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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쥬다스는 세이지와 에단을 데리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거리로 나온 세 사람은 일단 장터에 들러 비둘기를 한 마리씩 샀다. 제사에 참여하려면 제물이 필요한데 그들은 가축을 기르는 현지인이 아니니 방문객의 예로써 상인에게 비둘기를 사서 대신 바쳐야 했다.
그렇게 합류한 제사 행렬에는 특이한 탈을 쓴 자들이 춤을 추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대부분 수염이며 눈썹 등을 괴이쩍게 묘사해 놓은 호랑이탈이었는데 간혹 청룡이나 주작 같은 다른 사방신도 섞여 있었다.
거기다 제사를 알리는 음악 소리도 요란하여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
빨간 천에 감싸인 비둘기를 품에 안은 채 넋을 빼고 있던 세이지는 퍼뜩 정신을 되찾고 불안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수한 인파 속에서도 자신을 챙겨주고 있는 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세이지는 크게 안도함과 동시에 어쩐지 창피해졌다. 순간적으로 미아가 될까 걱정한 사실이 너무 어린애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쥬다스는 자신의 나이 때 이미 루바흐를 졸업해 황태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척 봐도 말 붙이기 어려울 법한 사람들을 친우로 사귀고 독사같이 속살거리는 귀족들까지 전부 발아래 무릎 꿇렸다.
심지어 원수의 아들인 세이지에게마저 손을 내밀어 품어주었다.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세이지는 지금쯤 폐인이 되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당시엔 어른이라고 생각한 나이가 지금 와선 고작 열네 살 소년일 뿐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늘 따뜻하게 주변을 보살펴주고 있지만 쥬다스는 세이지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열일곱이었다.
세이지는 문득 깨달은 그 사실이 신기해서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3년 뒤엔, 나도 형님처럼 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세이지에게 있어 모범적인 이상은 형이었다.
마치 황폐한 땅에서 유일하게 놓인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듯 그렇게 따랐다. 아이는 착실히 자라고 있었다.
둥, 두웅!
그때 행렬이 끝나며 둔탁한 북소리가 울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너머로 백호탈을 쓴 누군가가 새끼 염소를 끌고 나섰다. 그 앞에 정갈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석탑이 하나 보였다.
높이 짓지 않는 집과 달리 제사를 위한 탑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다. 무려 자그마치 8층이나 되는 석탑이었다.
새끼염소를 짚단 위에 올린 자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여기 성신의 민족이 백호제를 드리고자 한자리에 모였으니!”
와! 하고 군중이 따라 소리쳤다.
“첫 제물을 받으소서!”
“받으소서!”
탈을 쓴 마을 대표가 제일 먼저 자신이 끌고 온 새끼 염소의 목을 찔러 피를 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짚단에 화륵 불길이 타올랐다.
짚은 타지 않고 짐승만 남김없이 태운 불길은 먹이를 더 바라는 맹수처럼 꺼지지 않고 계속 넘실거렸다.
「헤에, 저것도 연금술인가 봐.」
「막 피가 불이 된다요! 신기하다요!」
「응. 확실히 평범한 불은 아니에요.」
불의 정령인 카니가 제단의 불을 보고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단언했다.
「피를 불로 변환시키는 연금술……. 어머?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네요. 이건 백호를 부르는 제사가 맞아요.」
「어쩌면 진짜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사신수, ‘백호’.」
이제 정령들은 조금 전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불의 제단을 응시했다.
동물계 정령은 본래 동물에서 파생된 신수인 만큼 자연계보다 훨씬 기초 욕망에 충실한 존재다. 예컨대 육식성 동물은 육식을 하기 때문에 살육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거기에 불 속성이기까지 한 백호를 짐승의 피로 부르는 건 몹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를 거듭하며 백호를 섬겨온 조상들이 찾아낸 실질적인 맞춤형 제사방법인 셈이다.
그사이 사람들은 짚단에 차례로 가져온 제물을 바쳤다.
