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58화 (15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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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소망

수도 호성을 오가는 인파가 굉장히 많았기에 성문을 따라 긴 줄이 만들어졌다.

그중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내부의 출입을 금했다. 이를 위해 뿔이 3개 달린 특별한 해태가 관문에 서서 방문객의 몸수색을 맡았다.

수상한 주술이 걸려 있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요괴는 삼각해태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주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태에게 발목을 붙들린 건 쥬다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관문에선 주술 도구를 해제해 주십시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원리가 주술과는 달랐지만 제국에서 사용하는 마법 인챈트도 삼각해태의 감시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문을 지키던 군졸의 사무적인 안내가 다시 이어졌다.

“또한 말이나 고양이 같은 일반적인 가축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요괴의 출입은 불허합니다.”

그나마 크기가 작은 백호는 고양이 정도로 봐준 모양이었지만 플루비가 문제였다.

아무리 크기가 작아도 와이번을 평범한 짐승으로 보긴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군졸은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린 란에게까지 요괴라는 의심의 시선을 던졌다.

사실 란은 인간이 아닌 요정족 픽시였기에 삼각해태도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어쩌지? 인간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나 봐.”

란이 울상을 지었다.

사실 제국에서 몬스터나 이종족의 출현이 새삼스럽지 않듯이 동방에서도 요괴란 꽤나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명칭만 ‘요괴’일 뿐 인간과 평범한 동식물이 아닌 이종족은 전부 그 범주에 들어갔다.

해동은 인간과 요괴가 공존하는 나라로, 그들이 사방신수로 섬기는 동물계 정령들도 그 일례였다.

다만 요괴란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한 힘을 갖고 있거나 요술을 부리는 등 대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명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우엔 마음놓고 대하지 못한다.

특히 임금이 거하는 수도에선 그 경계의 정도가 심했다.

“나 여기서 플루비랑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

쥬다스의 소매를 붙잡고 속닥거리는 란에게 군졸이 험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쪽도 요괴인가? 수상하군. 가리개를 벗으시오.”

그 말에 란은 화들짝 놀라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더욱 푹 잡아 내렸다. 누가 억지로 벗길 새라 불안한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군졸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플루비는 삐액삐액 울며 바이칼의 품을 파고들었다.

“쥬다스 님.”

“그래. 이곳은 해동의 심장이니 예의를 갖추자꾸나. 마법진을 전부 해제하여라.”

쥬다스는 착용하고 있던 브로치를 옷에서 탈착하며 부드럽게 명했다.

군졸의 압박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일행은 그제야 발동 중이던 마법도구를 전부 해제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한 이동식결계, 언제라도 시전 가능하도록 대기시켜둔 공격마법진, 그리고 심지어 말들이 잘 달릴 수 있도록 걸어두었던 특성인챈트까지 모두 사용이 중지되었다.

그러자 뒤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어났다.

“은발……?”

소란의 원인은 브로치를 떼어내 색상 변조 인챈트가 해제된 쥬다스였다.

해동민족은 머리도 눈도 전부 검은색이다. 루바르잔 제국이야 영토전쟁을 통해 드넓은 땅을 흡수하면서 다양한 민족이 섞여 색깔도 다양하게 타고난다지만, 해동은 그렇지 않았다.

나라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 타국인과 혼인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어렵게 혼인한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선 후손을 볼 수 없었다.

해동의 피는 무척 강했고 동질이 아닌 피와는 섞이지 않는 특징이 있어 절대로 혼혈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만일 해동 사람이 타국인과 혼인을 하게 되면 둘 사이에선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해동의 왕녀가 루바르잔 황제와 혼인하였을 때, 사람들은 이름뿐인 동맹혼에서 결코 그 결실을 볼 수 없을 거라 예측했다.

“허어, 저토록 깨끗한 은색이라니.”

“물감으로 내려 하여도 어렵겠어.”

“저 색상을 왜 ‘은’이라 부르겠는가? 인간이 아닌 귀한 광석에서나 볼 수 있기에 그렇다지.”

당시 모든 이의 예측을 산산조각 내버린 존재가 바로 제국의 1황자 쥬다스였다.

해동의 왕녀와 제국 황제 사이에서 버젓이 탄생한 그는  해동 민족의 특징인 검은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제국의 황손이었다.

그리고 이젠 황위를 계승하게 될 황태자로 자라났다. 그가 가진 유일무이한 은발금안에 대한 소문은 해동에서도 유명했다.

“설마, 당신은…….”

군졸들이 들고 있던 창을 내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하던 순간이었다.

도성 내에서부터 요란스레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탐문을 중지하라!”

군졸들은 말이 매달고 온 깃발을 확인하고 곧장 물러섰다.

“옛!”

물러선 병사 사이로 군마 세 기가 멈춰 섰다.

어찌나 급히 달려왔던지 먼지구름이 멀리서부터 뿌옇게 이어져 온 것이 보였다.

그들이 달고 온 깃발에는 파란색과 붉은색, 두 색상이 조화롭게 얽힌 해동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마중이 조금 늦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서둘러 말에서 내린 사내가 쥬다스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성왕을 모시는 신하 수호 연, 귀한 객들께 인사드립니다.”

5년 전 황태자 즉위식에 참관하여 해동으로 초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연수호’였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반겨 주어 고맙습니다, 수호.”

쥬다스는 비록 잠깐의 만남이었어도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

당시 수호를 만났던 건 쥬다스뿐이므로 나머지 일행들은 조용히 목례로 인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반짝 손을 들어 올린 란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기, 나도 들어가도 돼?”

“물론입니다.”

