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46화 (14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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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마녀사냥

바람이 전해주는 피 냄새는 몹시 짙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리며 에단에게 상황을 알렸다.

“아무래도 란에게 뭔가 일이 생긴 것 같구나. 되돌아가 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에단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그가 간단한 수신호를 보내자 주시하고 있던 기사단 전원이 말에서 내렸다.

준비가 완료되자 유니가 바람을 일으켜 일행을 중심으로 마법진처럼 원을 그렸다. 한 번 기억해 둔 장소로 곧장 이동시켜 주는 고급정령술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곧 대단위 ‘바람의 인도’가 발동하자 일행은 말까지 포함하여 전원 녹색 바람에 감싸였다.

팟!

강한 기류가 주변을 감싼다 싶더니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불이 저녁하늘을 한낮처럼 밝혔다.

열기가 훅 밀려와 팔로 얼굴을 가린 세이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란의 집이……!”

보랏빛 성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을 보고 놀란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젠장. 란! 어디야!”

바이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청껏 불렀지만 어디에도 픽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쥬다스는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에도 아랑곳 않고 수그려 풀밭을 손으로 훑었다. 진득한 핏물이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핏자국.’

상황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핏물이 채 굳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의 피가 바닥에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집 뒤쪽이야. 근데 지금 상황이, 끄응.」

유니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였다.

“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쥬다스는 곧장 소리가 들려온 집 뒤편으로 달려갔다. 불타는 나무기둥 사이로 불길보다 더 새빨간 핏자국이 낭자했다.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를 돌아보는 보랏빛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게 대체…….”

뒤따라온 일행들 사이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산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카니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픽시는 분명 살생을 싫어하지만, 그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죠.」

끄어억!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피 칠갑이 된 손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자세히 보니 손이 통째로 잘려 날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상자는 차라리 다행인 수준이었다. 주변엔 나무줄기에 감겨 목이 졸리거나 가슴이 꿰뚫려 죽은 시신이 수두룩했다.

시체 한가운데 서 있는 란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멍하니 풀린 눈동자와 칼에 찢겨 흘러내린 옷자락, 곱게 땋았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시선을 홀리는 미형이 춤추는 불빛 아래 드러나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밤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얼굴 아래 풀어헤친 보라색 머리카락과 함께 반짝이는 드레스 자락만 더운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어머나, 제대로 저질렀네요. 보통의 픽시라면 위험을 느꼈을 때 거주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편을 택했을 텐데.」

「애초에 저 픽시를 보통의 범주에 넣어서 보는 건 무리라 생각한다만.」

「그렇긴 해요.」

이미 란은 벌레쿠키를 즐기던 특이한 취향부터 부정할 수 없는 괴짜 픽시였다.

「그치만 이건 이거대로 이상하지. 돌연변이긴 해도 살인을 즐기는 애는 아니었잖아? 혼자 조용히 집 안에 틀어박혀 살던 픽시를 저 정도로 잔뜩 화나게 할 수 있다니.」

「것도 인간들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네요.」

「우웅, 집이 불타버려서 화난 거 아니다요?」

“이, 악마!”

정령들은 떠들다 말고 소리가 들린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란이 무차별학살을 벌인 듯 보이지만 쥬다스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반인이 구하기 힘든 전문방어구에 대인살상무기. 상대가 식물계란 사실을 알고 불을 먼저 질렀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픽시를 노린 자들이로구나.’

그들은 마녀를 퇴치하라는 지령을 받고 온 용병이었다.

란이 정기적으로 거래하던 식재료 상단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 오늘이 거래 날이고 거래 장소와 함께 주로 출몰하는 장소에 대한 모든 정보가 용병단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저 불길하단 이유만으로도 마녀가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은 많았다.

만일 란이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피 흘리고 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체의 목을 계속 조르던 나무줄기가 스르륵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동료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쳐다본 용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순진한 처녀인 척 유혹하더니. 역시 사람을 매혹해 잡아먹는 마녀였군!”

“유혹한 적 없어. 너희가 먼저 내 집을 불태웠잖아.”

“닥쳐라, 이 악독한 마녀!”

“…….”

란은 입을 다물고 남은 용병들을 응시했다.

신비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다르게 눈동자만큼은 밤하늘을 베어다 펴 바른 듯 짙은 검은색이었다.

쥬다스가 중간에 곧장 끼어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녀의 그 눈 때문이었다.

잔에 가득 차오른 물결처럼 파르르 흔들린 검은 눈동자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쥬다스는 그 안에 숨은 상처를 알아보았다.

‘너는 지금 견딜 수 없이 아프구나.’

익숙해졌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인간과 요정이 느끼는 고통은 다르지 않다.

그저 참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었다.

살아 있는 이상, 상처는 누구나 똑같이 아프다.

“……왜 ‘아빠’가 만들어준 내 집을 불태우고, 날 죽이려 했어?”

란은 찢어진 스커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왜 너흰 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거야?”

