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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반짝이는 녹색 바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그들이 건너온 산맥, 즉 서요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라 어둡진 않았지만 산 전체에 스산한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구불구불 자라난 침엽수림이 하늘을 가려 바늘 같은 뾰족한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여기 봐봐!”
란이 수풀을 헤치고 먼저 총총 뛰어갔다.
픽시인 그녀는 산을 타는 발걸음이 한 마리 사슴처럼 가벼웠다.
“누군가 싸웠나 봐. 엄청 큰 나무가 통째로 부러졌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낮게 자란 나뭇가지를 허리 숙여 간신히 통과해 낸 에단이 그 흔적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난장판이로군.”
마치 땅을 쟁기로 갈아엎기라도 한 듯 풀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뿌리째 뽑힌 풀과 나무들이 뒤엉켜 흙바닥을 뒹굴었으며 여기저기 발톱자국과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가거나 큰 힘에 의해 부러진 거목들도 보였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현장 보존이 잘되어 있는 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군요.”
크리스티나가 바닥을 뒹구는 나무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의 세밀한 관찰대로 부러진 나무들은 이끼가 앉거나 색이 바라지 않고 싱싱한 나뭇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이지도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누구랑 싸운 걸까요?”
“…….”
쥬다스는 섣불리 답하는 대신 차분히 망가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동물계 정령 중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백호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상대라.’
경우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턱을 짚은 채 누군가를 떠올리는 찰나 근처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응?”
쪼그려 앉아 파헤쳐진 흙더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란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쇄애액!
수풀 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가 쥬다스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근처에 닿기도 전에 역으로 목을 물려 쿠당탕 엎어지고 말았다. 콧등에 험악하게 주름을 잡은 푸른 늑대가 습격자의 목을 물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깨갱깽!”
곧장 항복의 뜻이 담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루니는 봐주는 것 없이 상대의 목을 문 채 이리저리 흔들었다.
“루니.”
계약자의 부름이 있고 나서야 루니의 포악한 응징이 멈추었다.
목을 놓아주긴 했지만 푸른 늑대는 우아한 앞발로 상대의 머리를 턱 누르고 섰다.
물거품이 뽀로록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자비하게 짓밟힌 채 엎어져 있는 작은 습격자에게서 낑낑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유니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톡 내려앉았다.
루니의 발밑에 깔린 습격자는 옴짝달싹 못하고 코만 훌쩍였다.
「내가 알던 모습이랑 좀 달라졌는데?」
「그러게요. 작네요.」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우람한 체격의 호랑이가 아니라, 이제 갓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 다닐 법한 새끼 호랑이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다.
작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가득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너…….」
「너?」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새끼 호랑이가 웅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끄흑 하고 설움을 터뜨렸다.
「너무하다냥! 흡, 흐읍.」
백호는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겁에 잔뜩 질려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백호를 둘러싼 일행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이게, 아니, 이 애가? 아니, 어. 그러니까 이분이 백호…… 예요?”
세이지가 적절한 호칭을 찾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먼저 덤벼놓고 뭐가 너무해?」
「느아아, 헷갈렸다냥! 요즘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변태가 있단 말이다냥. 벌써 몇날 며칠을 쫓겨 다녔는지 모른다냥. 니들이 내 맘을 어떻게 알겠느냐앙!」
호랑이 주제에 고양이처럼 냥냥거리는 백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유니의 눈초리가 북풍한설처럼 매서워졌다.
「오호라. 그래서 그 변태랑 이그레트를 헷갈렸단 말이지? 그게 더 나빠!」
끼잉.
백호는 납작 엎드린 채 꼬리를 말고 달달 떨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자, 잘못…… 했…….」
비록 작은 모습이었지만 백호는 자존심이 강한 동물이었다.
기세에 눌려 수긍할 뻔했지만 도무지 인간에게 사과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백호는 루니에게 머리를 밟힌 채 네 발을 수영하듯 버둥거리며 낑낑 울어댔다.
「……지 않다냥! 캬악!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냥! 억울하다냥! 집에 가고 싶다냐릉.」
「얘 좀 봐. 지금 뭘 잘했다고 땡깡질이야? 확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까 보다.」
냐아악!
백호는 안간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서럽게 울었다. 조금 떨어져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힘을 많이 소진한 듯싶구나. 백호의 본체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므앙?”
아직 루니에게 머리를 눌린 채였기에 백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목소리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버둥거림을 멈추고 축 늘어진 백호가 귀를 쫑긋거렸다.
「…….」
그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호가 아리송한 기분에 빠져 있는 사이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쥬다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상태로 사령에게 쫓기느라 힘들었을 테지. 지금껏 잘 버텨왔다.”
‘아. 익숙한 냄새.’
백호는 코를 킁킁거렸다. 낯설지만 동시에 그리운 향이 났다.
머리를 짓누르던 푸른 늑대의 앞발이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백호는 또로록 소심하게 눈알을 굴려 상대를 확인했다.
‘금색 눈동자라 해동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쥬다스로부터 익숙한 기운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머리색을 바꾸는 마법 인챈트도 걸려 있는 걸 알아차린 백호가 기억 속에서 나직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하윤 공주…….」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분명 그녀의 피가 흘렀다. 백호의 겨울 하늘빛 눈이 그리움을 담고 일렁였다.
「응?」
「‘이하윤’.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랑스러운 어린 공주. 어느 날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한참 찾아다녔는데.」
유니의 질문에 백호는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답했다. 그리곤 살갑게 그의 손에 턱을 얹었다.
「왜 이제야 돌아온 거야, 공주…….」
물기 어린 환대였다. 쥬다스는 이 작은 백호가 기억 속 어린 하윤공주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를 느끼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란다.”
