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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마녀사냥
에단 R.헤이가가 단장으로 이끄는 황태자친위기사단은 명령의 우선권이 그들이 모시는 주인에게 있다.
평소에는 단장의 지휘 아래 쥬다스를 철통같이 지키는 호위 임무가 주된 역할이지만 별도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는 즉각 그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명을 받은 기사단이 습격당한 베르디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왔을 때까지 쥬다스와 에단은 자리로 복귀하지 않았다.
모시는 주군에 더해 단장마저 함께 부재중인 경우 기사단의 통솔권은 부단장인 바이칼에게 넘어간다.
바이칼은 일정 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더 기다리지 않고 수색에 나섰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콜에게 위치 정보를 얻어 막 출발하려던 찰나 마침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린 군대와 마주쳤다. 목적지는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쥬다스가 호족 주둔지에서 마주친 마빈 등 군인 출신 포로들은 적진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침투시킨 병력이라 하였다.
백 년간 분쟁을 이어오며 제국군도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때론 스파이를 심기도 하고 이번처럼 포로를 가장해 위치를 알아오는 등, 적의 동선을 파악하였으며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이칼의 대처는 베르디의 군사작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한뜻을 품은 그들은 함께 적진을 찾아가 동서남북 포위망을 짜고는 불시에 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온통 전의를 상실한 호족전사들 사이에서 무릎 꿇은 적장을 발견했다.
“그땐 진짜 놀랐다니까요. 거 이번엔 또 무슨 새로운 함정인가 싶었습니다.”
다각다각 말을 몰며 바이칼이 투덜거렸다.
정상끼리 협상이 끝나자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린 전투를 맞닥뜨리고 놀란 건 제국군뿐이 아니었다.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들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정령들을 둘러보며 ‘자연계 4속성 정령을 다루는 루바르잔 황태자’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특히 쥬다스에게 친한 동네 형처럼 굴던 마빈의 경우 충격과 공포에 빠진 눈으로 끝까지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너, 네가, 아니. 이봐! 대체 진짜 정체가 뭐야…… 요?’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을 바라본 쥬다스는 그저 웃으며 작게 목례했다.
‘합석, 즐거웠습니다.’
벙찐 마빈을 두고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때를 회상한 바이칼이 여전히 구겨진 표정을 펴지 않자 그보다 조금 앞서가던 에단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무슨 득볼 게 있다고 자네 앞에 함정을 파겠나.”
“아, 씨…….”
“씨?”
바이칼은 지금껏 살며 단 한 글자에서 섬뜩한 한기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생활 속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는 단장은 어느 틈엔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기를 넘어 살기까지 넘실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피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린 바이칼이 말을 고쳤다.
“씨…… 앗 같은 신입기사도 아니고 단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러셔도 되느냐고요.”
“새싹도 아니고 씨앗인가.”
진지하게 다른 포인트를 짚는 에단의 대답에 바이칼은 빠직 표정을 구겼다.
“단장이라도 말리셨어야죠. 거기서 홀랑 같이 포로로 잡혀가십니까?”
“전하의 명이셨다. 그래서 자네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나.”
“뭐요? 그럴 거면 애초에 뒷일까지 싹 말씀을 해놓고 가십시오!”
결국 답답함이 폭발했다.
불만 어린 외침에 에단은 다시 절도 있는 태도로 ‘그런 건 눈치껏 해라’라고 말하여 바이칼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뒤에서 권태기부부마냥 아옹다옹하는 소리를 들으며 태연스레 제 갈 길을 가는 쥬다스에게로 콜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시는 거지요?”
“하하. 예, 스승님.”
“……지금 웃고 계십니다, 쥬다스 님.”
“이런. 들켰습니까?”
보란 듯 웃어놓고 시침 떼는 어린 스승을 보며 콜이 난처하게 입가를 씰룩였다.
“상의 없이 움직인 점은 아주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시진 않으시는군요.”
“돌이킬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족은 자신들의 영토를 고스란히 돌려받지는 못했다.
국경 땅의 일부에서 그리폰들과 함께 새로운 영역과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장은 제국에서 제공하는 교육이 우선이었다. 제국 휘하의 자치령으로 인정하는 대가는 황실에 대한 충성이다.
당분간은 중앙관리처에서 파견된 자들이 호세와 그의 부족을 관리할 것이다.
