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48화 (14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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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마녀사냥

“그랬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질 일이 잔뜩 생길게다. 또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거나 다칠 수도 있지. 어떨 것 같으냐?”

“으음. 나 때문에 쥬다스 님도 같이 미움받는다는 거지? 그건 싫어.”

란은 냉큼 수긍했다.

자신보다 상대의 피해를 먼저 생각하는 순진한 픽시의 마음에 쥬다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상관없다만.”

“진짜?”

“글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금하겠다고 약속해 준다면야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히 대해도 좋아. 아빠든, 친구든, 혹은 할아버지든.”

‘할아버지…….’

예시 끄트머리에 끼어 있는 괴이쩍은 호칭을 듣고 모닥불에 둘러앉아있던 나머지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보다 란, 네가 일어나면 한 가지 묻고자 한 게 있단다.”

“뭔데?”

“우리는 날이 밝거든 이곳을 떠나 해동으로 향할 것이야. 원한다면 네가 정착할 만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함께 다녀도 좋다. 아니면 이곳에 남아 다시 활로를 개척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쥬다스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어찌하겠느냐?”

집은 불타버렸고 마녀로 몰려 목숨을 노려지고 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갔지만 언제 또다시 마녀를 죽이려는 자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젠 더 이상 거래처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좋아하던 쿠키나 빵을 굽지도 못할 터였다.

란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정말 어쩌지.’

이렇다 할 대답이 곧장 나오지가 않았다.

그녀는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살아온 픽시지만 세상물정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쥬다스가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다.

란은 고개를 돌려 까맣게 탄 나무들과 집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50년이 넘도록 살아온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곳에 머물긴 싫었다.

“……생각해 봤는데.”

란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나, 오십 년이나 살았지만 배운 기술도 없고, 집이 불타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

“그러니까 쥬다스 님을 따라갈 수 없어. 새 집을 찾는 건 스스로 어떻게든 해볼게. 구해줘서 고마워.”

그녀가 알고 있는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하다못해 밀가루를 한 자루 얻으려 해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식물을 가져와 교환해야 했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건 아이들이 시소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같이 어울릴 수 없다.

“본래 생활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 집을 찾는 일이 두렵진 않느냐?”

“그건 문제없어! 이번 일을 겪었으니까, 다시 또 누가 날 죽이려고 들면 그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막 죽이는 건 싫으니까…… 으음, 이번엔 살살 때리지 뭐.”

조금 풀이 죽어있긴 했으나 씩씩하게 웃는 란을 보며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되었다. 자아,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다들 눈을 붙이자꾸나.”

아닌 게 아니라 잘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을 꼬박 새울 기세였다.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취침을 준비했다. 제 몫의 침낭을 펴던 바이칼이 문득 여전히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란을 발견하고 물음을 던졌다.

“이봐, 안 자? 거기서 뭐 해?”

“난……. 오늘이 지나면 다들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냥 깨어 있을래.”

“흠. 동이 트자마자 함께 움직이려면 피곤하지 않겠느냐?”

“어?”

당연히 함께 움직이리라 여기는 말이었다.

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쥬다스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란아, 함께 가자는 건 무언가를 바라서 꺼낸 말이 아니야.”

“아?”

“너는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단다. 세상에는 꼭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 이해관계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네가 길을 잃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호의로 구해주었듯이 말이다.”

“그치만.”

“굳이 따지자면 너를 데려가고자 하는 건 내 욕심이겠구나.”

그는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상처받은 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스스로 딛고 이겨내고자 하는 씩씩한 요정족에게 그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싶은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아가. 아빠라 불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누.”

“……!”

시무룩했던 란의 얼굴이 사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확 밝아졌다.

그래도 부끄러운지 정작 ‘아빠’라고는 부르지 못하고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고마워, 쥬다스 님. 데려가준다면 나 정말 열심히 따라다닐게. 귀찮아지면 중간에 버려도 좋아. 아, 피곤하면 안마라도 해줄게. 길 잃은 사람들 피로 풀어줄 때 배웠거든. 나 안마 잘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켜보던 바이칼이 침낭에 묻은 잔디를 대충 툭툭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근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왜 우리한텐 너, 너 거리면서 쥬다스 님께는 쥬다스 님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떤 분인지 모르지 않냐?”

“그야 당연히 알지. 나도 요정족인 걸.”

“엉? 그게 무슨 상관…….”

“요정은 인간보다는 정령에 가깝거든.”

인간의 신분계급을 따를 필요도 없고 어떤 신분인지조차 듣지 못한 란이 굳이 쥬다스에게 특별대우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다는 정도야 워낙 그의 성정이 어른스럽고 따뜻하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님’을 붙이는 건 그것과 별개로 의문스러운 호칭이었다.

란은 해맑게 웃으며 그 의문을 종식시킬 파격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령왕의 계약자에게 함부로 너, 너 거릴 순 없잖아.”

일행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보초를 서던 기사단원은 물론이고 이미 누워서 잘 준비를 하던 사람들까지 싸하게 굳어졌다. 자는 척 누워 있던 콜도 화들짝 놀라 혀를 깨물었다.

‘과, 과연 요정족 픽시구나! 스승님의 정령을 알아보다니.’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폭풍을 몰고 왔는지 까맣게 모르는 란만이 헤헤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내일부터 같이 여행가는 거네. 친구들이랑 떠나는 여행은 어떤 기분일까?”

