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40화 (14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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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불가항력

“루바르잔…… 제국의 황태자라고?”

왕의 음성이 어린애 손가락 사이에 낀 잠자리날개처럼 볼품없이 떨렸다.

왕 자신조차 그 떨림의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소개에 황당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제국의 차기 군주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그런 엄청난 존재가 국경지대의 사소한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몸소 행차했다는 사실이 못내 우스워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적장의 피를 이은 후계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심장이 뛰는 걸지도.

호세는 복잡한 머릿속을 긁어내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몇 번이고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국은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 신경이 쓰였다면 아예 군대을 보냈겠지. 어째서 황제의 후계가 이런 곳에? 정말로 명을 받고 온 게 아니란 말인가?’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호세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저 소년의 여유는 허세가 아닌 진짜배기였다.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있는 건 함께 묶여 있던 제국군 마빈이었다.

‘조련사 아니었어?!’

마빈은 차마 소리 내어 지적하진 못하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태자 전하의 외향은 은발에 금안으로 유명하시다고. 아무리 지금 상황이 암울하다지만 간도 크게 황족 사칭이라니……!’

중범죄 중에서도 엄벌로 다스리는 범죄였다.

황족을 사칭하는 자는 단순 징계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그 대상이 황제의 후계정도 된다면 본인의 목은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자들의 목까지 모조리 날아갈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마빈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장은 이미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지도자에겐 피지배층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와 호세가 그에 응대해야 할 이유를 동시에 짚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호세의 흥미를 끄는 데에 성공했다.

왕은 흉흉한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답했다.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울 의무도 있지.”

“안전과 자유, 당신에겐 둘 중 어떤 것의 가치가 더 큽니까?”

“물론 자유다.”

호세의 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라는 멸망했지만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설령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위해 항쟁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물려받은 호족의 정신이며 앞으로도 후세에 이어질 피의 맹세였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 자유란 무엇입니까?”

“……?”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호세가 멈칫하자 쥬다스는 한 번 더 풀어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되면 ‘자유를 찾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호족의 지도자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피 끓는 투쟁심과 복수심은 가슴 깊이 품고 있었지만 그 염원이 이루어졌을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네놈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면…….”

“땅을 되찾는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그건.”

호세는 이게 뭐지 싶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요구한다고 다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굳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도무지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정작 경계 어린 눈초리를 받는 쥬다스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호세가 다시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가 살아갈 땅을 되찾는 것. 그래, 지금 네놈들이 국경이라 칭하며 깎아 길을 내고 갈아 밭을 만든 그 땅 말이다. 우리에게 이 싸움은 너희 침략자들 생각대로 단순한 영토전쟁이 아니야. 지금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적어도 먹고 사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본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갖춰 다시 호족의 이름을 되찾는 걸 뜻한다.”

말하고 나니 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이는 희망에 대한 갈증이 목구멍을 까끌까끌하게 뒤덮었다.

그 순간 멀리서 와 하는 소란이 일었다.

다른 전사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부관이 다급하게 이를 전달했다.

“제국군입니다! 현재 거점을 포위! 섣불리 선제공격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기세가 지금까지와 사뭇 다릅니다. 고위마법사에 기사, 드래곤까지 한 패로 나타났다 합니다.”

드래곤이란 말에 에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마도 그건 진짜 드래곤이 아니라 플루비일 것이다.

그 사실은 쥬다스와 에단, 두 사람밖에 짐작하지 못하는 부분이었기에 다른 이들의 표정은 적아 구분 없이 하얗게 질렸다.

‘제법 대처가 빨라졌군.’

에단이 속으로 수하의 신속함을 칭찬하는 사이 정예전사들이 왕에게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저희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피신하십시오.”

호세의 입가가 비릿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수하들에게 손을 뻗어 저지한 후,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쩔 텐가? 이렇게 몰래 숨어들어와 본거지를 알아내 일망타진이라도 할 계획이었나? 명심하라, 오만한 제국이여.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너희가 빼앗아간 터전을 돌려받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으리란 이 말이다.”

“흠. 정리하자면 살아갈 땅, 사용할 자원, 그리고 안전이 보장된다면 싸울 이유가 사라진다고 이해했습니다. 맞습니까?”

기껏 비장하게 선언했는데 돌아오는 건 자신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한 문장이었다.

상대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지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협상을 제안합니다. 옛 명예를 버리고 대신 제국 휘하의 자치권을 택하십시오.”

그 말에 포로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번졌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제국의 밑에 속하기만 한다면 일정 영토를 내어주고 자치권을 내어준다. 법적으로는 지배하되 호족의 민족성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도리어 제국의 강대한 힘으로 보호를 받는다.

멸망한 나라를 위해 선뜻 내거는 협상 조건치고는 지나치게 후했다.

제안을 받은 호세도 놀라 눈을 찡그렸다.

