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39화 (13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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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한편, 호족 전사들은 포로들을 나무 아래 묶어두고 짤막한 회의를 나누는 중이었다.

“전사 5인, 그리폰 2기 손실. 포획한 포로는 스물다섯. 이상 작전을 성공적으로 종료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수고했다.”

“포획한 포로 수가 지난 작전 때에 비해 두 배나 많습니다. 그중 제국군인의 수가 다섯입니다. 놈들이 일부러 심어놓은 것일 수도…….”

“상관없어. 늘 하던 대로 분류해.”

덤덤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이번 습격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일부였다. 고향을 잃은 백여 년 전 그날부터 호족은 오로지 싸우기 위해 살았다.

붉은 깃으로 장식한 가면을 쓴 사내가 전사들을 향해 낮게 명령했다.

“오늘 이후 이 거점은 버린다.”

“예!”

본거지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호족의 우두머리는 습격에 직접 가담하여 전두지휘하고 있었다.

왕은 가장 뛰어난 전사이자 책략가로 군림하며 거의 모든 전투에서 빠짐없이 선봉을 맡았다.

지금 쓰고 있는 붉은 가면과 더불어 그리폰의 발톱을 갈아다 촉으로 심어 넣어 제작한 쌍두창이 바로 왕의 상징이었다.

그리폰을 몰고 지상에선 창을, 상공에선 활을 사용하여 무수히 많은 적의 숨통을 거두어 왔다.

그가 지닌 무력은 부족 최고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는 수장을 보자 호족의 전사들의 사기가 더불어 치솟았다.

뛰어난 무력과 기개, 책략을 동시에 갖춘 지도자는 집권과 동시에 제국에게 패배한 이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호족역사를 뒤집기 시작했다.

“해산.”

호족의 왕은 깔끔하게 회의를 종료했다.

전사들이 제 위치를 찾아 우르르 흩어지자 그는 곁에 남은 부관을 향해 물었다.

“포로들은 어디에 두었지?”

“그리폰들의 쉼나무에 묶어두고 페리에게 감시를 맡겼습니다.”

그리폰은 본래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속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나무에 이끌렸다.

새처럼 둥지를 틀진 않지만 등을 붙이고 잠들 수 있는 나무를 하나 정하고 서식하는 편이었다.

그리폰이 택한 나무를 ‘쉼나무’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이 포로들을 묶어둔 커다란 느티나무가 바로 이 거점에 머무는 동안 그리폰들이  휴식을 취하는 마구간 역할을 했다.

보고를 받은 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페리에게 맡겼나? 녀석이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을지 의문이로군.”

페리는 그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제법 높은 서열을 차지한 그리폰이었다.

사실상 최고 서열은 왕의 그리폰 ‘알파’였지만 주인의 명령만 듣는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늘상 곁에 붙이고 다녔다.

알파는 지금도 왕의 그림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처럼 머릿수를 많이 포획했다더니. 써먹지도 못하고 전부 고깃덩이가 되어버리는 건 곤란한데.”

최고 서열이 아닌 페리가 쉼나무를 찾은 다른 그리폰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왕이 염려하는 건 포로들의 탈주가 아니라 안전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페리는 자기가 맡은 임무를 목숨 바쳐 수행할 충성스런 그리폰이니까요.”

부관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신뢰가 담긴 어조를 귓등으로 흘리며 왕은 몸소 포로들을 모아둔 쉼나무로 향했다.

꼭 그리폰이 기껏 잡아온 포로들을 한 끼 식사로 대체했을 거란 의심 탓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일 뿐이다.

왕은 뭐든 제 눈으로 확인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작전수립, 진행, 결과 보고까지 일일이 직접 참여했다. 특히 포로를 잡으면 면대면으로 인상을 살펴 신분과 재능 여하를 판별해 냈다.

그의 눈썰미는 정확했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할 만한 출신 신분이거나 요긴하게 활용 가능한 능력자는 그에게 곧바로 걸러졌다.

“지금 살펴봐서 써먹을 만한 재주가 있는 놈이 있으면 곧장 본부로 데려가겠다. 남은 놈들은 명단작성해서 3일 후 베르디에…….”

임시로 세워둔 천막을 돌며 늘 하던 대로 부관에게 지시하던 왕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왕이 갑자기 침묵하자 의아한 얼굴로 앞을 내다본 부관 역시 눈을 부릅떴다.

붕어처럼 몇 번 입만 뻐끔거리던 부관이 혼비백산하여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 이게 무슨!”

눈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게릴라 습격 작전을 수행하고 와서 지친 그리폰들은 그들의 예상대로 쉼나무에 몰려들었다.

페리는 결국 아홉 마리나 되는 동족들을 전부 통제하지 못했다.

“…….”

가면 속에 가려진 왕의 흑청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창대를 쥔 손아귀에 콱 힘이 들어갔다.

‘복종.’

현재 상황을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였다.

총 열 마리의 그리폰이 전부 한 소년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그중 감시 역을 맡은 페리는 아예 발라당 배를 뒤집고 갖은 애교를 다 떨어대는 중이었다.

왕은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타고난 성질이 흉포하여 길들인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절대 따르지 않는 게 그리폰이다. 그마저도 오랜 역사를 그리폰과 함께해 온 호족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호족과 그리폰과의 관계는 동료에 가까웠다.

