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44화 (14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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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마녀사냥

그다지 멀리 도망쳤던 건 아니었기에 금방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앞서가던 란은 여전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발견하고 점점 걸음이 느려졌다.

자연계 정령왕의 계약자인 쥬다스에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아직 무서웠다.

란의 겁먹은 표정을 읽어낸 쥬다스가 함께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안심하련.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단다.”

그는 발밑에 떨어져 있던 물건을 주워 내밀었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나 보구나.”

허겁지겁 달아나느라 떨어뜨린 초콜릿이었다.

멍하니 그걸 받는 사이 에단이 나머지 식재료를 깔끔하게 정돈해 둔 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터진 밀가루는 최대한 흐르지 않게 담아 봉해 두었습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알뜰하네…….’

란은 저 귀티가 흐르는 기사가 밀가루를 주섬주섬 주워 담는 장면을 상상하다 풋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제 웃음소리에 놀라 합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에단은 그녀의 웃음에는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자, 서로 인사들 나누거라.”

“란이야.”

조금 전 처음 사람을 만날 때엔 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라던 쥬다스의 조언을 떠올린 란이 냉큼 자기 이름부터 밝혔다.

그제야 에단은 짧게 목례하며 화답했다.

“에단.”

“여, 네가 그 소문의 마녀냐?”

불쑥 끼어든 바이칼의 직설적인 질문에 에단이 검집으로 그의 머리를 빡 내려쳤다.

“아! 아프잖습니까!”

“무례다. 인사를 나누랬지 언제 막말을 하라하셨나.”

“막말하려던 건 아닌데요. 마녀를 마녀라고 하지 그럼…… 윽!”

바이칼은 머리에 혹 두 개를 달고 나서야 나불거리던 입을 멈췄다.

다른 일행들이 한 명씩 인사를 마친 후에야 그는 화끈거리는 정수리를 부여잡고 사과했다.

“이봐, 기분 나빴으면 미안. 난 바이칼이다.”

멀뚱히 그가 악수를 청한 손을 쳐다보던 란이 고개를 돌렸다.

“흥.”

“어어……?”

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바이칼을 세워둔 채 곁에 있던 쥬다스의 손을 탁 붙잡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 이봐?”

“이봐가 아니라 ‘란’이거든?”

벌처럼 쏘아붙인 란의 목소리에 바이칼이 찔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홱 돌아본 란이 싸늘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똥멍청아.”

“……?!”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 뒤따라가던 쥬다스는 아이들 다툼을 지켜보는 어른처럼 소리 죽여 웃었다.

집이 지어진 나무 밑까지 다가간 란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의지에 따라 나무줄기가 콰드득 자라났다.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자라나던 줄기는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땅까지 연결되고 나서야 멈추었다.

란이 만들어낸 건 사람이 충분히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그물사다리였다.

“이것도 정령의 힘인가요? 식물이 특정 형태로 자라나다니.”

세이지의 감탄에 란은 그물사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난 요정족 픽시야. 식물이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픽시?”

이미 오래 전 멸종한 고대종족 픽시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쥬다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픽시라는 종족명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식물을 다루는 건 내 본연의 힘이야. 열매를 맺게 하거나 본래 씨앗 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하거나.”

“놀라운 능력이네요.”

“아니면 말려죽일 수도 있어.”

생명은 물론 죽음까지도 관장한다.

그 말을 들은 세이지는 섬뜩하여 입을 다물었다.

요정 픽시란, 식물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치 숲의 여왕과도 같다.

“……나는 마녀가 맞아.”

란은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키워준 사람을 잡아먹고 태어났거든.”

좌중이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란은 그런 반응에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먼저 사다리를 탔다.

“어쨌든 기왕 여기까지 찾아온 거 차라도 한잔 대접할게. 마시고 가.”

“란.”

쥬다스가 그녀의 곁에 함께 그물을 잡고 올라왔다.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죽은 건 네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겠구나.”

“아? 으응. 그 사람은 내가 아직 열매일 적에 죽었어.”

열매 속에서 자라고 있던 란이 양분으로 흡수한 건 시체였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나무를 돌봐주던 사람이 죽었고 란은 그 시체를 먹었다.

“그렇다면 그건 네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야. 그렇지?”