본토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른 짐승의 첫 새끼를 바쳤으며 이방인들은 장터에서 사온 비둘기를 죽여 불길에 던졌다.
대기 열은 빠르게 줄어 세이지 차례가 되었다. 빨간 보자기에 싸인 비둘기가 구구 울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망설이던 세이지가 비둘기를 향해 단도를 내리찍으려던 순간이었다.
크르르르!
“어……?”
불길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세이지가 멈칫하는 사이 불은 하나의 형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뱀 같은 꼬리와 튼실한 다리, 비죽비죽 솟은 털까지 재현해 낸 불길은 훅 열기를 가라앉히며 검은 빛깔의 매끈한 짐승으로 탈바꿈하였다.
“오오, 백호님이다!”
“백호님이 강림하셨다!”
“모두 엎드려 절하시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 엎드렸다. 놀란 세이지가 덩달아 고개를 숙이려다 그만 실수하여 안고 있던 비둘기를 놓쳤다.
푸드덕!
비둘기는 잽싸게 하늘로 날아오르려 날갯짓했다. 하지만 그보다 불속에서 튀어나온 맹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콰득, 비둘기를 낚아 챈 맹수가 굳어 있는 세이지를 돌아보았다. 하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와중에 붉게 빛나는 안광이 섬뜩했다.
백호라 불린 검은 맹수는 입에 물고 있던 비둘기 사체를 툭 뱉었다. 피에 젖은 사체가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뒹굴었다.
‘먹잇감으로 삼으려 죽인 게 아니야.’
달아나려 하니 죽였을 뿐이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저것이 백호…… 하지만 검은색인데?’
동시에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카각!
맹수의 발톱과 날렵한 도가 맞부딪히며 마찰음을 생성했다. 어느 틈엔가 에단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저건 백호가 아니야!」
유니가 날뛰기 시작한 맹수를 확인하고 소리쳤다.
생김새는 호랑이가 맞았지만 털이 먹물처럼 까맸다. 백호가 아닌 흑호였다. 붉은 눈알을 번뜩인 흑호는 사냥을 방해한 에단을 보며 분개하듯 으르렁거렸다.
마찬가지로 대치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벌떡 일어섰다.
“백호님께 그 무슨 불경한 짓이냐, 이방인!”
“어서 검을 거둬라!”
사람들에겐 호랑이의 털색이 하얗든 검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호제를 올리던 중 불길 속에서 나타난 호랑이를 무조건 백호라고 믿었다. 오히려 에단이 제를 방해한다고 여겨 당장에라도 끌어낼 기세였다.
하지만 에단은 묵묵히 명을 따를 뿐이었다.
그가 칼을 거두지 않자 흑호는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크르륵 울었다.
놈은 피에 굶주려 있는 상태였다. 강한 적을 상대해 봤자 원하던 꿀을 얻을 수 없으리라 여긴 호랑이의 관심은 저절로 다른 쪽으로 향했다.
휘익!
발톱을 세운 흑호가 방향을 틀어 웅성거리는 인파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에단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끼어들어 놈의 진로를 막아섰다.
쩡!
발톱과 칼이 만난 것치곤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났다.
“에에잇, 그만두래도!”
“……!”
맹수를 상대할 때는 당황하지 않았던 에단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지켜주려 했던 사람들이 역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기회를 노려 빈틈을 파고든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흐헉!”
에단을 말렸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촷!
하지만 맹수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견고하게 생성된 물의 장막이 둥글게 그들을 보호한 까닭이었다.
찰랑이는 물만 한 입 가득 베어 문 흑호는 당황하여 뒤로 성큼 물러섰다. 콱 다문 잇새로 맑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의 장막을 형성해낸 푸른 늑대가 그 앞에 우아하게 탁 내려섰다.
‘백호는 아니지만 그 외향과 능력이 아주 흡사하구나.’
쥬다스는 루니의 곁에 다가가 차분히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백호를 본떠 만들기라도 하듯 비슷한 모양새였으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해동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검은 동물은 백호가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였다.
