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7화 (13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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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그때 대화에 끼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던 루니가 귀를 쫑긋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르릉 사납게 목을 울리는 소리에 다른 정령들도 움찔 고개를 들었다.

「이건…….」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와 함께 도시 곳곳에서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었다.

며칠간 잠잠했던 호족의 기습 공격이었다.

정령들이 반응하기가 무섭게 창밖 어딘가에서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인지 큰 혼란은 없었다.

마력포와 병사들이 곧장 투입되었고 베르디 시민 또한 군대 못지않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자 에단도 창문을 벌컥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끼이이!

뀨루루룩!

아닌 밤중에 새소리가 한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따라 창가에 선 바이칼이 스태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하늘을 턱짓했다.

“그리폰을 길들였군요.”

“……작정하고 육성한 공습부대로군.”

에단의 날카로운 눈길이 도시 상공을 훑었다.

그리폰 열세 마리가 하늘을 휘젓고 다녔다.

그 위에 능숙하게 올라앉은 침입자들은 활과 마력탄을 이용해 지상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사자의 동체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가 달린 그리폰은 초원이나 숲속 등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비행형 몬스터였다.

단순한 맹수를 넘어 몬스터라고 칭해지는 만큼 전투능력이 우수하다. 또한 성질이 몹시 포악하여 쉽사리 사람 손을 타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호족은 먼 옛날부터 부족에 전승되는 비법을 통해 그리폰을 길들여 그 힘을 전쟁에 활용해 왔다.

육상에서만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기마부대와 달리 하늘을 날며 적들을 폭격할 수 있는 공습부대는 어마어마한 기동성과 전투력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기마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많은 나라에서 공중전이 가능한 비행군단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결과는 대부분 실패였다.

사람이 탑승할 만한 조건을 만족하는 비행개체의 부족, 온순한 말과 다르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난폭한 기질, 그리고 사육과 훈련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측면에서 난관을 겪었다.

이 모든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비행부대가 창설된다 하더라도 극소수로만 운영이 되었다.

강대한 영향력을 쥔 루바르잔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건 비행도시 엘리아의 천마 페가수스 훈련소가 유일했다.

날개 달린 몬스터를 길들이는 건 조련 대상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파일럿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과정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번에 나타난 그리폰 공습조는 비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실수 없이 작전을 이행하는 걸 보아 대단히 우수한 실력임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저것들. 영 허접스러운 놈들은 아닌가 봅니다?”

“한눈팔지 말고 역할에 집중해라.”

“예이, 합니다. 해요.”

바이칼은 툴툴거리면서도 받은 명령대로 착실히 제 할 일에 임했다.

그가 대충 손으로 빙글빙글 굴리고 있던 스태프는 숙소에 깔아둔 보호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한 마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마력배열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 고쳐 잡은 스태프에서 은은히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진이 발동하며 건물 전체가 흐릿한 청색 배리어로 뒤덮였다.

물리적인 타격이 가해질 경우 대신 그 충격을 흡수하는 실드마법이었다.

총책임자이자 호위의 대상인 쥬다스가 지시하지 않는 이상 친위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방어태세만 갖춘 채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침입자들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다행히 오랜 분쟁 끝에 이러한 기습 공격에 익숙해진 베르디의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신속히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마력포를 발사하여 그리폰을 격추시키는 등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어! 저놈들 도망가는데요?”

갑자기 나타나 베르디를 공격하던 호족의 공중부대는 제국군이 제대로 대열을 갖춰 응전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꽁무니를 빼버렸다.

유유히 하늘을 날아 도주하는 적들과 말을 타고 그 뒤를 쫓는 마법기사들 사이로 몇 번 더 폭발음이 터졌다.

에단은 창가에 선 채 성벽 쪽으로 달아나는 그리폰 떼를 주시했다.

마침 성벽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적들이 공중과 지상, 양동작전으로 침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차별폭격 후 퇴각이라.”

완벽한 게릴라성 습격이었다.

불이 붙은 건물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놀란 아이 의 울음 소리가 뒤섞여 주변이 난장판이 되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이도 도저히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깬 쥬다스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에단.”

“……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도록 하여라.”

지시는 간결했다.

“나는 성벽 쪽으로 가보마.”

“뒤를 따르겠습니다.”

에단은 곧장 동행 의사를 밝혔다.

모시는 주군이 아무리 강한 정령술사라 한들 위험한 상황에 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쥬다스는 그의 뜻을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은 닫혀 있었지만 어디선가 바람이 몰려들어 옷자락을 스쳤다.

“아니, 그럼 저도.”

“피해자들을 돕는 일은 자네가 맡도록.”

함께 따라나서려던 바이칼은 할 일을 떠넘기는 에단의 단호한 명령에 움찔 굳었다.

곧 소용돌이처럼 몰려든 녹색바람에 휩싸여 두 사람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아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바이칼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아오, 진짜! 맨날 나만 이런 역할이야!”

불만가득한 말과는 달리 몸은 이미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폭격에 노출된 주민들의 안전이 시급했다.

