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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제국 동쪽과 해동을 잇는 피리네오스 산맥.
제국에서는 별 제약 없이 건널 수 있지만 정작 동방국가에선 ‘서요산(西妖山)’, 즉 요괴가 가득한 산이라 부르며 출입을 꺼리는 금역이다.
예부터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해동에선 타지로부터 건너오는 문물에 대해 보다 부정적이었다.
루바르잔 제국과 동맹을 맺고 교류를 시작한 지도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여전히 타국인과 타국 문물을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쥬다스 일행은 바로 그 산을 내려와 해동의 첫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그들도 산을 통째로 넘은 건 아니었다. 산맥 중턱에 해동으로 이어지는 포탈이 있었다. 쥬다스는 무리해서 산봉우리를 넘는 대신 포탈을 타는 편을 선택했다.
산맥이 어찌나 규모가 크고 산세가 험하던지 중턱에 위치한 포탈관리실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다.
그 거대하고도 험준한 산맥을 온전히 걸어서 넘으려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사람이 지쳐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아 말이 달리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보통 일정 높이 이상의 산마다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이 설치되어 있었다.
포탈은 순식간에 일행을 해동의 초입으로 이동시켰다.
처음 밟은 해동의 땅은 ‘하늬’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하늬마을 역시 해동의 폐쇄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을에 산을 건너온 제국민이 제법 섞여 그나마 익숙할 텐데도 마을사람들은 타국인을 은근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장터에 늘어선 장꾼들만이 활발한 호객행위로 그들을 반길 뿐이었다.
어차피 주목받을 생각 따윈 없었던 쥬다스 일행은 물 흐르듯 조용히 마을에 들어와 분위기를 살폈다.
“어으, 드디어 도착했네요.”
며칠간 험한 산길을 지나오느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해야만 했던 바이칼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풀썩 엎어졌다.
쿡쿡 쑤시는 뼈마디며 온몸을 강타하는 근육통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신체적 이능력자로 구성된 기사단원들은 멀쩡했지만 그게 아닌 마법사나 치유술사, 정령술사들에겐 휴식이 절실했다.
무가에서 태어나 신체적 이능을 누구보다 강하게 타고난 에단은 죽는 시늉을 하는 바이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렇게나 힘든가?”
“진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이상 더 말을 탔다간 영 좋지 못한 곳에 근육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힘든 건 둔부뿐인 모양이군.”
바이칼은 고통을 토로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철벽 앞에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이사 뭐라든 그는 지금 며칠 만에 취하는 꿀 같은 휴식에 감동하고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온기에 뭉친 근육이 노글노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국경을 넘자마자 생활양식부터 바뀌었다. 해동의 숙소에선 특이하게도 침대 대신 바닥에 요를 깔아 각자 알아서 누울 수 있도록 했다. 맨 바닥이라고는 해도 바닥 전체가 따끈따끈해서 침대보다 금방 몸을 덥힐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바로 부뚜막에서 불을 지펴 그 열기로 방 전체를 달구는 온돌난방을 사용하는 까닭이었다. 온돌은 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벽난로 난방법과 다르게 연기가 나지 않도록 구조화한 독특한 보온설계였다.
거기다가 건물은 전부 1층으로 되어 있었다. 인간이란 자고로 하늘 아래 살아가는 미물이며,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오만하고 무례하다 여기는 사상 탓이다.
여기엔 해동의 귀족가도 빠짐없이 해당되어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 해도 2층이 한계였다.
「딱히 특별한 건 안 보여. 치안도 나쁘지 않고.」
가볍게 주변을 훑은 유니가 청량한 바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참! 축제라고 하기엔 뭐하고, 봄마다 키우는 짐승의 첫 새끼를 바치는 풍습이 있대. 얘네가 믿는 수호신에게 잘 봐달라는 의미라나 뭐라나.」
「수호신이라면 그 녀석들 말하는 거다요?」
「응. 신이라기보단 우리와 같은 정령들이지. 자연계가 아니라 동물계이긴 하지만. 뭐어, 최근엔 계약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으니까 암만 이렇게 제물을 바쳐보았자 소용없을걸.」
교황청을 세우고 국교로 유일신을 섬기는 루바르잔 제국과 다르게 해동은 토속신앙을 간직해 왔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으며, 특히 해동의 왕가와 대대로 계약하여 그들을 보살피는 사방신수.