쥬다스는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어느 정도 지켜보다 조용히 국경지대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일행은 국경을 넘어 동쪽나라 해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에 들어서 있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
해동은 산맥이 많은 나라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국경을 넘자마자 산이 나타났다.
이 산맥만 넘어가면 드디어 해동의 초입이다.
쥬다스는 주변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와 풀들을 가리키며 어린아이같이 감탄했다.
“겨우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나무 생김새부터 다릅니다.”
제국의 따뜻한 기후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은 주로 잎이 넓고 커다랗다.
나뭇가지도 큼직큼직하여 곧게 뻗었으며 대체로 키가 시원스레 컸다.
하지만 동방의 나무들은 이와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일단 나무들이 전체적으로 키가 작아 아담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쉬이 부러지거나 찢겨지지 않는 견고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파리는 길고 뾰족한 것이 많았으며 화려한 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원래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는 환경에 따라 생긴 게 조금씩 달라. 그 본질은 다르지 않지만.」
유니가 바람을 일으켜 나뭇잎을 우수수 흔들었다.
장난스런 바람을 타고 막 피어오른 새 이파리와 함께 연보라색 꽃 한 송이가 춤추듯 산들산들 하늘로 날아올랐다.
산길을 따라 죽 이동한 그들은 저녁 무렵 산등성이에 있는 한 사냥꾼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곤 하나 규모는 작았다.
건물도 몇 채 없었고 그나마도 주점이나 식당 등이 전부였다. 사실상 해동으로 넘어가는 여행객들이나 사냥꾼들이 간단한 숙식을 해결하며 정보를 교류하는 일종의 휴게소였다.
이 마을에 가족들을 데려와 거주하는 자는 드물었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사냥꾼들이 연합을 이루어 생계활동을 하는 중심지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했다.
그래도 일단은 팻말에 ‘사냥꾼마을’이라 적혀 있긴 하였다.
쥬다스는 말을 쉬게 할 겸 마을 밖에 세워두고 주점으로 향했다.
“어서 옵~ 셔허! 6인 이하 손님만 실내로 입장 가능하셔라. 대인원은 바깥에서 드쇼잉!”
주점은 실내와 실외 모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선선한 봄 날씨에 사람들은 대인원이 아니더라도 주로 실외에 불을 지피고 늘어앉았다.
실외공간은 바처럼 길게 이어진 테이블을 따라 주르륵 앉는 형식이었다.
길고 투박한 나무 테이블은 음식 얼룩이 져 지저분했지만 갓 잡은 짐승 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냥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크, 시원하구만! 한 동이 더!”
“누님! 여기 장작 떨어졌소.”
가게주인만 바빴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지피고 빈 그릇을 치우면서 한편으로는 또 술동이를 나르는 손길이 마치 마법 같았다.
쥬다스 일행은 자연스레 실외에 늘어선 기다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식사를 해결할 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자 들린 셈이었다.
여행객과 사냥꾼이 뒤섞인 주점에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나도는 소문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해동은 다행히 제국어를 배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 같군요.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습니다.”
“혹시 몰라 주변국 언어를 전부 익혀놓긴 했습니다만.”
“……아니, 그걸 다 익힐 틈이 있었다고요?”
바이칼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질문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미리 독학했다.”
“외국어 몇 가지쯤 익히는 건 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외국어이라 하나도 채 익히지 못한 바이칼은 똥 씹은 표정으로 두 천재를 바라보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익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 타국의 언어를 모른다고 해서 기 죽을 필요는 없단다.”
지켜보던 쥬다스가 시무룩해진 바이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저 아이들이 있어 아마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을 겪을 일은 없겠구나. 그렇지?”
“예, 뭐…….”
범접할 수 없는 천재는 오히려 이쪽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주군에게 언어의 장벽을 느끼게 할 국가는 없을 것이다.
쥬다스라면 외국어는 물론이고 외종어(外種語)에 외계어까지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모르는 언어가 있어도 즉석에서 언어규칙을 찾아내어 암기하시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바이칼은 복잡한 얼굴로 주스만 홀짝였다.
마음 같아서는 술이라도 벌컥벌컥 들이붓고 싶었지만 호위임무 중에는 절제가 필요했다.
