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8화 (13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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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망할 제국 놈들. 나와!”

잠시 포로를 수레에 실은 채 상황을 살피던 호족들은 쫓아오는 제국군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철창을 열어주었다.

자유를 준 건 아니다. 그저 더 넓고 확실히 감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포로들을 이동시켰을 뿐이었다.

쥬다스와 에단은 포로들 틈에 섞여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 수레에 끌려온 자들 외에도 다른 경로로 잡혀온 사람들도 함께 한자리에 합류시켰다.

장정 다섯이 팔 벌려 안아도 남을 만큼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보였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의 손을 묶은 밧줄을 전부 연결시켜 나무에 둘둘 감아 묶어놓았다.

언뜻 허술해 보이기까지 한 조치를 끝으로 그들을 나무 아래 데려다놓은 호족 사내는 휙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건 믿는 구석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뀨루룩.”

포로 감시자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폰이었다.

머리는 독수리처럼 생겼지만 목 아래로는 거대한 사자 몸통이 이어졌다.

그 몸집을 지탱하는 만큼 두터운 네 개의 다리엔 흰털이 북슬북슬 자랐고 날카로운 발톱이 삐져나와 있었다.

풀밭에 배를 깔고 느긋하게 엎드려 있던 그리폰은 낯선 사람들의 냄새를 맡자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러자 오히려 거대한 양날도끼를 한 손에 휘두르던 사내가 지킬 때보다 훨씬 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려는 듯 가까이 다가온 그리폰은 경고하듯 끼룩거렸다.

괴수를 앞에 둔 사람들은 나무에 손이 묶여 달아나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전부 사자 앞의 토끼 꼴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사납게 사람들을 압박해 가던 그리폰이 문득 한 사람 앞에서 정지해 버린 것이다.

“……?”

「흐응. 제법 감이 좋은 아이네.」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이 팔짱을 낀 채  방앗간 참새 보듯 가소로운 눈빛으로 그리폰을 보았다.

그리폰은 쥬다스의 앞에 당황한 기색으로 굳은 상태였다.

따로 실체화를 한 건 아니었지만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가호하는 자연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알아봤으면 숙여야지. 안 그래?」

말이 들리는 건 아니라도 그리폰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꼬리를 말았다.

그리곤 슬금슬금 자리에 엎드렸다.

그 꼴을 본 유니가 만족스레 그리폰을 향해 손짓했다.

「봐, 카니. 귀엽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라구.」

「으응,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폰은 정령들의 눈치를 보며 시무룩하게 눈만 데록데록 굴렸다.

그런 녀석의 코앞으로 천천히 밧줄에 묶인 손이 내밀어졌다.

“괜찮아. 괴롭히려던 건 아니란다.”

“꾸룩.”

완벽히 힘의 차이에 굴복한 그리폰이 양순한 태도로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뽀송뽀송한 새의 머리털이 손바닥을 폭 감쌌다.

쥬다스는 덩치는 사자만 한 주제에 아기 새마냥 구는 그리폰을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그래, 착한 아이로구나.”

“어……? 낮에 합석했던!”

그 순간 얼어붙은 채 쥬다스와 그리폰을 바라보기만 하던 포로들 틈에서 누군가 불쑥 큰 목소리를 냈다.

“우왓차차, 묶여 있었지 참.”

반가운 기세로 달려오려던 청년은 나무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는 밧줄 때문에 고꾸라질 뻔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밧줄은 숙이거나 약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제자리로부터 몇 걸음 이상 떼기 어려운 길이로 고정되어 있었다.

쥬다스와 에단 역시 그를 알아보고 돌아섰다.

“아.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빈.”

태연스레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와 그 곁에서 묵묵히 목례하는 에단을 번갈아본 마빈이 어색하게 밧줄에 묶인 양손을 들어 보였다.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이라 반갑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놀랐어,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놀란 사람치고는 표정이며 어투까지 느긋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빈은 꼬투리를 잡는 대신 멋쩍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우, 베르디의 군인으로서 면목이 없다. 하필 내 쪽에 폭격이 떨어져서.”

