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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행사를 구경한다고 나갔다가 웬 새끼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온 쥬다스를 본 바이칼의 첫마디는 이랬다.
“전 플루비로 충분합니다, 전하.”
“…….”
“정말입니다.”
쥬다스가 멀거니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자기 얘기 하는 줄 알아차린 푸른 와이번이 쫑쫑 달려와 긴 꼬리를 살랑거렸다.
“삐이!”
그러자 루니는 플루비의 앞에다가 물고 있던 백호를 툭 떨어뜨렸다.
배짱도 좋게 늑대에게 뒷덜미를 물린 채 고롱고롱 잠들어 있던 호랑이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다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플루비의 주홍빛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치곤 기겁하여 하악 털을 세웠다.
「갸아악! 용! 용이다냥!」
「……용족이긴 한데 걘 그냥 와이번이야.」
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백호를 진정시켰다.
플루비를 향해 청룡 일족이냐며 난리 블루스를 추던 백호는 끝내 콜이 펴놓은 이부자리 밑에 기어들어가 오들오들 떨었다.
이불 밖으로 하얀 꼬리만 남겨 놓은 채로.
플루비는 그 앞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를 따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근데 뭘 데려오신 겁니까?”
「헹, 인간 녀석. 용족을 길들였다고 우쭐해하지 마라냥. 이 몸은 그 이름도 위대한……!」
“엄청 겁이 많은 고양이네요.”
「누가 고양이다냐―!」
백호에겐 안타깝게도 쥬다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령의 언어를 듣지 못했다.
픽시인 란조차도 정령들이 실체화하지 않으면 보고 듣는 게 힘들 정도였다. 동물계 정령인 백호의 경우 자연계 정령과 다르게 늘 실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정도 정령사도 아닌 바이칼의 눈에는 힘을 잃고 작아진 백호가 그저 하얀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작게 혀를 찬 에단이 짤막하게 백호의 정체를 일러주었다.
“신수다.”
“하아?”
이불 밑에 기어들어가 궁둥이를 씰룩거리는 새끼 호랑이의 모습은 전혀 신령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숙소까지 백호를 물어다 나른 루니가 훨씬 신성해 보일 지경이었다. 푸른 늑대는 고고한 자태로 계약자의 곁에 되돌아갔다.
“해동을 수호하는 사방신수 중 하나인 백호란다.”
쥬다스는 루니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주며 백호에 대해 소개했다.
“소문대로 누구와도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름은 없을 터.”
정령은 술사와 계약하면서 이름을 부여받는다. 백호가 ‘백호’라 불리는 건 단순히 그를 상징하는 종족명일 뿐 이름은 아니다.
술사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한 정령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극히 제한된다.
계약을 맺고 나면 그 뒤로부터 외형, 성격 등을 비롯한 세부적인 능력치가 조정되며 계약자의 의지와 정신을 통해 힘을 외부로 끌어내 사용할 수 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도구라 할지라도 의지를 가지고 사용할 주인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법이다.
정령에게 있어 술사란 마치 그들을 다스리는 사령탑, 즉 두뇌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 현재 계약자가 없는 백호는 아주 기초적인 능력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힘을 발현시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불 속에 숨은 백호가 시무룩하게 꿍얼거렸다.
「계약자만 있었어도 이런 꼴은 안 당했을 거다냥…….」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왜 안 한 건데? 너흰 그동안 해동의 왕가와 대대로 계약을 유지해 왔잖아?」
유니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불 위에 톡 내려앉았다. 카니와 토니는 쥬다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질문을 더했다.
「당신들의 그 천 년도 넘게 이어져온 뚝심은 정령계에서도 유명하죠. 하지만 슬슬 생각이 바뀌었나 봐요?」
「오앙? 그럼 이제 계약하기 싫어진 거다요? 해동을 떠나는 거다요? 떠나면 어디로 간다요?」
「떠나긴 누가 떠난다고? 그런 게 아니다냥. 싫어질 리가 없잖냥!」
단호한 부정이었다. 쥬다스가 느끼기에도 백호는 여전히 이 나라를 사랑했고, 해동의 왕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결론은 단순했다.
‘계약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했을 뿐이다.
쥬다스는 사방신수가 현재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백호가 다른 정령들의 질문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갸릉. 어차피 너희들은 말해도 모를 거다냥. 한 번도 배고파 본 적 없는 너희한테 이 허전함을 설명해봤자……?」
덥석!
이불 밖에 빠져나와 흔들거리던 꼬리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꼬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플루비가 묘한 사냥 본능을 자극당해 콱 물어버린 탓이었다. 난데없이 꼬리사냥을 당한 백호가 캭 털을 세우며 버둥거렸다.
「아아아아, 이거 놔라! 놔라, 용족!」
“삐?”
「싸, 싸우자는 거냥! 치사하게 꼬리로 이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붙어라!」
“삐이이!”
플루비는 순순히 꼬리를 놔주었다. 어린 와이번은 백호를 아주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꼬리의 자유를 찾자마자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후다닥 물러선 백호를 향해 플루비가 삑삑 울며 달려들었다.
사람들 입장에선 플루비도 작은 사이즈였지만 힘을 잃고 새끼 호랑이만큼 작아진 백호에게는 괴수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쿵쿵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백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느아아아앙!」
와이번과 백호 사이에 엉뚱한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한쪽은 놀이라 생각해서 달려들고 한쪽은 기겁하여 도망가는 꼴이었다.
정신 사납게 방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바이칼이 표정을 구겼다.
“맙소사, 골칫덩이가 두 배…….”
쥬다스가 그런 바이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서로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구나.”
“뭐, 그렇긴 합니다. 놀이상대로는 딱이겠네요.”