“백호님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진짜 백호라면 백호를 섬기는 민족인 당신들을 죽이려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그건 이방인인 너희들이 칼을 뽑았으니 신수께서 노하셔서 그런 것이지!”
너를 벌하려 했을 뿐이다!
쥬다스는 분개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사이 흑호는 입을 벌려 불길을 훅 내뿜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감싸고 있던 물의 장막이 기화되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여전히 살의를 불태우며 울부짖는 흑호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신수라 불리는 백호라면.”
피이잉!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빛나는 화살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흑호는 그 일발에 맞고 맥없이 쿵 쓰러졌다.
“고작 활에 맞았다고 해서 죽을 리가 없지요.”
“이게 무슨!”
사람들은 경악한 눈으로 쓰러진 흑호를 쳐다보았다. 놈은 머리에 화살이 박힌 채 죽어 있었다. 죽은 호랑이를 확인한 유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건 신수도 뭣도 아니라 그냥 사령에 잠식된 평범한 호랑이야.」
“…….”
“쥬다스 님.”
활을 쏜 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의 곁에는 큼직한 로브로 모습을 가린 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에겐 딱히 외출을 알리지 않았으나 어느 틈엔가 뒤따라 나온 상태였다. 크리스티나는 하얗게 빛나는 활을 쥔 채 다가와 주군의 안위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고맙다. 딱 맞추어 와주었구나.”
잔잔히 웃어준 그는 당황과 경악으로 굳어진 마을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셨다시피 저것은 백호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가짜였다고?”
“그러면 백호님은? 진짜 백호님은 어떻게 된 건가?”
백호를 부르는 제에서 백호가 아닌 엉뚱한 호랑이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황망히 물었다.
“진짜 백호는 아마도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그가 다루는 바람은 미약하게나마 근처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기운을 읽어냈다.
호랑이의 사체는 검은 가루가 되어 우수수 바람에 흩날렸다. 사령에 잠식당한 존재의 비참한 말로였다. 한번 사령에 사로잡힌 자는 그 육신과 영혼조차 모조리 검게 물들어 사라진다. 동물이라 해도 예외란 없었다.
호랑이가 검은 가루로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리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푸라기에서 넘실거리던 불길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헌데 자네는 대체……?”
누군가 쥬다스를 향해 우물쭈물 물었다. 우아한 자태의 푸른 늑대가 양순하게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정령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눈엔 루니도 역시 신수 중 하나로 보였다.
“루바르잔에서 온 객일 뿐입니다.”
쥬다스는 단순명료한 답을 내어놓고는 무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불이 꺼진 짚단 앞에 서서 멍하니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하지만 이상해, 이그레트.」
유니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걔들은 동물계 정령 중에서도 신수라 불릴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야.」
「그렇다요! 자연계로 치면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요.」
「저런 허접한 사령 따위에 놀라 도망갈 만큼 약해빠진 애들이 아니라고.」
그들은 지금 바람의 안내를 따라 백호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녹색 바람은 사방으로 퍼져 목표를 찾아다녔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백호를 찾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유니의 힘이라면 상황은 달라졌다.
조금 시간이 거리긴 해도 바람은 끈질기게 백호의 기운을 추적해 흔적을 잡아냈다.
「그럼 유니, 문제는 그 망할 놈의 사령술사가 사방신수 자체를 노렸을 경우겠네요.」
사령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면 그 근원을 피해 달아났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유니는 카니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노린다고 노려질 애들이야? 계약자도 아닌 인간이 신수라 불리는 정령을 손쉽게 사령화시킬 수 있을 리가 없어.」
「으응, 그치만. 저도 당했었잖아요?」
순진한 눈으로 대꾸하는 카니를 보며 유니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우, 그땐 네가 방심해서 그랬던 거고! 그러게 모르는 소환진은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니랬잖아?」
「에헤헤, 미안해요오…….」
카니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