직격탄을 맞은 건 아니지만 그 여파에 휩쓸려 거하게 구른 모양인지 복장이 아주 너덜너덜했다.

병사가 포로로 잡혀오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쥬다스는 거기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상태를 눈으로 한번 살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군요.”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지금 여기엔 두 사람뿐? 다른 친구들과는 떨어진 거야?”

“예, 말하고 나왔으니 크게 걱정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마빈은 곁에 있는 에단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넷이나 되는 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한 보호자로서의 고충을 떠올린 탓이었다.

가만 보니 연장자이면서 체격이 큰 에단조차 저 순둥이처럼 보이는 소년에게 이기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막내라고 너무 오냐오냐 해주나 보네. 보기보다 상당히 마이페이스인 꼬마인 모양인데.’

오해 아닌 오해를 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쥬다스는 그리폰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여긴 호족 주둔지인가 봅니다.”

“아, 그래. 놈들 본거지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있을 거야. 포로로 협박이든 협상이든 간에 하려면 가까이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사이로 잊고 있던 공포심이 파도처럼 너울졌다.

결국 잘 참고 있던 어린애 하나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빈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혹시 조련사야?”

쥬다스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마빈은 눈짓으로 바닥에 발라당 엎드려 그르렁거리고 있는 그리폰을 가리켰다.

“호족이 아닌 자가 그리폰을 그렇게 잘 다루는 건 처음 봤어. 전설의 조련사라도 돼? 그 사나운 놈을 어떻게 한순간에 따르게 만든 거야?”

“조련사는 아닙니다. 이 아이는 나를 따른다기보다 자연을 따르고 있을 뿐.”

“엥?”

「이그레트, 혹시 건방지게 굴면 말해요.」

그의 옷자락을 꼭 끌어안고 있던 불의 정령왕이 해맑게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조져 줄게요.」

“……!”

해사한 웃음 뒤로 화끈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폰은 급기야 바닥에 엎드린 채 와들와들 떨어댔다.

정령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마빈은 갑자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그리폰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비법이 있나 보네. 그렇다 해도 계속 그러면 눈에 띌 텐데.”

“여기선 눈에 띄면 안 좋은 겁니까?”

“내가 알기론 말이지. 감시자가 없어도 이 주둔지 내부는 온통 호족의 감시망에 속해 있을 거야. 지상은 물론 상공까지 싹 다! 아예 땅굴을 파서 달아나지 않는 이상에야 걸리지 않고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 거라 본다, 난.”

형편없는 솜씨로 대충 묶어둔 밧줄, 그리고 전의를 상실한 그리폰이라는 최적의 조건 두고도 탈출의 단꿈에 젖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쨌든 네가 그리폰을 길들일 줄 안다는 사실이 놈들 눈에 뜨이면 아주 곤란해질 거야. 호족은 특별한 재주를 가진 포로는 풀어주지 않는다고 들었어. 오히려 본거지로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킬지도.”

“흐음.”

애초에 본거지를 찾아가려던 쥬다스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는 아예 자리에 풀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곤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그리폰의 부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잠시 조련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쥬다스 님.”

풀밭에 편하게 앉은 그의 곁에 에단이 따라서 턱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무언의 뜻이 담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쥬다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빠르고 쉬운 길만이 능사는 아니야.”

“주군께서 더 이상 수모를 당하도록 묵인할 수 없습니다.”

“받을 수모를 생각하면서 움직이려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단다. 나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게다.”

“그들에겐 그러실 가치가 없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여 제국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침략자들입니다.”

“듣거라.”

단호함이 깃든 반발에도 쥬다스의 음성은 담담히 이어졌다.

“신이 인간을 심히 사랑하여 영원토록 버리지 않는다 하거늘. 어찌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가치를 함부로 결정짓는단 말이더냐.”

