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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사신수-백호
일행 전체를 깔끔하게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킨 후 바람은 봄날 꽃가루처럼 반짝이며 흩어졌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가라앉으며 발이 땅에 가벼이 톡 닿았다. 갑작스런 시야 변화에 놀란 말들이 연달아 투레질했다.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세이지는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멀리 흐릿하게 나루터가 보였다. 사람들은 아마 곧 청일이 되었다며 기쁘게 배를 탈 것이다.
뱃길을 막은 존재가 사실은 이무기였고, 그 이무기가 사령에 물들어 타락해 있었으며, 조금 전 죽어 사라졌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외로운 죽음을 기억하는 건 타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전부라는 사실에 세이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
푸릉거리는 말의 목덜미를 토닥여 진정시켜 주던 쥬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정작 그를 부른 세이지는 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이 이 시대를 떠났어도 강물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렀다.
“자의와 상관없이 사령에게 잠식되는 것과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직접 사령과 계약하는 건요…….”
아이는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는 이의 파멸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사령에 의한 타락은 소름 끼치도록 잔혹하고 또 비참했다. 아름다웠던 어머니의 피부가 주글주글 일그러져 조각나던 장면이 눈에 선했다.
“결국 마지막은 같나요?”
당시 어미의 소망은 세이지 자신이었다. 비록 그 방법이 부적절했다 한들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짜였다.
“만약 같다면, 다시 돌이킬 방법은 전혀 없는 건가요?”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지. 하나 사령에 의한 타락은 영혼의 죽음과 같단다. 칼에 찔려 죽는 자와 스스로 목을 매는 자. 결국 마지막은 같지 않겠느냐?”
쥬다스는 세이지의 말을 긍정함과 동시에 현실을 직언했다.
“사령은 늘 호시탐탐 살아 있는 자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유혹하지. 지금 처한 현실이 삶의 바닥이라고 생각하도록.”
가지지 못한 것들만 부각시키고 상처를 마구잡이로 들춰낸다.
부정적 감정이란 쏘시개로 잔뜩 헤집은 가슴에 자그마한 불똥이 튀는 순간 상처 입은 자는 절망한다.
“가령 인생의 점수가 0점부터 10점까지 있다면 나는 지금 0점일 거야…… 라고 말이다.”
분노나 증오가 아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생각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당연하게 지켜오던 법이나 도의마저 상관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죄책감을 잃는다. 사령이 바라는 건 바로 그런 단순한 마음 변화겠지.”
인간의 정신은 아주 사소한 절망만으로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다. 세이지도 그 사실을 절감했다.
“그럼, 사령술사들은 그 누구보다 악독한 죄인이네요.”
“그리 생각하느냐.”
“예, 형님. 왜 모든 나라에서 사령술을 금지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사령술사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부 사라져야 하는 존재군요.”
세상엔 존재해선 안 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들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미련 없이 강을 떠났다.
다온강을 지난 지점부터 이미 해동의 수도권 영역이었다. 수도는 야트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는데 담의 높이는 낮았지만 특별한 방어주술이 걸려있어 허가 없이 함부로 넘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문 이후로는 출입과 외출을 모두 금했다. 해동에서 밤중에는 객으로 찾아가는 게 대단한 무례였다.
수도로 향하기 전 근처 마을에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아쉬운 대로 거기에 머물며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산지가 많고 흙이 거친 해동에선 주로 밭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낮은 풀이 자라난 언덕 사이사이로는 말이나 나귀를 풀어놓고 길렀다.
수도권으로 오면서 쥬다스 일행의 눈에 들어온 가장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말을 돌보거나 마을 내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 등의 보안 역할을 사람이 아닌 존재가 맡고 있다는 점이다.
스륵!
“어우 씨! 깜짝이야.”
놀란 바이칼이 담벼락에 달라붙다시피 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주먹만 한 검은 눈동자로 스륵 그를 훑은 짐승이 다시 구름 흘러가듯 스르르 지나쳐 갔다.
해태들은 힘을 대부분 소진하여 고양이처럼 변해버린 백호라도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쥬다스의 곁에 있는 백호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주로 바이칼이나 다른 일행들에게 다가와 기웃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어딜 가든 해태가 감시하고 있으니 범죄가 일어날 확률은 적겠군.”
“기척 좀 내고 다녔으면 훨씬 안전할 텐데요.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범죄자한테 뒤통수 깨질 확률보다 놀라서 자빠졌다가 머리 깨질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다름 아닌 해동의 토종동물, 해태였다. 해태는 지능이 인간 어린아이 정도로 높고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는 습성이 있었다.
때문에 해동의 수도와 그 주변 마을에서는 잘 훈련된 해태를 풀어놓아 경비를 맡기곤 했다.
“시끄러운 짐승보다는 조용한 편이 낫지 않나?”
“삐!”
에단의 반문에 바이칼은 삑삑 울어대는 게 하루일과인 와이번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니, 조용한 것도 정도가 있죠. 당최 발자국 소리도 안 내고 다니는 게 말이 됩니까?”
해태는 매우 조용한 동물이다. 울음소리가 없는 대신 사슴을 닮은 뿔 두 개로 파장을 주고받으며 동족들과 교신할 수 있었다.
머리부터 몸통 절반까진 파란색, 나머지 절반은 빨간 양털이 복슬복슬 자라며 전체적인 생김새는 양과 사자를 합쳐놓은 듯이 생겼다.
바이칼은 근처 담벼락에 앉아 하품하는 해태 하나를 또 발견하고 표정을 구겼다.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에단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훈련을 하면 가능해진다.”
이 부분에서 바이칼은 따지려다 말았다. 에단이라면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는 기술 따윈 진작에 익혔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는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가 수련이 필요하다며 쓸데없는 훈련 종목만 늘어날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오래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이 방정을 떨었다.