* * *

쥬다스와 에단이 바람의 인도에 따라 성벽 밖으로 이동했을 때쯤엔 게릴라들과 베르디 병사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치고 빠지는 데에 익숙한 게릴라단체는 바로 퇴각하지 않고 살짝살짝 간을 보다가 싸움이 커질라손 치면 얄미울 정도로 쏙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베르디 군사 역시 이런 간지러운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먼 마법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베르디가 적군을 쫓는 걸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포로를 잡았기 때문이다.

게릴라는 득 없는 싸움을 하러 도시에 침범한 게 아니었다.

폭격을 가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끌고 갔다.

그런 식으로 끌고 간 포로들은 본보기로 참수당하거나 물자를 요구하는 거래대상으로 쓰였다.

이 성 밖 전투는 최대한 포로를 많이 데려가려는 게릴라들과 그 포로를 탈환하려는 병사들 간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전장의 한복판에 무방비상태로 나타난 두 사람 역시 침략자들이 보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스릉-

“뭐지, 샌님들 같은데. 이런 데서 한가롭게 관광인가?”

“…….”

쥬다스는 제 목에 맞대어진 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미 누군가를 베고 온 듯 뜨끈한 핏물이 배어 있었다.

그는 순순히 양손을 포박당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밧줄에 손을 묶인 쥬다스를 본 에단도 움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일격에 상대의 머리를 날려 안전하게 구해낼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 쥬다스의 행동이 너무나도 덤덤했다.

심지어 정령들조차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선 그를 보고 동료가 당해서 당황했다고 여긴 호족 전사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무기 버려!”

끄덕, 쥬다스의 신호를 받은 에단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렸다.

곧 둘은 나란히 손이 묶여 다른 포로들을 실어둔 수레에 함께 실렸다.

철창에 자물쇠까지 걸어둔 튼튼한 수레였다.

그 안에는 폭발의 여파로 잿더미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이십여 명의 포로가 있었다.

겁먹은 눈길이 새로 들어온 포로들에게로 향했다.

덜컹!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포로를 수용한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를 끄는 건 소나 말이 아니라 길들여진 그리폰이었다.

말들이 끄는 마차와 다르게 그리폰 수레는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자 사람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엄마야!”

“히익. 나, 날고 있어!”

충격과 공포로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혹 생각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철창에 기댄 채 멀어지는 지상을 내려다보던 쥬다스는 사과로 대신 답했다.

“내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을 듣고자 여쭌 것이 아닙니다.”

“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 홀로 잠시 다녀올까 했었지.”

“저……!”

황당함이 지나쳐 ‘전하’라고 소리칠 뻔한 에단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강철같이 단단한 성미에 늘 무뚝뚝한 그가 평소에 동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상관이 지금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언행을 보일 때를 제외하곤.

쥬다스는 철창 밖으로 멀어지는 지상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너희 보기에 위험해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이미 충분히 위험하십니다…….’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다시 목구멍 언저리에서 가로막혔다.

에단은 그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폰 수레는 얼마 가지 않아 지상으로 착륙했다.

수레바퀴가 부서질 듯 덜컹거리며 바닥에 내려앉는 바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적응할 새도 없이 다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자 수레를 몰던 호족이 고삐를 놓고 바닥에 내려섰다.

쿵!

투박한 양날도끼, 비펜니스 형식의 무기를 휘둘러 땅에 찍은 호족 전사가 거칠게 일갈했다.

“입 다물어! 더러운 제국 놈들.”

순식간에 비명 소리가 뚝 끊겼다.

질긴 가죽을 엮어 만든 경갑을 걸친 사내는 숨도 쉬지 않고 철창에 딱 달라붙은 포로들을 향해 도끼날보다 날선 눈빛을 부라렸다.

“지금부터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틀리면 다 모가지를 콱 날려 버리는 수가 있어.”

포로들은 일제히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호족은 성미가 급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이 중 몇은 죽여 잔혹함을 증명하고 몇은 자원과 교환할 셈으로 데려왔으니 당장 머리 몇 개 날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포에 숨을 죽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진 어린아이부터 젊은 여성들까지 전부 혼절하거나 덜덜 떨지 않고 잘 버티는 편이었다.

그들에게 이런 분쟁은 일상이니 두렵긴 해도 아예 새삼스러운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읽어낸 쥬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위기에 대한 공포가 이미 만연해 있구나. 어린아이들마저 이런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고 순응하고 있다니.’

예전 같았으면 관심 없이 지나갔을 일이었다.

‘이그레트’는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에야 타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부모를 잃고 죽어가는 전쟁고아를 거두긴 했어도 아이의 복수를 해주거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누군가를 편들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 생각했다.

선의로 내민 손길에 달려드는 불행은 끝도 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개입을 꺼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를 구해 다른 누군가가 불행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삶의 이치인 것을.’

선의는 방관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때로는 두루뭉술하게 방관하기보다 분명한 선을 긋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루바르잔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피를 이은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은 명명백백 정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슬슬 입장에 따른 차이를 인식하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시작한 쥬다스입니다.

적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애도를...(..)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

한주의 마지막이 또 돌아왔군요!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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