먼저 에단의 입장을 곤궁하게 만든 건 신권을 높이 세워 유일신 사상을 국교로 삼은 루바르잔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반박할 수 없는 종교적 사상이었다.

“손뼉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땅을 빼앗긴 입장에선 제국이야말로 무뢰배나 다름없을 터. 저들이 바라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고, 이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게 우선이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자비였고, 이를 다시 풀어 말하자면 힘 있는 자의 관용이었다.

힘이 없고 그릇이 작은 자는 자비를 베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자비를 베푼다는 건 상대보다 철저하게 우위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힘으로 겁박한다면 대화가 되겠느냐.”

그래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자비란 없다는 소리였다.

에단은 더 이상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주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적장을 만나려는 주군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려던 신하.

그 묘한 군신관계에서 벌어진 짤막한 대치가 종료되자 지켜보던 마빈이 눈을 끔뻑이며 슬쩍 운을 떼었다.

“얼라료. 형님 아우 하는 친구들이 아니었나?”

“친구는 맞지만 형님 아우 사이는 아닙니다. 아, 그리고 제가 막내도 아닙니다. 동생이 베르디에 같이 와있으니까요.”

“동생도 있었다고?”

마빈이 아무리 눈치 없는 말단병사라 할지라도 방금 대화를 지켜보며 이미 쥬다스가 평범한 소년은 아니란 사실은 알아차렸다.

그래도 첫인상이란 게 제법 강했던 모양인지 일행 중 막내라 여겼던 그 밑으로 동생이 있다 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친동생?”

“그렇습니다.”

머리색이 다른 배다른 동생이긴 했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은 건 확실했다.

“형제가 위아래로 몇 명씩 있는데?”

“아래로만 둘…… 이군요.”

말하다 보니 2황자 카이제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째 황자는 드물게 마법과 신체적 이능을 동시에 타고난 천재였다.

야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를 읽을 줄 알아 3황자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쥬다스를 보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카이제르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지만 그조차도 쥬다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가 조금만 더 야망이 높은 자였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불운을 통탄하며 좌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어 황태자 자리에 앉은 쥬다스는 하필 천재여도 그냥 천재가 아니었다.

자연계 4속성 정령의 계약자!

대현자 이그레트 이후 전무후무한 정령술사의 탄생이었다.

심지어 그 수준조차 상급에서 최상급이라 알려졌으니, 정령왕급이 아니더라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황제는 오래전부터 1황자를 총애 한다 소문이 나 있었고 실제 별다른 이견 없이 쥬다스를 황태자위에 올렸다.

게다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전부 지배층의 큰 축을 맡고 있는 고위귀족들이다.

쥬다스는 사야 황후를 처단한 직후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완벽한 차기 군주가 되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자마자 유순한 성격의 카이제르는 순순히 야망을 버리고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평소 좋아하던 학문과 재능이 있는 무예를 골라 익히며 얌전히 지낸다고 들었다.

하지만 형제를 찾아오지도, 찾아오는 걸 반기지도 않는 그런 서먹한 사이였다.

그는 3황자 세이지가 침묵의 궁에 유폐된 이후 내내 단 한 번도 동생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살아 있음을 알고 지내는 정도의 사이였다.

‘황실의 핏줄이라. 그마저도 다행인지도 모르지.’

피로 물든 왕관을 쓰기 위해 형제의 가슴에 칼을 박는 역사보다야 지금이 훨씬 깔끔했다.

애초에 그는 가족이란 개념에 무지했다.

전생과 현생 모두 가족애를 느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비단 그뿐 아니라 황실의 특성상 부모형제와 평범한 가정처럼 친밀하게 지내기는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세이지와의 인연이 어마어마하게 특별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도 본래대로라면 원수가 될 사이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쥬다스는 조용히 쓴웃음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어어 또다시 월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상하게 월요일은 자도자도 졸리네요.... 정말 이상해요...그러니까, 제가 게으른 게 아니라 월요일이 이상한 겁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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