더구나 곧 다시 말을 타야 하기 때문에라도 음주는 곤란하다.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플루비가 긴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삐이?”
“왜, 배고프냐. 같이 먹을래?”
바이칼은 플루비에게 자기 몫의 닭고기 수프를 넘겨주었다.
행복한 얼굴로 꼬리까지 살랑이며 수프를 핥는 플루비를 빤히 쳐다본 그는 피식 웃었다.
“짜식, 그래. 많이 먹어라. 나한텐 너뿐인가 보다.”
바이칼이 와이번에게 수프를 넘기고 주스와 짭짤한 치즈로 입맛을 달래는 사이 쥬다스는 어느 틈에 또 넉살좋게 주변 대화에 끼어들고 있었다.
“해동으로 간다고? 꼬마야, 충고 하나 해주지. 캄캄한 밤엔 산을 타지 마라.”
“어둔 시각이면 산행에 특별한 문제라도 있습니까?”
팔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덩치 큰 사냥꾼의 말에 근처에 앉은 다른 사내가 킬킬대며 동조했다.
“정말 못 들어봤소? 큭큭, 이곳 피리네오스 산맥에서 ‘밤의 마녀’이야기는 유명한데.”
“뭘 또 그렇게 재수대가리 없이 쪼개나. 외지인들은 모를 수도 있지.”
“아, 성님. 내가 언제 재수대가리 없이 웃었다 그러시오?”
억울한 듯 항변하는 사내를 향해 에단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밤의 마녀 이야기가 뭡니까?”
“마녀 말이요, 마녀. 댁들같이 순진한 여행객들이 밤중에 돌아다니면 무서운 마녀한테 잡혀간다 이 말이지.”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일행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일부러 외지인을 놀리는 건지 알기 위해 분위기를 살폈다.
“무조건 마녀가 나타난다는 건 아니고. 밤중엔 길눈이 어두우니까 잘 헤매게 되잖소? 길을 잃고 떠돌다보면 멀리서 불빛이 하나 번뜩번뜩.”
“그게 바로 마녀의 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지.”
“아, 지금 밤의 마녀 얘기요?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그 미모가 매혹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다더군. 들려오기론 인간이 아니라 하지 아마. 눈이 멀 미색으로 홀려 사람을 잡아먹고 성에 그 해골을 장식하는 게 취미라고.”
공통의 주제가 나오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느덧 마녀에 대한 소문은 이것저것 살이 붙어 제법 구체적인 수준까지 나돌고 있었다.
“게릭 씨도 최근에 당했다 하지 않았소?”
“말도 마! 그때 생각만 하면 내 숨통이 붙어 있는 것에 기도를 드리게 된다니까.”
“응? 실제로 잡혀갔다 살아 돌아오셨단 말씀이십니까?”
한창 이런 이야기에 약할 나이인 세이지가 불안함이 가득 일렁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 순진한 표정을 본 사냥꾼들은 껄껄 웃으며 짐짓 겁을 주기 시작했다.
“그 밤의 마녀가 얼마나 괴팍한지 몰라. 천사 같이 눈부신 외모로 사람을 홀린다지. 하지만 그 외모가 사실은…… 천사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는 거야.”
“네? 껍…… 데기?”
“본래는 엄청난 추녀인데. 사람을 홀리려고 위장을 하고 있지 뭔가. 밤에 사람들을 잡아다 배불리 먹이고 재운 후, 날이 밝으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먹는다더군. 살점은 쭉쭉 빨아먹고 뼈는 남겨 장신구로 쓴다지. 밤중에 먹인 음식도 알고 보면 거미에 지렁이, 각종 악충들이 득시글!”
이야기해 주던 사내가 손아귀를 펼쳐 벌레다리처럼 조물거리는 탓에 세이지는 헛숨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중간에 담당하시는 선생님과 착오가 생겨서 업로드가 하루 늦어졌습니다.ㅠ 죄송합니다!(꾸벅)
'17장. 마녀사냥'은 해동에 도착하기 전 쉬어가는(?) 에피소드입니다. 이후엔 스토리가 좀 진지하게 진행이 될 예정이라... 핫핫.
어찌어찌 또다시 불금이 돌아왔네요. 크, 벌써부터 설렙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 좋을까요 고기가 좋을까요...! 두근두근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