“…….”

“아, 기대된다.”

“…….”

차마 본인에게 물어볼 정신도 없이 다들 멍하니 굳어버렸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정지 마법이라도 걸린 양 움직임이 멈춰 버린 일행 사이에서 정작 당사자는 멀쩡히 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의 곁에 몰려든 정령들이 까르륵 웃는 모습이 보였다.

‘후우. 전하께서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주군의 비범함을 늘 곁에서 지켜봐온 에단은 그나마 비교적 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시는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티나와 바이칼도 조금씩 혼란을 진정시켰다.

‘저 픽시가 굳이 거짓을 얘기할 이유는 없으니 분명 사실이겠지.’

‘정령왕은 이제 전설에만 남은 존재가 아니었나?’

무수한 업적을 남긴 채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대현자 이그레트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정령왕은커녕 최상급 정령의 계약자조차 만나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말도 안 되는 한마디에 모두가 진짜라 생각하고 반응한 건 쥬다스라면 그럴 만하다는 독특한 신뢰를 품은 탓이었다.

일전 바이칼이 우스갯소리로 ‘이그레트 환생설’을 떠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그라면 설령 정령왕이나 드래곤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이 연관되었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저 4속성 중에 누가 정령왕이라고?’

바이칼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리는 눈동자로 쥬다스의 곁을 에워싼 4속성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가장 눈에 익은 건 아무래도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하지만 자주 본 만큼 오히려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령왕이 그렇게 자주 나타날 리가 없지. 아마 바람은 아니겠군.’

붉은 날개를 달고 있는 조그마한 소녀의 외향인 카니와 아기처럼 뒹굴거리고 있는 토니도 차례로 보았지만 정령왕의 위엄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받게 된 루니는 그릉 목을 울리며 그들을 마주 노려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움찔한 바이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물이려나?”

「우우, 뭐람! 이그레트, 쟤들 지금 되게 웃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포로롱 날아오른 유니가 불만스레 칭얼거렸다.

그러자 카니도 손가락을 입가에 올린 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웃긴 것보단 되게 무례한 생각 같은데요.」

「왜 무례하다요? 모르는 편이 낫지 않다요?」

「흐흥~ 토니 네가 웬일로 거기까지 생각을 했대? 맞아, 물론 모르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근데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우리 중에 하나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라 그게 은근 열 받네.」

유니는 팔짱을 끼며 왈칵 소리쳤다.

「저것들 분명 나를 제일 먼저 후보에서 제쳤다고!」

「우잉?」

「그다음은 너고!」

「에에에엥.」

쥬다스의 이마 위에서 뒹굴거리던 토니는 그대로 양손에 턱을 받쳤다.

「뭐다요, 실제로 약하지 않으면 된 거 아니다요? 못 알아보는 인간 쪽이 약한 거다요.」

유니는 손가락으로 푸른 늑대를 처억 가리키며 항변했다.

「바보야, 그래서가 아니야! 우린 전부 동급인데! 저 과묵한 멍뭉이보다 얕잡아 보였다는 게 화나는 거지!」

「……가만히 있는 나는 왜.」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졸지에 과묵한 멍뭉이가 되어버린 루니가 억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쿡쿡. 진정해요, 유니. 존재가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건 이그레트의 뜻이기도 했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쪽이 더 그의 바람엔 걸맞은 모습인걸요?」

「그…… 건 그렇지만. 우으으.」

떠들썩해진 정령들의 대화를 들으며 쥬다스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 자신이 정령왕의 계약자란 사실을 최대한 밝히고 싶지 않은 건 맞지만 지금처럼 드러난 사실을 굳이 아닌 척 숨길 생각은 없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쥬다스 님도 같이 미움 받는다는 거지? 그건 싫어.’

‘새 집을 찾는 건 스스로 어떻게든 해볼게.’

조금 전 란이 했던 이야기가 아른아른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도움을 주면 더 큰 도움을 바라거나 당연히 남은 책임을 지길 바랐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저 보랏빛 요정은 정말로 특이한 존재였다.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란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고자 씩씩하게 마음먹는 강한 아이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긴장으로 꽉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이 이제야 스르르 풀렸다.

쥬다스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 잔다.」

저들끼리 이렇다 저렇다 우기며 찡얼거리던 정령들은 일제히 잠든 계약자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잠깐 일어섰던 푸른 늑대는 도로 자리에 길게 누워 쥬다스를 동그랗게 감쌌다.

그의 머리며 이불 위로 날아든 나머지 정령들은 방금 전의 불만을 싹 날려버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늘 다른 사람을 아가라고 부르지만…….」

「헤헤. 자장자장이다요.」

백 년이 지나도 처음 그를 발견했던 모습이 잊을 수 없었다.

눈밭에 버려져 울지도 않고 새근새근 자던 하얗고 작은 아기.

계약을 맺은 건 그 후로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그 아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정령들은 전부 그에게 반해 있었다.

살짝 날아든 유니가 잠든 계약자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이그레트.」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조금 크고 아름다운 파란 멍뭉이 (...)

한주의 시작은 잘 여셨나요?ㅎㅎ 봄바람이 따뜻해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더라구요. 놀러가진 못하지만...쿨럭.

내일은 기분삼아 엄청나게 단 카라멜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ㅋ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늘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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