는 방 안에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
여성인 크리스티나는 제하고 에단과 바이칼이 그와 같은 객실에 들어섰다. 가장 곁에서 혹시 모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편성이었다. 둘은 쉬는 자리에서까지 무기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실체화되지 않은 채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유니가 베갯머리에 내려앉으며 중얼거렸다.
「잘 자네.」
「우웅. 심심하다요.」
쥬다스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태연함을 유지했지만 쉴 수 있는 공간에 들어오자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동안 무리해서 줄곧 이동을 한데다가 특히 지난밤 찬 기온에 비를 맞고 밤새도록 달려온 터라 그가 느끼고 있던 피로감은 과중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가 궁을 떠나 순례의 길에 임하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피로하다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린 세이지나 나이가 있는 콜에 대해선 편의를 봐주고 짬짬이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썼으면서 정작 본인은 쉬지도 않고 줄곧 움직였다.
사건이 터지면 직접 나서서 일을 수습했고 자신을 따라나선 일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일정을 총괄했다.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달랐다.
오히려 쥬다스는 자기관리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한 번 호되게 아팠던 전적이 있었던 탓에 식사와 운동을 규칙적으로 챙겼고 일정 한계치 이상 무리했다거나 아프다는 생각이 들면 알아서 쉬고 치료를 받았다.
문제는 그가 나름대로 정해둔 ‘한계치’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려면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시점이 되어야만 했다.
늘 자애롭고 부드럽다 싶다가도 엉뚱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린다.
자존심이나 오기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적용하는 허들은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자애롭지 못했다.
에단과 바이칼은 이미 루바흐 시절에서부터 알고 있던 황태자의 기묘한 고집에 대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번에 크리스티나가 나섰던 것처럼 그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여 휴식 시간을 마련하는 정도였다.
두 사람은 혹여 떠드는 소리에 기껏 잠재운 쥬다스가 깨기라도 할까 줄곧 침묵했다.
바이칼의 품에서 벗어난 플루비만이 순진한 눈망울로 방 안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를 생각해 주는 인간 친구들이 생겨서.」
유니는 베개 위에 풀썩 엎드려 손등에 턱을 괴었다.
편안히 잠든 계약자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곁에 불의 정령이 함께 풀썩 내려앉았다.
「으응. 다행이긴 하지만, 역시 조금 질투 나네요.」
「뭐가?」
「이제 우리보다 그들을 의지하게 될까 봐.」
카니는 호의와 적의 그 어느 쪽도 아닌 시선으로 에단 쪽을 바라보았다.
자연체인 정령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에단과 바이칼은 그저 호위임무에만 충실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마법사인 바이칼과 달리 타고난 무예가의 핏줄인 에단은 타고난 짐승 같은 감각으로 예민하게 정령의 존재를 느꼈다.
수년간 쥬다스의 곁을 지키다 보니 정령의 기척에 익숙해져 간접적 훈련 효과도 있었다.
그가 감지하는 건 기껏해야 단순히 ‘방 안에 정령이 존재하고 있다’정도였지만 실체화하지 않은 자연체 정령을 알아차린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던 에단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응시하자 카니는 쿡쿡 웃었다.
「정말 예민한 꼬마라니까요. 귀엽기도 해라.」
「좀 전엔 쟤한테 질투 난다며?」
「어머? 그건 별개의 문제죠. 귀여운 건 귀여운 거잖아요. 질투의 대상을 귀여워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카니를 향해 유니가 표정을 구겼다.
「난 가끔 카니 네 감정선이 정말로 평범하지 않다고 느껴.」
「후후. 물론이에요. 난 특별하니까.」
「…….」
뻔뻔한 불의 응대에 바람의 정령은 더 할 말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닥에서 제 꼬리를 물며 장난을 치던 플루비가 데굴데굴 굴러 침대기둥에 머리를 콩 박았다.
자기가 와서 부딪혀 놓고 삑삑 울어대는 와이번을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던 유니가 문득 토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둘이 되게 비슷하네.」
「앙?」
마침 침대보 위를 굴러다니며 온몸으로 심심함을 표출하고 있던 토니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하는 짓이 되게 닮지 않았어? 토니랑 저 와이번.」
「?」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아마 와이번이 말할 줄 안다면 말투도 닮았을 것 같지 않아요?」
「?」
영문을 모른 채 두 정령을 번갈아보던 토니는 이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다요. 지금 앞담 하는 거다요? 아무리 봐도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의심도 할 줄 알아? 많이 컸네. 칭찬이야, 칭찬.」
「끄앙, 아닌 거 다 안다요!」
와이번과 쌍으로 빽빽거리는 토니를 내버려 둔 채 유니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카니. 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응?」
「우리보다 인간들을 더 의지하게 될 것 같다고 했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걸.」
순진하게 깜빡이는 동그란 다홍빛 눈동자를 보며 유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아는 이그레트는 결코 어느 쪽도 의지하지 않을 테니까.」
「…….」
「그렇지?」
처음부터 그가 우리에게 바란 건 그저 함께 있어달란 소망뿐이었는걸.
뒷말을 삼킨 유니는 포로록 날아올라 쥬다스의 이마에 살포시 자그마한 손을 얹었다.
「아주 조금쯤은 어리광 부려줘도 좋을 텐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7살의 쥬다스는 옛날처럼 병약(..)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또 체력이 강인한 편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좀 약한 편이긴 하겠네요.
체력의 한계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나름 약점입니다. 정신력으로 우적우적 씹어버려서 큰 의미가 없을 뿐(...)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ㅎ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