란은 작고 볼품없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 사람을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몰라. 그때 난 아무 힘도 없는 작은 열매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란 나무를 키워주고 돌봐줬으니까 그 사람은 내 아버지나 다름없어.”

“너는 마녀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사랑했던 예쁜 딸이었구나, 란.”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신기했다. 오십 년간 자신이 마녀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듣고 보니 마음이 들썩였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쥬다스는 란의 추한 얼굴도, 괴물 같은 속내도 그 어느 하나 외면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다. 오히려 똑바로 보았으면서도, 전부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 사실이 고맙고도 놀라워서 란은 그만 웃어버렸다.

“고마워.”

그물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덜컹 열렸다.

그 덕에 일행은 곧장 란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는 제법 넓었다. 세 명의 호위는 바깥에 남아 망을 보기로 하고 란을 포함해 6명의 인원이 들어갔는데도 비좁음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바닥엔 폭신한 검은 카펫이 깔려있고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도 있었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금방 차 끓여올게.”

의자나 소파가 없었기에 란은 그들을 카펫에 앉게 하고 차를 끓이러 사라졌다.

둥글게 원을 그려 앉은 쥬다스 일행은 집 내부를 둘러보며 저마다의 감상을 표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식품이 많군요.”

“분위기 한번 작살나네요.”

“……좀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는 건가.”

벽을 따라 높고 낮은 선반을 주르륵 연결해 놓았다.

선반 위에는 박쥐나 쥐 등을 박제한 것인지 인형인지 모를 장식품들이 자리했다.

크고 작은 투명한 항아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검은색 액체들이 꿀렁꿀렁 기포를 만들며 담겨 있었고 그 근처에는 사람의 심장이나 뇌 등을 재현해 둔 것도 있었다.

세이지가 쥬다스의 소매를 잡으며 속닥거렸다.

“형님.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아직 란이 무서운 게냐?”

“무, 무서운 게 아니라. 저기 해골이 걸려 있어요.”

액자 대신 해골이 걸려 있었다. 어찌나 실감나게 생겼던지 문드러진 콧등까지 자세하게 보였다.

쥬다스는 동생의 등을 토닥여주며 웃었다.

“가짜란다.”

“정말요……?”

“그럼. 내가 언제 거짓을 말한 적이 있더냐?”

세이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형이 있어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까진 어찌할 순 없었다.

겁먹은 세이지와 반대로 바이칼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해골 하나를 주워들어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근데 란 녀석 말입니다. 저 아무래도 미운털 박힌 것 같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마녀라 부르며 무례를 범했으니 나 같아도 싫겠군.”

“아니 단장……. 이럴 땐 빈말이라도 위로 좀 해주십쇼.”

내가 왜? 라는 뜻을 얼굴 근육만으로 충실히 표현해 내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이 끙 한숨을 쉬었다.

“진짜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고요. 작은 여자애한테 미움받긴 싫은데.”

실제 란의 나이는 50살이 넘었지만 쥬다스는 굳이 그 사실을 짚어주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잘못을 사과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 아이가 주는 차를 맛있게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사과해 보려무나. 아마 란도 그리 깊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게다.”

“옙!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바이칼의 굳은 결심도 란이 가져온 다과상 앞에 카드로 지은 집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 따뜻한 차랑 내가 직접 구운 쿠키야.”

란이 한상 가득 차와 쿠키를 가져와 내밀었다.

컵에서 찰랑이는 정체모를 붉은색 액체를 내려다보며 세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호, 혹시 피…… 는 아니죠?”

“에이, 세이지 님. 설마 피겠습니까? 이런 건 보통 빨간 꽃잎 같은 걸 달여서 만드는 걸 겁니다.”

“응? 피 맞아.”

“푸웁―!”

이미 마시고 있던 바이칼이 분수처럼 피를 뿜어냈다.

“드라키 꽃이라고 집 근처에 흡혈식물이 자라거든. 그 꽃에서 채취한 피는 향긋해서 맛도 좋고 먹으면 어마어마한 스태미나 증가 효과도 있어. 쓰러져 가는 소도 한 잔만 마시면 벌떡 일어난다는 귀한 약재야.”

“욱…….”