생각해 보니 평소 와이번의 넘치는 체력을 감당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이제 한밤중에 와이번 소리에 깨어나 비몽사몽으로 산책을 나다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바이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으로 뻔히 속내가 드러나는 그에게 쥬다스는 웃음을 삼키며 한 마디를 추가했다.
“백호는 내가 관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예? 아닙니다. 그러실 것까지야.”
“저 아이도 정령이니 그러는 편이 좋아. 참, 바이칼 너는 플루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였지?”
“그…… 건.”
“놀랍구나. 어찌 그리도 귀애하게 되었느냐?”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바이칼은 손사래를 치며 쩔쩔매었다.
귓등까지 붉어져 어버버거리는 그를 향해 잔잔히 웃어준 쥬다스의 시선이 다시 백호에게로 향했다.
녀석은 뛰어난 점프력을 이용하여 높은 장롱 위까지 달아났다가, 곧 날개 달린 와이번에게는 높이 따위 소용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야옹 울어댔다.
쥬다스의 금안에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또한 그래야만 내가 널.’
곧 추적자가 백호를 쫓아올 것이다.
백호의 설명대로라면 이 일에는 틀림없이 프리드가 연관되어 있다. 쥬다스가 일행에게 설명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였다.
해동의 수호신 백호를 보호함과 동시에 덫을 놓는다. 그의 곁에 있는 이상 백호에겐 견고한 방패막이와 웅크린 사냥꾼, 두 가지가 갖춰진 셈이었다.
「이그레트.」
정령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우린 언제나 네 편이지만.」
유니가 나비처럼 날아와 쥬다스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따스한 미풍이 실내를 은은하게 감쌌다.
「가끔은 조금 걱정되기도 해.」
그들의 계약자는 고지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곧았다. 이전 삶에서 그는 심지어 세상에 섞이기를 거부하고 홀로 늙어 죽는 것을 택했다.
그랬던 그가 차츰 변화하고 있었다. 선의나 정의 따위보다 좀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생겨났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평을 유지했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도 있게 된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야말로 과거 그의 등에 칼을 꽂았던 배신자들이 원했던 바일지도 몰랐다.
「네 선택이 또다시 널 아프게 만들까 봐.」
정령들이 걱정하는 건 그가 욕심을 가짐으로써 일어나는 불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바란다면 무엇이든 어렵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웠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세상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어 상위 초월자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정령의 걱정이란 마치 엄마들이 처음 가위를 잡아본 아이가 가윗날에 손이라도 베일까 염려하는 것과 같았다.
쥬다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조용히 불안에 잠긴 그들을 토닥여 주었다.
「……아무리 봐도 과보호다냥.」
결국 플루비에게 잡혀 하얗고 보드랍던 털이 온통 침 범벅이 되고만 백호가 그 모습을 보곤 뚱하니 투덜거렸다.
다음 날, 일행은 흑호 사건으로 인해 어수선하게 변한 분위기의 마을을 벗어나 발길을 재촉했다.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추가되었지만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비록 외형은 작아졌어도 백호는 신수다. 고작 말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오히려 달라진 건 플루비 쪽이었다.
“삐! 삐약, 삐이익!”
“아 거참 시끄럽네. 이게 와이번이야, 병아리야.”
“쁘익.”
바이칼은 바르작대는 플루비를 품에 가둔 채 목줄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새 친구를 만나 신이 난 플루비는 끊임없이 백호에게 치근덕거렸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플루비를 힐끗 쳐다본 백호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껏 변태 추적자를 떨쳐냈더니 이번엔 왜 또 용족이 달라붙는다냥.」
「왜? 귀엽잖아.」
유니가 키득키득 웃자 백호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세상에서 용이 제일 싫다냥! 그것도 청룡!」
「에이, 쟤는 청룡이 아니라 와이번인걸.」
「비슷하게 생겼쟈냥!」
해동에서 사방신수는 같은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긴 하나, 서로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나빴다.
백호는 특히 청룡을 아주 싫어했다.
「용이란 것들은 다 재수가 없다냥. 그나마 주작과 현무는 솔직하기라도 하지! 청룡은 완전 이중인격이다냥!」
「으음, 하긴. 걔가 그렇긴 하지.」
마찬가지로, 청룡은 자연계 정령들을 만날작시면 종종 백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응? 아하, 그 시끄러운 고양이? 안 싫어해, 안 싫어해. 귀찮을 뿐이지. 그 녀석 쓸데없는 말이 좀 많으니까. 근데 아깽이가 깽알깽알 떠든다고 해서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잖아?’
유니는 오래 전에 만났던 청룡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표정은 밝았지만 어투에는 확실히 혐오와 짜증이 담겨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잘라서 다시는 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낫지. 아하하~ 농담이야.’
가장 웃음이 많고 친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방신수 중 가장 다혈질이 청룡이다.
청룡은 사람 목을 자를 때에도 한결같이 웃었다.
그자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해 내는 건 오랜 세월 함께 한 사방신수라도 무리였다. 백호는 바로 청룡의 그 안개 낀 듯 불투명한 심리를 치 떨리게 싫어했다.
「아직도 그러려나?」
「자기 성깔이 쉽게 변하는 거 봤냥? 청룡 그 자식은 소멸하는 순간까지 절대절대 변하지 않을걸!」
으름장을 놓는 백호를 보며 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치만 나요는 청룡 좋아한다요. 전에 청룡이가 반짝이는 보석도 줬다요!」
「으이익. 그런 거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본질을 보란 말이다냥. 솔직히 성격만으로 따져 봐라냥. 그 음험한 자식과 늠름한 이 몸 중에 누가 더 좋으냥?」
「청~ 룡!」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1초의 고민도 없이 해맑게 답하는 토니를 보고 백호의 입이 댓 발은 더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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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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