「므아앙? 하지만 공주의 냄새가 난다냥. 공주가 아니라면 너는 누구다냥?」
“쥬다스.”
뒤의 제국식 성을 붙여봤자 백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대신 쥬다스는 다른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내…….”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 죽, 그에게는 제대로 사용해 볼 기회가 없던 생소한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가 망설이자 유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줬다.
「하윤은 그를 낳아준 어머니야.」
「저 애가 하윤 공주의 자식이라고?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흐른 거다냥?」
백호는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댕그랗게 떴다.
「이럴 수가! 하윤공주가 아니라 그녀의 피를 이은 새 공주였다니!」
「아니, 공주가 아니라 황자.」
「냥?」
「여자 아니고 남자. 아까부터 웬 헛소리야? 눈도 좋은 애가 왜 제대로 보질 못하니, 응?」
백호는 유니와 쥬다스를 천천히 번갈아보곤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크헝 울부짖었다.
「안 돼애애! 나, 난 사내아이보단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좋다냥!」
「……뭐 이런 변태 호랑이가 다 있어. 솔직히 말해봐. 니들 그동안 계약 안 한 거 마음에 드는 공주가 없어서 그랬지? 앙?」
「알 게 뭐다냥! 이제 다 틀렸다냥! 크허엉.」
“갑자기 백호가 왜 저러는 겁니까?”
정령의 말이 들리지 않는 에단이 앞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는 백호를 쳐다보며 곁에 서 있던 란에게 물었다. 그러자 란은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자기에겐 이제 꿈도 희망도 없대.”
“……?”
“공주가 많이 그립나 봐.”
“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서로 어리둥절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백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쥬다스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 너를 쫓고 있다는 자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여자였어.」
「이 밝힘증…….」
「캬악! 그게 아니다냥!」
백호는 슬금슬금 멀어지는 유니를 향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여자긴 여잔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냥.」
「뭐래. 죽은 여자가 널 따라다닌다고?」
「말이 그렇게 되냥? 비슷하지만, 그 여자는 사령이었다냥. 처음엔 그 사령을 부리는 술사한테 당하긴 했는데 그때 힘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크으으, 그 자식들 이제는 아주 날 사냥하고 있다냥!」
그 내용만으로도 쥬다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야.’
사령이 된 소녀와는 사막에서 바이칼을 구하러 갔을 때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다.
사령술사가 되어 인간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는 프리드와 할더, 두 사람과 다르게 레이야는 완전히 사령화가 진행되어 사령 그 자체로 변모한 상태였다.
그녀에겐 인간으로서 느껴온 감정, 기억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령이 되어버린 자는 그 전과는 아예 별개의 존재나 다름없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탐하며 생명을 앗아가려 든다.
그저 한 마리의 악마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소녀는 ‘레이야’가 아니었다.
백호를 쫓는다는 사령이 그녀란 보장은 없었지만 쥬다스는 그럴 가능성을 높게 잡았다.
사방신수라 불리는 존재를 기진맥진하게 만들 힘과 전략, 도구가 있는 존재라면 아마도 프리드가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프리드가 백호를 취하기 위해 보내온 사령이라면 평범한 하급 사령보다는 살아 있는 인간을 타락시켜 만들어낸 ‘레이야’를 보냈을 확률이 높다.
쥬다스는 그에 대한 생각을 머리 한 구석에 남겨둔 채 일단 상황을 정리했다.
“여튼, 지금은 너도 힘을 많이 소진한 상태겠지. 여기 계속 홀로 있으면 위험할 게다.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겠느냐?”
「억! 진짜 그래도 되냥?」
백호는 냉큼 대답해 놓고 다시 핫 하고 말을 바꿨다.
「내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냥. 날 쫓아다니는 변태가 진짜 질기고 독한 놈이라 진절머리 나서.」
「누가 누구더러 변태라는지 원.」
작고 하얀 호랑이는 유니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몸을 일으켰다.
「착각하지 마라냥. 하윤 공주의 핏줄인 네가 같이 가자고 부탁해서 가는 거 뿐이다냥!」
“그래, 아가.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다.”
인자하게 얼러주는 말을 듣고서야 백호는 자존심을 세웠다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그릉거렸다.
이제 그에게 안아달라는 뜻으로 앞발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였다.
텁!
“음?”
「믕?」
푸른 늑대가 백호의 뒷덜미를 물고 들어 올렸다.
루니는 새끼를 물고 이동하는 어미개 마냥 그렇게 녀석을 입에 물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넌 나랑 간다.」
「히엑?」
「……이그레트에게 귀찮게 굴지 마.」
정령들의 유별난 계약자사랑을 느낀 백호가 뒷덜미를 물린 채 주둥이를 삐죽거렸다.
「아리따운 공주도 아니고, 뭘 그리 싸고도는 거다냥?」
답이 돌아오지 않자 꽁알거림은 줄곧 이어졌다.
「자고로 계약자라고 해서 뭐든 오냐오냐 해선 안 된다냥. 계약자가 정령님들을 모셔야지, 우리 정령이 계약자를 모실 수는 없는 거다냥. 정령도 정령 나름의 자존심을 지켜야……!」
「으응, 저기.」
「냥?」
쥬다스의 어깨에 달라붙어있던 카니가 다소곳하게 백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박해 보이는 다홍빛 눈동자를 깜빡인 카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 궁금하니까 닥쳐요.」
「냐…….」
그렇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한주 중 가장 바쁜 금요일입니다 @[email protected]!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ㄷㄷㄷ
그럼 즐거운 불금+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