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53화 (15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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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해동은 얕은 산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언덕길이 잦았다.

노랗고 하얀 봄꽃들이 활짝 만개하여 가는 길목을 장식했다.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을 따라가길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듯한 커다란 강과 조우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폈지만 강을 건너는 것 외엔 더 앞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어보였다.

자갈이 깔린 강가에는 크고 작은 돛단배들이 오밀조밀 늘어선 나루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한다면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굉장한 이목이 집중될 터였다. 쥬다스는 그런 상황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일단 배편을 구하기 위해 나루터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왁자지껄한 소리가 커졌다. 나루터에는 배를 관리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

세이지가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보았다.

황궁에서 자란 세이지는 강가 풍경이 생소한 게 당연했지만 지금 느껴지는 어색함은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해동은 항구 문화가 굉장히 독특하네요.”

특이하게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아예 화장실부터 취침 시설까지 조립식 건물을 넓게 지어놓고 처소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상단 단위로 우르르 몰려와 천막을 치고 대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설마하니 이게 다 강을 건너려는 대기자들일까요?”

“글쎄다, 세이지. 내 보기엔  아무래도 해동의 문화라서가 아니라.”

동생의 순진한 물음에 쥬다스는 말뚝에 매어 있는 배들을 눈짓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성싶구나.”

강을 건너려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운행하는 배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빈 배는 많았다.

특별히 날씨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구름이 살짝 끼긴 했으나 하늘은 청명했으며 바람도 선선했다.

세이지는 조금 전보다 훨씬 깊은 의문에 빠졌다.

“특별한 이유요?”

“무엇인진 몰라도 그 이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제법 오랫동안 이 강을 함부로 건너지 못하도록 만든 모양이다.”

어차피 이방인인 그들끼리 대화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다. 마침 근처에서 그물을 깁던 뱃사람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어이쿠, 타향서 온 객들인 모양이구려. 그렇담 모를 만도 하지. 이곳 다온강은 청일과 홍일이 정해져 있다오.”

삿갓을 눌러쓴 중년의 사공이 친절히 답해주었다.

배를 운행할 수 있는 날을 청일, 운행이 금지된 날을 홍일이라고 한다.

이는 색깔에 따른 의미부여로 해동에서 푸른색은 ‘희망’과 ‘통과’를 뜻했으며 반대로 붉은색은 주로 ‘금지’, 혹은 ‘불통’을 상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배를 운행할 수 없는 홍일이었다.

“그럼 얼마나 지나야 청일이 돌아옵니까?”

사공은 며칠이라 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강을 가리켰다.

“뱃길이 열리는 때는 다온 님께 달려 있지.”

에단은 상대가 말하는 ‘다온’이 강 이름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다온이란 존재가 강에 살고 있다는 뜻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아 침묵했다.

그 침묵에 대고 깊이 한숨을 내쉰 사공이 마지막으로 충고를  덧붙이고 그물을 마저 손질하기 시작했다.

“명심하게. 다온 님이 허락하지 않는 날에는 절대로 강을 건너려 들어선 안 돼. 하기사, 목숨 귀한 줄 안다면 억만금을 주어도 배를 띄우겠다는 사공은 없을 테지. 쯧.”

혀를 끌끌 차는 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답답해서인지 멋모르고 찾아온 객들이 가여워서인지 통 모를 일이었다.

다른 배를 찾아가 물어도 사정은 같았다. 누구도 배를 띄우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 홍일이란 게 언제까지 지속되는지조차 몰랐다.

강을 건너려면 그야말로 무식하게 죽치고 앉아 청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때를 놓치면 다시 하염없이 기다려야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에단이 그 비효율적인 상황에 대해 보고하자 일행은 난처한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엉뚱한 이유로 발이 묶이게 생겼다.

정령의 힘을 사용해서 건너갈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막연히 청일이 되기를 기다릴지 결정하는 것은 쥬다스의 몫이었다.