저 까탈스럽고 자존심 강한 그리폰들이 누군가에게 엎드리거나 배를 까뒤집어 복종을 표하는 일은 지금껏 전무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새끼 그리폰조차 제 부모에게 뱃가죽을 내보이지 않는다. 배는 급소다. 놈들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친밀함을 느끼긴 해도 생명을 내맡길 정도로 절대적인 복종을 하진 않는다.

‘저런 자가 포로 따위로 잡혀 왔다고?’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호족의 왕은 천천히 눈앞의 상황을 한 번 더 훑었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십 대 중반의 소년이다.

갈색 머리카락에 금안,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외형에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조금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발치에 그리폰들이 전부 엎드려 복종과 경외를 표하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장면이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왕이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않자 소년이 먼저 그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맑은 금색 눈동자가 고요히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할 것 없다 여겼던 눈과 마주치자 경직되었던 어깨가 스르르 풀어졌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볼 때처럼 온화한 빛의 금안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왕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구냐.”

“…….”

“누구냐고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대답이 없었다.

상대가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무시당했다고 느낀 가면 속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불쾌를 숨기지 않고 덕지덕지 묻혀서 다시 말했다.

“마법사인가? 그리폰들을 전부 제압할 실력이라니, 제법 강력한 이능을 지니고 있나 보군. 제국 황실에서 보냈나?”

“황실에서 온 것은 맞습니다. 하나 이 경우 ‘보냈다’는 표현보다는 ‘찾아왔다’는 말이 더 적합하군요.”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왕은 순순히 대답하는 소년을 보며 지독한 모멸감에 휩싸였다.

‘그래, 너희들은 우릴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는 땟자국 정도로 여기고 있겠지!’

지금의 호족은 사실상 부족이나 나라라고 칭하기 어려웠다.

그저 근본 없이 떠도는 패잔병들이었다.

선대의 시대 때 영토전쟁에 의해 나라는 삼켜졌고 왕조는 처참히 짓밟혔다.

남은 것은 포기하는 것을 포기한 전사들뿐이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왕의 후손과 전사들은 지박령처럼 빼앗긴 땅 주변을 맴돌았다.

“드디어 백여 년 전 당신들이 남긴 불씨를 진압이라도 하고 싶어졌나 보지?”

‘왜 이제 와서.’

호족은 민족성이 강했다.

그들은 차라리 짓밟혀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지배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분쟁을 지속했다.

그러는 사이 욕심이 커졌다.

루바르잔 제국은 넓어진 땅덩어리를 온전히 보살피지 못했다. 이미 그 안에서 부패한 것도 많았다. 국경 밖에서 항쟁하는 나약한 게릴라 따위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제국 내에선 안정되지 않은 황권과 신권, 귀족세력 사이에선 보이지 않는 냉전이 유지되며 끊임없는 교체가 일어났다.

제국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호족은 그럴듯한 본거지를 갖추게 되었고 열심히 훈련시킨 전사들은 제국군과 맞부딪혀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웃음을 바라보며 그들은 희망이란 여신의 옷자락을 엿보였다.

“당신이 지도자입니까?”

“그래. 내가 호족 전사들의 왕 ‘호세 타이겔’이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라.”

왕, 호세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대응했다.

타오르는 분노와 반대로 눈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어찌하면 제국민들을 해치는 일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멈춰야 하지?”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더 신경에 거슬렸다.

소년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전쟁을 애들 다툼 말리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희 제국은 우리의 땅을 빼앗은 적이다. 적이 적을 섬멸하는 것에 이유가 더 필요한가?”

“영토전쟁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니 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말뜻을 이해한 호세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을 날렸다.

“그 오만한 눈엔 민족의 결의가 그리도 우스워 보이는가!”

쇄액!

호세의 창은 빨랐다.

태어나자마자 분쟁에 노출되어 강한 힘을 목표로 훈련에 몰두하며 자라온 그였다.

호세 타이겔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부친을 잃고 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벌써 십이 년째, 그는 그리폰에 올라 창을 들고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노련한 장수로 성장했다.

설움과 살육으로 다져진 창끝이 매섭게 날아들어 적의 목을 단숨에 꿰뚫으려던 찰나였다.

번개같이 그 사이에 끼어든 날붙이가 창을 가로막았다.

쩌엉!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코앞에서 방향이 비틀려 목옆으로 지나친 창대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참, 녀석도. 보통이 아니로세그려.”

“……보통이 아닌 건 네놈 쪽이지.”

왕은 허무하게 중얼거리면서 창을 거두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동료가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달려들다니.

성급했다. 저 소년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자꾸 본래 페이스를 잃는 기분이었다.

호세의 시선이 자신의 창을 막아낸 검은 머리 청년에게로 힐끗 옮겨갔다. 어느 틈엔가 양손을 속박했던 밧줄을 풀고 소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호세의 창을 쳐 내는 데에 사용한 건 대단한 무기가 아니라 겨우 소매 안에 숨겨 두었던 작은 단검이었다.

“이건 경고인가? 아니면…….”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걸 들은 호세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뭐라?”

“누구의 명도 받지 않았으며 아직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았으니.”

부드럽지만 그는 결코 유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공포나 불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쥬다스는 이 가운데 철저히 우위에 선 강자였다.

“나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호세는 이제야 자존심 강한 그리폰들이 그의 발치에 엎드린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옙, 쥬다스는 조련사가 맞습니다.

정령+동물+인간 종합조련사..쿨럭....농담입니다;;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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