“이거 안 벗어도?”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쥬다스가 데려온 일행이라면 픽시가 아니라 설령 마계괴수 발로그(Balrog)라도 막을 이유가 없다.

홀로 성 밖에 남겨질까 전전긍긍하던 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성왕께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호는 관문에서부터 그들을 인계받아 직접 안내하기에 나섰다.

도성 내부는 무척 넓었으며 제국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냥 건물과 평지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돌담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미로처럼 빙글빙글 돌도록 쌓아놓았다. 그 돌담은 얕은 담으로 시작해 마치 계단처럼 켜켜이 점차 높이가 올라갔다.

담에는 저마다 견고한 주술이 새겨져 있어 월담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정확히는, 담을 넘을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 담 위를 지나는 순간 다시 처음의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와지는 특수한 주술이었다.

아무리 급하게 달려가고 싶어도 복잡한 길을 따라 돌아다녀야만 하는 구조다.

안내를 따라 이동하면서 쥬다스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오늘 도착하는 줄을 어찌 아셨습니까?”

“하하! 제국에는 마법사가 있지요? 그처럼 이곳에는 용한 주술사와 연금술사가 있습니다.”

수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호기심을 달래주었다.

“허면 주술…… 입니까?”

“예, 미래를 점치는 무녀가.”

이어지는 말에 쥬다스가 멈칫 했지만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호는 마냥 기쁜 얼굴로 무녀의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손께서 드디어 이 땅을 향할 것이라고.”

“…….”

“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만 해도 그게 오늘일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때마침 신내림을 받아 이리 나와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용한 무녀였다. 보통 점이라 함은 애매한 정보를 뭉뚱그려 짚어주는 난해한 결과가 주를 이룬다.

대부분 해석하기 나름인 내용이 많으며 명확하게 몇 날 몇 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쥬다스는 점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처음 ‘쥬다스’로서 눈을 떴을 무렵 길거리에서 받았던 점을 떠올렸다.

‘[태양], [사슴], [3개의 칼]…….’

점을 봐준 건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노파였다.

단순히 흥미로 보고 지나갔던 점이라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놓고 잊고 있었다.

점 자체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지만 해동에서 이 정도로 신통하게 들어맞는 주술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가 태양처럼 빛나는 위치에 올라가게 된 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나 다름없다.

제국에서 황제, 그리고 그 제위를 물려받게 될 황태자는 전부 태양이라 묘사되었다.

“점술도 해동에서 사용하는 주술의 일종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미신이나 점쟁이는 존재하지요. 다만 우리 해동의 무녀의 점은 절대 헛된 정보를 읽어내지 않는 고급 기술로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점을 보면 무조건 들어맞는다는 말입니까?”

“으음, 예. 썩 석연찮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수호는 자부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행의 놀란 시선에 민망한 듯 손을 내저었다.

“물론 모든 운명을 다 읽어낼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특정 대상의 점은 단 한 번만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미래일지 과거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읽어낼 수 있었다면 그 또한 끔찍했을 터였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특정 사건에 대한 미래는 보려고 해서 봐지는 게 아닙니다. 불시에 ‘신내림’이라 불리는 현상이 일어나 단편적인 한 장면을 보여준다 합니다.”

“그렇군요. 대단한 능력입니다.”

말로는 대단하다 하면서도 쥬다스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있어 운명을 읽는 신통한 점술은 그다지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았다. 그는 운명론보다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요시 생각하는 자유론파였다.

‘자네에게 3명의 인재가 모여들 것이네. 앞으로 자네가 쓰고자 함에 따라 훌륭한 수족이 되어줄 수도 있을 테지만…….’

만일 예전 그 노파가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돌팔이 점쟁이였다면 별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자네의 심장을 찌를 것이야.’

하필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심지어 점의 내용이 과거를 뜻하는 건지 미래를 뜻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전생의 일로도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잠시 진지하게 점술에 대해 생각하다 머릿속에서 전부 흩어버렸다.

어차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고 아닐 일은 아닐 것이다. 괜히 고민에 휩싸여 있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다면 그냥 다시 잊는 게 나았다.

그렇게 돌담길을 따라 빙글빙글 가다보니 마법처럼 궁궐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호는 굳건히 닫힌 문 앞에 말을 세우고 명했다.

“문을 열라.”

끼이익!

무거운 빗장이 들리며 거대한 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해동의 궁은 루바르잔과 다르게 전부 그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대신 단아하게 처마를 늘어뜨린 건축양식이나 기둥 마디마디에 새겨진 사방신수의 벽화 등을 보면 절로 장엄함과 고급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제국의 궁이 호선과 원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둥글고 높게 솟아 있다면 이곳의 전각들은 질서정연하게 각을 지켰고 크기며 길이 비율마다 균형을 맞추어 척 보기에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인상을 주었다.

건물이 낮고 작아도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마치 개별적으로 예쁘게 포장한 선물상자처럼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그만큼 정갈하며 아름다웠다.

「여기도 오랜만이다냥.」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쥬다스의 품에 안겨 있던 백호가 홀짝 뛰어내렸다.

「얼마 만에 와보는 궁인지냥!」

「대체 얼마나 오래됐기에 그래?」

향수에 젖은 눈으로 어느 전각기둥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백호에게 유니가 다가와 물었다.

「모른다냥. 갸르릉. 한 삼십 년쯤 됐으려냥?」

「……별로 오래도 아니잖아.」

「그러게요. 삼백 년도 아니고.」

백호는 다른 정령들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궁의 건물들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빛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도착!

그리고 또다시 대놓고 뿌려지는 떡밥....(?)

쿨럭.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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