그는 행로를 정하기 전 찰랑이는 강물에 다가가 수면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푸르렀다. 그러나 강의 중턱쯤에만 기름이라도 부은 듯 색이 거무죽죽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게다가 특정 부분에서 유독 기포가 부글부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바로 저 검은색 강물과 솟구치는 기포를 보고 청일과 홍일을 구분해 냈다.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강을 건너도록 허락되는 날은 물색이 깨끗하고 기포가 생기지 않는 청일이었다.

쥬다스는 물에 살짝 손을 담가 보았다. 수온은 별 이상 없이 차가운 편이었다.

「자, 멍뭉아. 강에 뭐가 있어? 딱히 다른 정령이 장난치는 것 같진 않은데. 그지?」

유니가 루니의 콧잔등에 내려앉으며 물었다.

같은 자연계 정령이긴 해도 바람속성은 물속 사정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푸른 늑대는 제 콧등에 자리 잡은 유니를 향해 눈을 모았다.

「정령은 아니다. 그리고 멍뭉이도…….」

「그럼 뭐다요? 설마하니 또 블루 와이번이라도 들어 있는 거다요?」

갑작스럽게 토니가 대화에 끼어드는 바람에 무언가 더 부정하려던 루니의 말이 싹둑 잘렸다.

어쩐지 억울해진 푸른 늑대의 눈시울이 살짝 촉촉해졌다.

「……비슷해. 뱀이다.」

「배앰?」

세 정령이 일제히 플루비를 돌아보았다.

“삐이이.”

바이칼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플루비가 꼬리를 살랑였다.

닭 한 마리 크기로 줄긴 했지만 명색이 용족인 플루비는 정령왕들의 시선을 예민하게 읽어냈다.

사실 따지자면 와이번도 뱀과 흡사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와이번은 명백히 용족에 해당된다.

용족과 뱀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날개의 유무에서부터 갈린다.

「이무기. 용으로 자라나지 못한 동방계 해츨링이다.」

「헤에. 동방계 해츨링은 한 번도 본 적 없다요!」

「사실 동방계 용족은 예전에 용계로 떠나버린 드래곤 일족하곤 또 다른 애들이니까. 해츨링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해.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지만.」

동방계 용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권능을 가진 채로 부모 용의 극진한 보호 아래 안전하게 성룡으로 자라나는 서방계 드래곤과 유년시절이 달랐다.

동방의 용족은 알을 낳으면 품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알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홀로 태어나 알아서 생존법을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서방의 드래곤처럼 유년시절부터 모든 권능을 품고 태어난다면 그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하필 용으로 성장하기 전의 ‘이무기’들은 종족 권능, 즉 용언을 사용할 수 없는 약체였다.

일반적인 뱀보다야 체구가 크고 어느 정도 자잘한 마법을 부릴 수야 있지만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살아남기에 생태계는 너무 혹독했다.

그렇기에 모든 이무기가 다 용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착실히 살아남아 천 년의 긴 수명을 채우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각성이 일어나 용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크고 독특한 뱀의 일종일 뿐이었다.

물론 이무기 정도라면 배를 뒤집거나 폭풍우를 불러와 사람을 위협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무기가 사람의 뱃길을 막고 있는 거람?」

조용히 지내며 천 년간 살아남는 게 목표인 이무기들에게 지금 상황은 득 볼 것이 하나 없는 장난질 수준이었다.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텐…… 윽.」

루니의 콧등에 앉은 채 중얼거리던 유니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계약자와 감정을 공유하는 정령들에게 있어 술사의 갑작스런 감정변화는 전기충격과도 같이 찌르르 전달되어 왔다.

계약자가 강하게 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 정령도 역시 강압적으로 해당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니는 살짝 몸을 움츠린 채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이그레트…….」

“아.”

그는 스멀스멀 머리를 옭죄던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미안하구나.”