한 번도 피를 끓여 만든 차를 마신다는 발상을 해본 적 없는 세이지가 찻잔을 든 채 어쩔 줄 모르고 안색만 노래졌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시큼한 위액이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다로운 식성을 가진 크리스티나는 진즉 설명을 듣기 전부터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쥬다스와 에단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들었다.

란이 두 손을 꼬옥 모으고 감상을 물었다.

“어때? 맛있어?”

“꼭 화차 같구나. 향기롭고 독특한 맛이야.”

“정말?”

“맛있어. 잘 먹을게, 란.”

“……!”

행여나 마음에 들지 않아할까 전전긍긍하던 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드라키 차와 함께 가져온 쿠키쟁반을 들고 얌전히 덮어두었던 덮개를 열었다.

“여기!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쿠키들이야.”

피로 만든 차까지도 그러려니 넘기던 에단의 표정이 비로소 굳어졌다.

‘산 넘어 산이 바로 이거로군.’

에단마저 탄식케 한 쿠키는 일행 모두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만일 ‘쿠키’라고 따로 명명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들을 먹을 것으로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세이지가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버, 벌레…….”

란의 쿠키는 정말 충실하게 벌레를 재현해 냈다.

초콜릿을 넣어서 까만 점박이를 넣기도 하고 치즈와 설탕을 교묘히 굳혀 알 무더기나 가느다란 다리 하나하나까지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거미부터 시작해서 다리가 많은 지네, 날개달린 바퀴벌레나 나방, 곱등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크기도 새끼인 것과 성체, 거대버전 등등 여러 종류였다. 쿠키와 함께 유리병에 담아 내온 젤리는 심지어 눈알모양이었다.

유리병에 가득 담긴 하얀 눈알에는 세밀하게 눈동자색깔을 각각 다르게 새겨 넣기까지 했다.

벌레쿠키와 눈알젤리는 귀족인 그들이 보기엔 견딜 수 없이 흉물스러웠다.

살아 숨 쉬는 듯 생동감 있는 꿈틀거림이 보는 이들의 식욕을 감퇴시켰다.

“히히, 이것도 있어!”

란은 신나서 다른 쟁반도 들고 왔다.

설탕을 녹여 가느다란 머리카락 뭉텅이처럼 해골에 얹어 만든 사탕이나 내장모양으로 빚은 분홍빛 빵 등이 들어 있었다.

벌레쿠키보다 더 혐오스러우면 혐오스러웠지 절대 덜하지 않은 생김새였다.

이제 세이지는 그녀가 완전히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음험한 마녀 같다고 생각했다.

「히이. 무슨 요정이가 저런 걸 좋아한다요?」

「속지 마, 이그레트! 얘 아무리 봐도 요정족 아니야.」

정령들마저도 란의 특이취향에 혀를 내둘렀다.

「으응, 쿠키나 빵은 그렇다 쳐도 픽시는 피를 마시면 열이 들끓어 죽을 텐데. 아무리 식물에서 채취한 피라지만 픽시가 피를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는 란의 정체를 의심했다.

잠자코 있던 푸른 늑대도 고개를 들어 카니의 의견에 동조했다.

「픽시는 오로지 여성체로만 태어나는 식물의 여왕.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종족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특별한 향기와 미형을 가진다. 그러니 저것은 생김새부터 일반적인 요정족이 아니다.」

「일반적이지 않다요? 그럼 뭐다요?」

「아마도 돌연변이겠지. 본래대로라면 픽시는 이미 멸종하여 태어나지 못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간이 키우던 나무에서 픽시열매가 맺혔고, 키워준 인간의 시체를 양분으로 먹고 태어났다.」

루니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쿠키를 집어 든 란에게로 향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픽시이자, 순수한 픽시가 아닌 새로운 개체인 셈이다. 어쩌면 저것을 모체 삼아 새로운 요정족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몰랐는데 화이트데이가 지나갔군요 (!)

외...외전도 못써보고 ㄷㄷㄷ;;

요즘 정말 날짜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ㅠㅠ 사탕들 맛있게 드셨나요?ㅎ 기념으로 박하사탕이라도 먹었어야 하는건데...(?)

지났으니 별 수 없군요.ㅋ

그럼 다음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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