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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마녀사냥
요정족 픽시.
지금은 전설로 남은 드래곤들이 용계로 떠난 시점에 이미 멸종되었다 알려진 고대종족이다. 성향은 자연계 정령과 비슷하지만 정신체인 정령과 달리 육체를 타고난다는 점에서 달랐다.
픽시는 평화와 고요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그들은 생태계 법칙상 일어나는 약육강식조차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살생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피와 살생에 민감하여 작은 다툼만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피이 몸에 닿으면 불이 붙은 나무처럼 온몸이 붉게 물들어 열이 나다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픽시는 누구도 피 흘리지 않고 수백 년간 순결하게 보존된 땅에서 자란 나무에서만 태어난다.
나무의 주변은 조용하고 위협이 없어야 하며 맑은 물이 흘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탄생 조건이 까다로워 픽시가 열리는 나무는 몹시 드물었다.
바스락.
그때 맞은편에서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나타난 건 새카만 검은 로브를 칭칭 두른 작은 여성이었다.
「저 아인가 봐요.」
「흐응, 확실히 남다르긴 하다. 패션 센스가 어마어마하게 난해하네.」
아직 성장기인 세이지보다도 한 뼘은 더 키가 작았다.
몸은 그렇게나 작은데 두르고 있는 로브는 지나칠 정도로 품이 넓고 커서 움직일 때마다 깃발처럼 펄럭였다. 거기에 액세서리랍시고 목에 건 해골목걸이가 덜렁거렸다.
거기에 또 머리엔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사람이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삼킨 모양새였다.
본연의 모습은 어느 것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어깨선을 따라 하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팬지꽃처럼 선명한 보라색이다.
바로 사람들이 찾아왔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돌아온 집주인이었다.
품안 가득 밀가루며 초콜릿 등이 담긴 자루를 끌어안고 나타난 그녀는 땀 흘려 일한 농부처럼 뿌듯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란 정말 아름다워!”
“…….”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신만의 감상에 젖어 있는 그녀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잔뜩 긴장해 있던 세이지가 얼떨떨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혹시 밤의 마녀……?”
“흐억!”
평온한 자태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온 햇살을 만끽하고 있던 마녀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안고 있던 자루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것저것 가득 집어넣어 입구를 여미지도 못한 자루는 온갖 식재료를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밀가루며 치즈덩어리, 초콜릿, 그리고 사탕알갱이 따위가 풀밭 위로 데굴데굴 굴렀다.
“왜, 왜 여기에.”
마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팟 물러섰다.
‘집 앞에 웬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지금까지 한 번도 누가 찾아온 적 없었는데!’
살면서 처음 겪는 상황인 탓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쥬다스 일행을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어버린 마녀가 이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겁먹고 주춤거리는 마녀를 향해 에단이 먼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잠시만…….”
“엇? 저 녀석 도망치는데요!”
마녀는 그들이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홱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수풀더미가 잔뜩 우거진 산에서도 그녀는 한 마리 족제비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녔다.
‘무서워.’
인간은 그녀를 싫어한다.
누구든 그녀의 지금 얼굴을 보면 소리 지르며 도망갔다.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 부르며 적대시했다. 심지어 죽이려던 자도 있었다.
‘하다못해 지금이 밤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처럼 무작정 달아나지 않았어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었다.
해가 뜬 동안의 얼굴과 달이 뜬 동안의 얼굴.
그 둘은 판이하게 달라서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함께 달라졌다. 환한 대낮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야만 했다.
슈르륵 슈륵.
마녀는 나무를 조종해 가지와 잎사귀를 자라나게 한 후 그 사이에 몸을 숨겼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씨앗 형태부터 시작하여 아름드리 거목까지 모든 식물은 요정족인 그녀의 명령을 잘 따랐다.
카멜레온처럼 식물 틈에 몸을 숨겨버린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마녀는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무슨 꼴이람.”
너무 놀라 심장이 펄쩍펄쩍 뛰었다.
사람이 그녀의 집을 찾아온 건 처음이라 일단 줄행랑치고 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후회가 들긴 했다.
‘나쁜 사람들 같진 않던데.’
무기를 소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를 향해 꺼내 들지 않았다.
마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이야기라도 들어볼 걸 그랬나…….”
“많이 놀랐나 보구나.”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
언제부터였는지 그녀의 곁에 누군가 함께 있었다.
“끄아악!”
마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는 물론이고 균형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손이 바닥을 짚으면서 흙투성이가 되었다.
알싸한 통증이 손바닥을 얼얼하게 뒤덮었다.
“진정하련. 우린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란다.”
그녀의 눈앞에 천천히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따뜻하게 빛나는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꼭 보석 같다.’