「훌쩍,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그보다 대체 왜?」

「우아앙!」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감정에 노출되었던 정령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장 어린아이 같은 토니는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단순히 한 가지로 정의할 법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이런 실수를.’

평소에는 감정에 대한 통제를 잘 하는 그였으나 순간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쥬다스’로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인 탓일 수도, 아니면 새삼스럽게 빗장을 걸어두었던 인간적인 감정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걸지도 몰랐다.

쥬다스는 입가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쥬다스 님?”

그를 주시하고 있는 건 정령들만이 아니었다.

곁에 선 수하들은 강물을 쳐다보다 표정이 굳어지는 그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혹 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대입니까?”

“으음, 그래서가 아니란다. 오히려 너무나도 연약하고 안쓰러운 아이기에.”

“예?”

차라리 강한 자의 횡포라면 콧대를 확 눌러 벌을 내리면 될 일이다.

포악한 괴수라면 물리치면 되고 나쁜 저주가 걸려 있다면 해제할 방도를 찾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새싹처럼 여리고 찢기기 쉬운 어린 생명이었다.

채 자라지 못해 약하고 순수한 생물이 질척질척한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면, 이는 돌이킬 방도가 없다.

「사령화가 되었구냥?」

휙!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던 백호가 그의 곁으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냈던 루니가 망설임을 담고 긍정했다.

「……그 말대로다.」

「그럴 줄 알았다냥. 요즘 이 나라에 사령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백호는 앞발을 핥아 털을 고르며 도도하게 말을 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계약자가 없는 지금 우리 사방신들도 위험하다냥. 수호특화인 내가 겨우 견뎌냈을 정도면 진격특화인 청룡과 주작은 이미 당했을지도 모르고냥!」

「너 수호특화였어?」

「크르릉. 호랑이는 수호특화면 안 되냥? 왜 그런 눈으로 본다냥?」

「어, 안 될 건 없지만 뭔가 좀…….」

유니의 떨떠름한 시선에 수염을 꿈틀거린 백호가 툴툴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한 번 사령화가 완료되었으면 끝이다냥. 저 이무기는 그래도 용의 후손이라고, 폭주하는 자아를 한 번씩 되찾긴 하나 보다냥.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거다냥.」

「잠깐, 그렇다는 건.」

「죽여라냥.」

쥬다스는 물끄러미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백호가 말한 대로였다. 사령화가 된 존재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탐한다.

지금까지야 이무기가 스스로 어떻게든 억눌러 왔다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들 것이다.

이젠 죽여서 멈추는 수밖에 없다.

「사령화가 완료되기 전에 일찍 정화를 시켜주었다면 살았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냥.」

쥬다스는 마주보던 백호의 푸른 눈동자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강 밑에는 채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용의 희생이 존재했다.

이무기는 강물위로 끓어오르는 기포만큼이나 바글바글 끓어대는 검은 욕망을 참아내느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령에게 잠식당한 어린 이무기가 이 안에 있다는구나.”

“……!”

술렁임은 짧았다. 놀란 것과 별개로 수하들은 이어질 주인의 선택을 기다렸다.

“하여 우린 바람을 타고 이동할까 한다.”

가급적 편리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접하려는 의도에는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

왜냐고 묻는 것만 같은 시선들에 대고 쥬다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내게는 이 강을 건널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니가 불러온 녹색 바람이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회오리에 천막이 펄럭이고 강물이 파도쳤다.

큰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유니의 바람은 쥬다스 일행을 감싸고 신기루처럼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야가 바뀌기 직전, 에단은 흘낏 기포가 끓던 강 중턱을 바라보았다.

‘말씀인즉 무엇에 대한 용기셨습니까.’

더 이상 검은 기포는 솟구치지 않았다. 대신 젖은 나무를 태우고 남은 연기처럼 새카만 핏물이 켜켜이 번져갈 뿐이었다.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한 이무기는 얼어붙은 창날에 심장을 꿰뚫려 즉사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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