“지금 우리를 제국의 자치령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인가?”

“자세한 사항은 조절이 필요하겠으나, 그렇습니다. 새 이름을 받아 새 땅에서 당신의 민족을 돌보십시오.”

침묵이 감돌았다.

기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잡혀온 자가 잡은 자에게 선심을 베푼다.

도리어 호세 자신이 밧줄에 묶인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잡혀온 포로들은 물론이고 무릎 꿇은 호족의 정예전사까지 자리에 얼어붙었다.

쥬다스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을 지나 무겁게 닫혀 있던 말문이 열렸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뭐지?”

“제국민의 안전입니다.”

“거절한다면?”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비로워 보이지만 적진의 깊은 곳까지 직접 찾아왔을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 자였다.

만약 거절한다면 두 번의 자비는 없으리라.

호세의 예상대로 쥬다스는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우하나 그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백 년 전 내 선조를 찾아온 이가 당신이었더라면.”

호세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모든 게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텐데.”

“…….”

“어쩌면 우린.”

콱, 날선 창끝이 쥬다스를 겨누었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금안을 보며 호세는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분노와 혐오감 대신 포기를 담은 창날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당신이 이해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만큼은 절대 원수의 발밑에 무릎 꿇을 수 없소. 선대가 흘린 피를 기억하는 이 창을 쥐고 있는 한!”

얼핏 협상 결렬처럼 보였으나 거절은 표면적일 뿐이었다.

그는 호족의 마지막 왕으로서 모든 명예와 책임을 짊어지기로 했다.

죽는 것은 왕 하나다.

왕이 죽으면 명분을 잃은 호족들은 자연스레 제국의 밑으로 모일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자들은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땅과 자치권을 받고서 살 수 있게 된다.

솟구쳐 올랐던 창은 방향을 틀어 다루는 자의 가슴으로 내리꽂혔다.

파앙!

그 순간 옷을 찢고 살에 맞닿았던 창날을 멈춰 세운 건 갑작스레 주변을 휘감은 녹색 바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막에 부딪힌 창끝에서 파생된 바람이 잔물결처럼 퍼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성급하군. 옛 명예를 버리란 주군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에단이 강한 힘으로 창대를 쳐올렸다.

고작 단검 따위에 부딪혔을 뿐인데 창은 호세의 손을 떠나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곤 한참 뒤에  풀밭에 푹 꽂혔다.

텅 빈 손아귀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호세를 향해 에단이 툭 내뱉었다.

“창을 놓쳤군.”

“이……!”

“선대가 흘린 피란 그 정도 무게였던 모양이지.”

“나를 농락하는 것이냐!”

“정녕 민족을 생각한다면 지도자로서 끝까지 책임을 져라.”

“……!”

“살아서.”

수치심에 주먹을 떨던 호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신의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적을 향해야 할 날이 모조리 무기를 든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음까지 따를 작정이었단 말이냐.’

실망이 가득할 줄 알았던 호족전사들의 눈에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굳은살처럼 박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전사들을 이끈 왕이었다.

그가 죽음으로 책임을 다한다면 그를 따르는 전사들 역시 망설이지 않고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호세는 가까워지는 제국군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쟁의 끝.’

불가항력이다.

선대가 민족을 위해 항쟁을 선택했듯 지금 그의 선택 역시 다른 길 따위는 없었다.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자 경배하듯 엎드린 그리폰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나비가 아니라.’

자세히 보니 나비로 보일 만큼 작은 정령들이었다.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노을도 가라앉은 저녁이었다. 어둠이 내린 시각에도 주변이 낮처럼 환했다.

호세는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파란색 돌고래를 보았다.

“허…….”

한숨인지 경탄인지 모를 긴 숨결이 코끝으로 흘러나왔다. 호세는 생각했다.

수백, 수천의 전사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이 전쟁은 이미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그가 바란다면 전쟁이 아니라 설령 하늘의 분노라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쥬다스의 곁에는 어느 틈엔가 자연계 4속성의 정령들이 실체화해서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그리고 정령왕의 기운을 감지한 자연의 하급정령들도 주변에 몰려들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호세는 쥬다스가 그저 값싼 싸구려 동정이나 허황된 자비가 아닌 진실로 협상을 원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는 어리고 유약하였으나, 실로 현명하고 자비로운 강자였다.

털썩!

호족의 왕은 제국의 차기 군주를 향해 진심으로 무릎을 꿇었다.

비로소 길었던 국경 분쟁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걸로 16장 에피소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 '17장. 마녀사냥'이 시작됩니다.ㅎ

3월도 1/3이 지나갔네요. 날씨도 완전히 봄이 되었습니다. 미세먼지는 많다지만요..ㅠ.ㅠ 다들 건강 잘 챙기시고,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ㅎㅎ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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