“단장은 정말 안 놀라는 겁니까? 실은 놀랐는데 안 놀란 척하는 거죠?”
“아니.”
“평소에도 그렇게나 기척에 예민하신 분이 아니는 무슨. 아니, 그럼 단장, 해태가 소리 없이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게 거슬리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소리만으로 모든 움직임을 단정 짓지 않는다.”
에단은 막힘없이 답했다. 신체형 이능력자들이 가진 뛰어난 감은 일반인이 느끼는 오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제국 내에서 제일이라 여겨지는 무가 헤이가의 핏줄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욱 우수했다.
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뿐 아니라 시각적인 정보, 또 생물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기 등을 읽고 끊임없이 파악해 냈다.
“이곳 사람들이 자네보다 심신이 튼튼하다는 점만큼은 잘 알겠군.”
“…….”
더 딴죽 거는 걸 포기한 바이칼이 ‘예이, 어련하시겠습니까’라며 고개를 돌리자 에단도 도로 침묵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거리를 살펴보던 크리스티나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군.”
“이런 건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그대 얘기가 아니야.”
“옙?”
뚱하게 대답했다가 톡 쏘는 답변을 받고 머쓱해진 바이칼이 고개를 틀었다.
“잘 봐, 이 마을 전체적인 분위기. 수도를 코앞에 둔 구역치곤 지나치게 무기력하지 않나?”
별 생각 없이 지날 때와 달리 듣고 보니 확연히 그런 특징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거리가 너무 한산했다. 본래 수도를 앞둔 마을이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고 거주민들은 부유한 편이며 해태를 풀어놓아 치안에도 걱정이 없다.
그러니 활기가 넘치고 평화로워야할 거리인데도, 지금은 오히려 스산할 정도로 찬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특히나 제일 사람이 많아야 할 장터에선 노을이 지는 시각이 되자 전부 가게 문을 닫고 자리를 정리해 버리는 등 먼지만 날렸다.
일반 민가에서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문 앞을 밝힐 호롱불만 놓았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소수였고 그마저도 전부 표정이 어두침침했다.
“물론 해동은 밤 문화가 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대문 앞에 호롱을 걸어두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다른 마을에선 지금껏 보지 못한 풍습이니.”
밤에는 각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그것이 해동국민들의 예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상적인 예절을 지키는 사람들치곤 어딘지 몹시 불안하고 동시에 피로해 보였다.
심지어 숙소 주인도 피로에 찌든 얼굴로 충고를 한 마디 했다.
“외지 분들이니 모르시겠지만 이곳에선 어둠이 내린 시기를 조심하십쇼.”
“무슨 일이 있습니까?”
“딱히 큰일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오만.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지. 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죽겠소.”
그는 일행을 각자 방으로 안내했다.
남녀가 유별하니 성별에 따라 한 번 나누고, 인원이 방에 비해 너무 많으니 숫자대로 또다시 나누었다.
두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각 5인씩 방을 나누어 쓰도록 했다.
“혹 가위라고 아시오?”
“가위?”
“그쪽 동네에선 가위도 안 눌리는 모양이군. 모르시면 오늘 알게 될 거요. 요즘 마을에 귀기가 돌아 뉘가 되었든 가위 눌리기가 일상이거든.”
숙소 주인은 졸린 눈을 꾹꾹 누르며 손을 내저었다.
“여하튼 오늘 밤엔 불을 꼭 밝히고 주무시오. 절대로 방 안의 불을 전부 꺼뜨려선 아니 된다오.”
“……?”
주인은 학과 소나무 수가 놓인 자줏빛 요를 깔아준 후 다른 질문은 듣지도 않고 훌쩍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방 안에는 등불 외에도 여기저기 놓인 초가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숙소 주인의 의미심장한 경고 탓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세이지가 촛불을 힐끗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가위’라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저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바이칼이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해동의 문화와 그들이 즐겨 쓰는 특정 단어에 대해 무지한 건 학자인 콜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자다 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악몽을 꾸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 하더구나.”
그나마 정령들로부터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는 쥬다스가 넌지시 그 뜻을 읊었다.
“악몽과 비슷한 상태요?”
“의식은 깨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환청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한다지 무어냐.”
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괴상한 현상이었다. 세이지는 상상도 잘 가질 않아 멍하니 눈만 끔뻑였고, 에단과 콜은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갔으며 바이칼은 홀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위라는 건 무슨 저주입니까? 아니면 속박마법처럼 마력을 이용한다든지…….”
“글쎄, 듣기론 특정한 누군가의 저주나 마법에 의한 현상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자다 악몽을 꾸듯이 자연스러운 게지.”
“하온데 쥬다스 님. 그 현상이 동시에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계속 적용되면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콜이 제법 자라난 수염을 매만지며 현상과 그 정의 사이의 오류를 짚어내었다. 학자다운 논리적인 지적에 쥬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승님. 말씀하신 대로 의도해서든 아니든 분명 가위 눌림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어딘가 존재할 겁니다.”
“허허, 이쪽 관리들도 힘들겠군요. 본디 정신적인 현상은 요인을 찾기 어려운 법일 터. 해결에 애를 먹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태연자약한 분석을 들으며 바이칼의 어깨가 그늘에 둔 화분처럼 칙칙하게 늘어졌다. 그는 플루비를 무릎에 앉힌 채 그 작은 머리통에 턱을 얹고 중얼거렸다.
“와이번은 단순하니까 상관없으려나.”
“삐?”
놀리는 것치곤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플루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좋은 월요일 보내셨나요? 이제 슬슬 3월도 끝나가네요~^^
완연한 봄날씨라 요즘 기분이 참 좋습니다. 슬슬 개나리도 피고 있더군요. ㅎ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