해동은 상경, 동경, 남경, 서경으로 나누어 4군부 체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방위에 따라 수호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 쥬다스 일행이 산을 넘어 도달한 서쪽 방위에선 ‘백호’를 수호신으로 섬기며 매해 봄마다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지금이 마침 봄이 무르익어 제물을 바치는 제사 기간이었다.
“수도 호성은 북쪽 상경에 있습니다. 지금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일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니의 브리핑과 별개로 에단은 현재 일행의 위치와 목적지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마쳤다.
쥬다스는 들은 정보를 종합하여 머릿속에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 순례의 길을 겸하여 찾아온 해동은 사실 그에게 있어 여러모로 뜻깊은 나라였다.
생모 하윤 리의 모국이자 그에게 이번 생을 살게끔 만든 연금술의 근원지.
드디어 5년 전 전달받았던 서윤 리의 초대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라.”
데에엥-
바깥에서부터 묵직한 쇳덩어리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겉옷을 접어놓던 세이지가 의아한 얼굴로 창가로 다가갔다. 얇은 창호지를 바른 투박한 나무창문을 열자, 온갖 타악기 소리와 함께 음역대가 낮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밖에 사람이 많아요. 가면 같은 것도 잔뜩 쓰고 있고요. 행사일까요?”
쥬다스는 세이지의 곁에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얀 털의 호랑이를 상징하는 동물가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면을 쓴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짐승의 첫 새끼를 끌고 줄 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악기 소리를 들으며 쥬다스는 창틀에 기대 턱을 괴었다.
“흠, 이곳은 백호의 영역이라 하더구나.”
“백호…… 요?”
“그래. 해동의 사방신수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느냐?”
그 물음에 세이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책에서 종종 읽었어요.”
해동의 사방신수에 대한 이야기는 연금술보다도 훨씬 유명했다.
그들이 제국의 힘 앞에 쉽사리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왕가 대대로 계약을 유지해 온 사방신의 힘은 아무리 마법강국 루바르잔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 맥이 끊겨가면서 나라가 흔들리긴 했지만 제국과의 동맹혼, 그리고 현왕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제 겨우 안정화되어가던 참이다.
“아, 그럼 저 행렬은 백호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글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러 가는 모양이다.”
“제물을…….”
세이지는 누군가의 손에 목줄을 잡혀 아장아장 따라가는 잿빛 아기염소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던 그의 귓가에 웃음기 섞인 제안이 들려왔다.
“가보겠느냐?”
“네? 아. 그, 그래도 될까요?”
열넷,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였다.
황궁은 아이가 자라기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고 세이지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어미가 저지른 죗값은 고스란히 자식에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했고 비참하게 죽은 어미는 죽어서까지 죄인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차가운 아버지는 그를 미워하거나 내치진 않았으나 따로 정 붙일 구석 따위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해동의 왕실에서조차 아마도 그는 죄인으로 고개 숙여야 할 것이다.
세이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형을 따라왔다. 자신이 죄라는 굴레를 입고 있다면 피하는 건 오히려 그 굴레를 키울 뿐이다.
싫든 좋든 맞부딪혀야만 했다. 세이지는 그리 생각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죄를 저지른 채 세상을 떠나버린 어미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얽혀 있는 형을 위해서라도.
그 죗값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직접 아이다운 발상을 제안해 주었다.
“모처럼 다른 나라에 왔으니 기회가 있을 때 보아두는 편이 좋겠지. 피곤한 사람들은 쉬도록 두고 제사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다녀오자꾸나.”
세이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형과 달리 약간 탁한 금안에 설렘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차마 떼를 부리진 못할 테지만, 쥬다스가 먼저 제안한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형제의 대화를 듣고 말린 오징어처럼 축 바닥에 늘어져 있던 바이칼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
“아뇨, 저도 그 제사란 게 궁금해서 잠이 다 안 옵니다.”