그녀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란은 살면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깊은 산중 길을 잃고 헤매던 이들을 구해주고 돌려보내는  선의를 베풀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그녀의 기괴한 취향에 놀라 까무러치거나 달아나곤 했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고, 그래서 도와줬다. 마녀라 오해를 사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거기까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존재 자체에 대한 살의였다.

그냥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과 생명을 밟아 꺼뜨리고 싶어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무게가 달랐다.

란은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제거하러 온 용병들은 그 의문을 풀어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죽어!”

란의 심장을 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날아들었다.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란은 그대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찔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땅에서부터 거대한 바위가 솟아올라 공격을 가로막았다.

콰가각!

단단한 바윗덩어리였지만 찌르기가 아니라 옆 날을 세워 휘두른 칼은 튕겨 나가지 않고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박혀 버렸다.

손목에 저릿한 충격을 받은 용병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갑작스레 솟아오른 바위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헤헤, 토니다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실체화한 작은 정령이 검끝에 톡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토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요! 이그레트가 너요들을 붙잡아두길 바라니까.」

토니는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후두둑! 투둑!

갑자기 용병들의 발목을 덮친 흙은 그대로 굳어 바위로 변해버렸다.

졸지에 바윗돌 속에 두 다리가 끼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황당함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 소리가 잇달아 터졌다.

“……!”

그리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란은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괜찮으냐?”

“아…….”

주르륵.

까만 눈동자 한가득 넘실거리기만 하던 눈물이 허락이라도 받은 듯이 비로소 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쥬다스는 다리가 끼인 채 옴짝달싹 못하는 용병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 빠…….”

란은 쥬다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선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았다.

나무에서 태어나는 요정족이기에 당연히 친부는 아니었지만 본래대로라면 태어날 수 없었던 픽시의 마지막 열매가 세상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인간이었다.

란은 그를 향해 남몰래 속으로만 불러왔던 호칭을 울먹거리며 읊조렸다.

“아빠. 아빠가 남기고 간 집. 불타버렸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빠가 키워준 나무도.”

“란, 네 탓이 아니야.”

“전부 사라졌어.”

쥬다스의 옷깃을 동아줄처럼 부여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란이 지금 쥬다스에게 투영하고 있는 대상은 그녀가 아버지로 믿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꼭 비에 젖은 작은 새와 같이 그렇게 떨기만 했다.

‘정말로 혼자가 됐어.’

픽시는 본래 숲에서 살아가는 요정족이다.

그러니 꼭 사회적인 삶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란에게는 마음 붙이고 살아가던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무, 그 나무를 돌봐주던 사람이 죽기 전까지 살았을 낡은 집.

그거면 충분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홀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란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의 뿌리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뭐하는 놈들이냐? 밤의 마녀는 혼자 다닌다고 들었는데.”

“…….”

용병들은  갑자기 우르르 나타난 기사단을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발이 묶였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적에게 항복할 생각도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란의 등을 다독거려 주던 쥬다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녀에게 홀린 멍청이들인가? 정신 차려! 그 마녀가 어떤 년인지……!”

적반하장으로 쥬다스 일행을 훈계하던 용병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딱히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진 것도 아닌데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고요히 가라앉은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한 탓이었다.

같은 인간일진대 감히 눈을 마주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크게 거스른 기분이었다.

용병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니, 결코 같지 않다.’

마치 보아뱀 앞의 생쥐라도 된 듯이, 명백하게 상대측이 상위의 존재였다.

그 사실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달았을 뿐이다.

“이 아이는 마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린 의뢰를.”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으로 의뢰를 수락한 당신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만 물러나십시오.”

표현은 완곡했지만 쥬다스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토니가 파닥파닥 날아와 손바닥 위로 답싹 내려앉았다. 동시에 용병들의 다리를 봉하고 있던 흙무더기가 무너지며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해박되었다.

“…….”

맥없이 부서져 내리는 흙을 털고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마녀를 퇴치하기 위해 파견된 12명의 용병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수는 겨우 넷이었다. 여덟 명이 죽고 한 명이 손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인원이 나머지 셋이다.

마녀 혼자라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쥬다스 일행까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수한 의뢰 현장을 거치는 용병답게 판단은 빨랐다.

지금은 의뢰 따위보다 목숨이 우선이었다.

끄덕.

통솔자의 지시에 따라 살아남은 용병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란도 덤비지 않는 적을 굳이 쫓아가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지쳐 있었다.

“란.”

란은 쥬다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엔가 루니와 카니가 힘을 사용해 불길을 말끔히 제압한 상태였다. 하지만 란의 집과 나무들은 이미 까맣게 타버려 본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있지, 사람을 죽였어. 잔뜩.”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쥬다스에게 시선을 준 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죽이려 했어. 너무 놀라서 나무들을 불러 막으려고 했더니 거기에 사람들이 그냥 죽어버렸어.”

“그랬구나.”

“인간은 의외로 쉽게 죽더라.”

란은 울듯이 웃었다.

“나, 정말로 마녀인가 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드디어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이 돌아왔네요.ㅎ

3월의 중반쯤 오니까 날씨도 무척 따뜻해졌습니다. 그럼 기운찬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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