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47화 (147/252)

0147 / 0240 ----------------------------------------------

17장. 마녀사냥

그 말을 마치자마자 란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른 봄,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아롱져 있던 꽃봉오리가 마침내 툭 터져 여린 꽃잎을 드러내듯 그렇게 살며시 울음이 터졌다.

쥬다스는 우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소맷자락을  내어준 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차분한 배려가 더 고마워서 란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쥬다스 님.”

그사이 상황을 정리한 에단이 이에 대해 짤막하게 보고했다.

“시신은 전부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또한 죽은 자들의 소지품 중 명패가 있어 각 무덤 위에 알아볼 수 있도록 세워놓았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채비를 명하시겠습니까?”

“으음, 그건 아무래도.”

쥬다스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힐끗 아직까지도 단단히 잡혀 있는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떠날 수 없겠어.”

란은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잠이 든 채로도 간절히 붙든 소맷자락만큼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홀로 폐허 속에 버리고 갈 수 없어 쥬다스 일행은 근처에 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누가 업어 가도 모르던 란은 어둠이 완연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산속의 밤은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추웠다. 찬 기온을 녹이는 모닥불 타는 소리가 따닥따닥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눈을 뜨니 컴컴한 밤하늘을 가린 나뭇가지이 시야에 보였다.

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부드러운 담요가 흘러내렸다.

“아직 밤이 깊단다.”

몽롱한 정신으로 담요를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던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자려무나, 아가.”

“아…….”

조금 떨어진 곳에 쥬다스가 앉아 있었다. 란은 그만 멍하니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쥬다스의 주변에는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그라는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릉!

쥬다스의 무릎에 턱을 괴고 있던 푸른 늑대가 작게 목을 울리며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물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란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당신이 저들의 별이구나.’

그는 자연계 정령들로부터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지고 있었다.

배시시 미소 지은 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지, 나 꿈을 꿨어.”

아직도 꿈속의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란은 허전한 품안에 담요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나를 부르는 꿈.”

“으엑. 그거 무서운 꿈 아니냐?”

고개를 들어보니 모닥불 주변에는 쥬다스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칼뿐 아니라 에단과 크리스티나까지 함께 둘러앉아 있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서운 게 아니라……. 그리운 꿈이었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아빠 목소리를 들었거든.”

픽시는 인간과 달리 나무에서 열매로 맺힌다.

하지만 그렇게 맺힌 열매가 무조건 픽시로 태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깨끗한 햇살과 기름진 토양, 충분한 수분, 거기에 더해 선대 픽시의 축복이라는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후에야 비로소 열매는 픽시로 진화해 태어난다.

그 조건이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을 시에는 열매인 채로 약 백 년 가까이 버티다 자연적으로 소멸한다.

그렇게 태어나는 픽시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 열매의 기억을 갖고 있다.

란은 선대 픽시 대신 자신을 따뜻하게 축복해 준 인간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둥근 구체 속에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너는 마치 란(卵) 같구나.’

남자는 해동 출신이었다. 그는 픽시의 열매를 두고 알이라는 뜻의 ‘란’이라 칭했다.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을 향해 ‘란’이라고 부르는 음성만큼은 또렷하게 뇌리에 입력되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준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란은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매일 찾아와 나무가 시들지 않도록 돌봐주며 사랑스럽다는 듯 불러주는 그가 좋았다.

한 인간의 정성 어린 보살핌은 본디 식물에서 태어나 혈연의 정이 없는 요정족에게 부모에 대한 애정을 싹 틔웠다.

담요를 꼼지락거리는 란을 향해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아버지를 기억하나?”

“음,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빠는 해동 출신이었어. 그 나라 언어를 사용했거든.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아마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겠지? 참, 그리고 연금술사였던 것 같아.”

“뭐?”

단순히 아버지에 대해 툭 던져봤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대답이 돌아오자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연금술이란 해동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이능이다.

제국 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자 마법 기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환과 창조가 가능했다. 그랬기에 연금술에 대해 무수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정작 해동 내에서도 이를 다룰 수 있는 이능력자는 귀했다.

특히 고위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정교하고 복잡한 술법이 적힌 술법궤가 필요했는데 이는 고위귀족가문이나 왕족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

루바르잔 황제와 해동의 왕녀가 동맹혼으로 이어지면서 연금술에 대한 비밀이 어느 정도 풀리는가 싶었지만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해동 왕녀 하윤 리가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로 인해 두 국가 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연금술에 대한 연구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아직 연금술이란 주제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란은 그저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지속했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빠가 지은 집에서 연금술이 적힌 서적과 술법궤를 발견했어.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그냥 그대로 집안에 뒀지만. 지금은 다 타버렸겠네.”