바이칼은 퀭한 눈으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백호라느니 제사라느니 하는 타지의 문화가 궁금한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푹 쓰러져 잠들고 싶을 뿐이다.
그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쥬다스가 부드럽게 만류했다.
“해동의 수호신은 넷이나 되니,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게다.”
“사실 제가 동물 중에 호랑이를 제일 좋아해서…….”
“이거야 원.”
쥬다스는 14살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이 떼 부리는 19살 친우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리곤 되도 않는 소릴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바이칼을 향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명령이다, 바이칼.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친 동료들을 지켜다오.”
“……예, 전하.”
막 스태프를 챙겨 들던 바이칼은 허탈하게 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힐끗 쳐다본 단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을 본 그는 완전히 따라나서는 걸 포기했다. 쥬다스는 세이지, 에단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남자방과 여자방을 따로 잡았기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란이 따라갈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바이칼이 알 수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져 누웠다.
‘그래도 살았다.’
마법기사로 입단한 그는 인챈트를 걸거나 마력을 소모하는 일은 기가 막히게 수행해 냈지만 체력이 필요한 활동에서만큼은 극악한 효율을 보였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마냥 삭신이 다 쑤셨다.
그러다 문득 한쪽 구석에 이미 자리를 펴고 편안히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 눈을 깜빡였다.
“어, 콜 영감님은 안 따라가셔도 됩니까?”
남들이 볼 때 유별날 정도로 제자사랑이 지극한 황실 정령술사 코르토반 옌은 쥬다스가 무슨 일을 하는 족족 따르는 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어미닭이 물가에 내놓은 병아리를 총총 따라다니며 챙기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아니, 반대로 병아리가 어미닭을 쫓아다니는 건가?’
묘한 딜레마에 빠진 그를 두고 향나무베개에 머리를 벤 콜이 여유롭게 대꾸했다.
“피곤한 사람은 쉬라고 하셨으니 따를 뿐이라오.”
“뭐, 제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걱정은 안 되십니까?”
“제 걱정을 받으실 분은 아니시지 않소이까? 허허.”
바이칼은 한 박자 늦게 그들의 주군이 정령왕의 계약자란 사실을 떠올렸다. 확실히 웬만해선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 테였다.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수하된 입장에선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바이칼이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걸 본 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지 않으면 몸이 축난다오. 이 나이에 몸살이라도 들면 앞으로 더 폐가 될 것 같아 말입지요.”
콜은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게다가 좋은 친우들을 호위로 두고 계시니 이 늙은이는 오늘만 파업 좀 하렵니다.”
“예, 뭐…….”
그 말을 끝으로 콜은 정말로 편안하게 쿨쿨 잠에 빠져들었다.
‘천하 태평한 영감님이로구만.’
스승과 제자는 닮는 법이라더니, 쥬다스와 닮은 구석도 좀 있는 것 같았다.
바이칼은 벽에 기댄 채 늘어져라 하품을 갈겼다. 몸은 천근만근 피로에 잠겨있었지만 정작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삐이?”
활기 넘치는 어린 와이번만이 쫑쫑거리며 그의 발치를 기웃거렸다.
“플루비.”
“삐!”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자 대형견마냥 손바닥에 머리를 가져다대었다.
그는 파란색으로 빛나는 미니 와이번을 들어다 가슴 위에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징그럽게 느껴졌던 푸른 비늘과 주홍빛 눈동자가 이제는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바이칼은 제 가슴 위에 얹어놓은 플루비의 오동통한 볼을 집게손으로 꼬집듯 늘어뜨렸다.
“뭔 일 있으면 깨워라. 알람 마법을 걸어두긴 했는데, 너무 푹 잠들면 내가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삐애액…….”
불만스럽게 대답하는 울음소리마저 익숙했다.
============================ 작품 후기 ============================
*By. 공든탑
'18장 : 사신수-백호'의 시작입니다.
사방신수긴 한데 동물계 정령이라 좀...크흠... 아무튼 그렇습니다 (?)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