멍하니 생각하던 마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흙투성이 손을 힘 있게 잡아당겨 일으켜 세워준 쥬다스는 아이 다루듯 그녀의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주기까지 했다.
픽시의 본능은 위협적인 인물과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해 내는 데에 탁월하다. 그녀가 보기에 쥬다스는 전혀 위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보고 있자면 공포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갈 생각을 버린 마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누구?”
“쥬다스라 한다. 루바르잔 제국에서 해동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만.”
“그럼, 여긴 왜 왔어? 어떻게 왔어? 혹시 길을 잃은 거야?”
쥬다스는 차분히 마녀를 응시했다. 그리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너를 만나러 왔어.”
“나, 나를……?”
모든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에 누군가 찾아오는 것, 낮의 자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거나 공격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 어린아이를 달래듯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도 전부.
마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가,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는 먼저 이름을 소개하는 거란다.”
“…….”
“네 이름은?”
“……란.”
자신을 란이라 소개한 소녀는 힐끔 쥬다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 란아.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게 한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란은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등 돌려 달아난 것 역시 미안한 일이라 생각했다.
「거 보라요! 픽시가 맞다요!」
「응, 맞네.」
그사이 토니는 란에게 날아가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유니도 일단 수긍하긴 했지만 미심쩍은 눈으로 토니를 따라 날아들었다.
「근데 어딘가 좀 이상한데…… 뭐지?」
란은 문득 근처를 감도는 맑고 깨끗한 기운을 느끼고 아 하고 깨달음의 탄성을 질렀다.
“굉장해.”
“응?”
“정령왕의 술사였잖아?”
인간과 다르게 식물에서 태어난 픽시는 자연계 정령들과 친숙했다.
실체화하지 않으면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일반인들과 같았지만 적어도 정령들이 품고 있는 기운이나 힘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읽어냈다.
란은 무척 신기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살면서 정령왕은 처음 봤어. 뭔가 익숙하면서도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뭔가 싶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술사가 직접 드러내지 않는 이상에야 실제 정령등급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란은 황실의 수준급 정령술사들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단박에 맞춰 버렸다.
쥬다스는 적잖이 놀라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요정족 픽시. 자연에 한없이 가까운 종족이라고는 들었지만. 과연 정령의 기운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구나.’
그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어색하게 머리에 손을 올리던 란은 그제야 모자가 벗겨졌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질렸다.
“으아아.”
낮 동안의 란은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게 된 결정적인 모습이었다.
옴팡진 두 눈은 서로 가까이 몰려있으며 피부는 악어가죽처럼 거칠거칠했다.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며 기다란 귀는 볼품없이 축 쳐졌다. 손톱발톱이 짐승처럼 길었고 이빨은 누랬다. 그런 와중에 키는 열 살 소녀만큼 작았다.
란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색 고깔모자를 냉큼 주워 들었다.
그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게 아니라 덮어서 추한 얼굴을 가리는 용도였다.
“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음. 확실히 놀랍긴 하구나.”
쥬다스는 고깔모자를 푹 눌러쓴 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의 기운을 그리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줄이야. 대단해.”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그거 외에 또 놀랄 것이 있냐고 묻는 듯한 태연한 표정을 마주한 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거나 뭐 그런.”
“…….”
“아. 정령왕의 술사니까 무서울 리는 없겠네.”
쥬다스는 시무룩하게 혼자 결론을 내리는 란을 보며 난처하게 웃었다.
“이런,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냐.”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로?”
“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란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으응.”
“너는 무서운 아이가 아니란다.”
신기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마녀’나 ‘괴물’ 따위로 불렀다.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와 이름을 부르고 평범한 아이 대하듯 해준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을 구해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란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침묵했다.
스르륵 스륵-
그녀를 숨겨주고 있던 나무와 풀들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란 스스로 숨는 걸 그만둔 탓이었다.
란은 폴짝 뛰어 수풀 밖으로 나왔다.
“근데 나 아가 아니야.”
쥬다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뿐사뿐 흥에 겨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되돌아가며 란이 쫑알쫑알 떠들기 시작했다.
“올해로 딱 오십 년. 내가 나무에서 태어난 이후로 흐른 시간이야.”
고대종족 픽시의 수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는 다른 세월을 살아가리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십 년이라. 그랬구나.”
란의 항변에도 쥬다스는 그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당최 놀라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를 접한 란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
어쨌든 전생에서 아흔이 넘도록 살아온 그가 보기엔 쉰 살도 아가는 아가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부 들어오면서 말투는 조금 변했지만 속은 여전히 할아버지...(..)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어김없이 월요일이 돌아왔네요. 우어어...
이번 한 주도 힘차고 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