“……타버렸다니.”

연금술이 적힌 서적과 술법궤는 무척 희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술법궤는 고위가문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만큼 그  가치가 엄청났다. 그 어마어마한 보물이 고작 화재 따위에 잿가루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들은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에단을 힐끗 쳐다본 란은 그를 향해 반가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해동 사람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너도 검은색이네.”

“……?”

“머리랑 눈이.”

에단의 흑발과 흑안은 제국 내에서도 아주 특이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한 편도 아니었지만 누군가 색깔에 대해 특별한 감상을 표현 적은 없었기에 에단은 잠시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묵묵히 자신을 마주보아오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란은 히히 웃었다.

“나도 눈은 검은색인데! 아마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물려받다니.”

요정족이 인간과 다른 태생을 타고난다는 사실은 쥬다스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들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에단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추측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인간의 시신을 먹고 태어났다고 했다. 설마 그때 유전된 건가?’

란은 동족의 축복이 아닌 인간을 양분으로 삼아 태어났다. 그래서 온전한 요정이 아닌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른 기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요정의 모습이었지만 곧 해가 뜰 무렵엔 다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추한 외모로 변할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반을 차지한 인간의 피 때문이라면 모든 이상현상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그치만 이젠 전부 의미 없게 되어버렸어.”

“무슨 말이지?”

“태어난 의미 말이야. 아빠가 날 세상에 만들어준 의미. 난 완벽한 픽시로 태어나지 못한 반쪽짜리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섞이는 것도 싫어해. 결국 이렇게나 미움 받아버리고.”

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람들이 날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워할 줄은 몰랐어.”

“이봐, 그건 그 녀석들이 잘못한 거야.”

바이칼이 울컥하여 끼어들었다. 하지만 란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처음엔 살아 있다는 게 마냥 좋았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어.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고, 차라리 죽길 바라기까지 한다면.”

“…….”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란아.”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그녀를 불렀다.

란이 풀 죽은 고양이처럼 슬쩍 고개를 들자 그는 옆자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와서 앉으라는 손짓에 란은 순순히 담요를 들고 총총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쥬다스는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전부 타버리진 않았더구나.”

불길에 휩싸인 나무 사이에서 유일하게 타지 않은 나뭇잎이었다.

이제 막 자라나 연한 녹색으로 가득한 부드러운 잎사귀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반짝이는 보석을 하나씩 품고 태어난다는구나.”

“보석…….”

란은 손안에 든 나뭇잎을 조심스레 말아 쥐었다.

“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갈까? 나도 그것이 궁금했던 적이 있단다.”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

대답은 웃음기를 담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자신이 가진 보석은 스스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 만나 그 보석을 발견해 주고, 다시 알려주는 거야.”

“……?”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빛나고 있음을.”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란은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상해. 분명히 나보다 어린데도.”

그녀는 너무 웃어 눈가에 눈물까지 매단 채 덧붙였다.

“꼭 아빠 같아.”

“크흠.”

쥬다스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해봤던 생각이었기에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있지, 있지! 아빠라고 불러보면 안 돼?”

“컥! 쿨럭쿨럭쿨럭!”

아니, 이건 결단코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헛기침이 아니라 마구 터져 나오는 기침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쥬다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얼굴이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그가 이제 겨우 17세라는 사실은 그렇다 쳐도, 일국의 황태자를 향해 그런 오해사기 딱 좋은 호칭을 부르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이칼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미쳤냐! 차라리 오빠라고 하든가!”

“응? 태어난 지 오십 년도 넘었는데 너희한테 오빠는 좀.”

“……아빠는 되고?”

“양아빠라면 나이 차이 상관없지 않을까?”

순진한 얼굴로 되물어오는 통에 바이칼과 에단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살면서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할 말을 잃은 바이칼이 슬쩍 크리스티나의 안색을 살펴보니 아예 돌처럼 굳어 있었다.

“잠깐. 몇 살이라고?”

“정확히는 쉰여섯.”

종족이 다른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나이가 많을 줄은 몰랐던 바이칼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기각. 절대 안 돼.”

“엑? 왜!”

“왜는 쥐뿔이 왜야. 그 나이 먹고서 누구보고 아빠 소릴 하냐? 아니, 그 나이가 아니어도 안 돼. 어후, 아직 성인도 아니신 분한테 무슨 막말을 못해서.”

그 투덜거림을 들으며 란은 도로 시무룩해졌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지켜보던 쥬다스에게 마지막으로 의중을 물었다.

“정말 안 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월요일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주말은 정말 짧군요 -_ㅠ 주르륵...

그래도 어제 저녁을 족발로 마무리해서 행복합니다. 고기는 어떤 형태든 사랑입니다(?)

그럼 즐거운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