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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소망
「앗! 바로 저기서 하윤 공주와 자주 놀았다냥.」
좀 더 걸음을 옮기다 보니 한 구석에 밧줄을 꼬아 만든 그네가 하나 보였다. 백호는 한달음에 그네로 달려갔다.
아기 호랑이는 그네안장에 앞발을 얹은 채 시무룩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공주는 그네를 굉장히 무서워했지냥.」
「헤에. 겁이 많았나 보네?」
「아주 겁쟁이 울보 아가씨였다냥. 요 그네도 무섭다며 절대 서서 타지 않았다냥.」
그랬던 꼬마 아가씨가 어느 틈에 시집을 가버리더니, 이젠 그녀의 아들이 대신 이곳에 찾아왔다. 슬픈 건지 반가운 건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었다.
“……백호님이십니까?”
냐앙~
백호는 자신을 부른 연수호를 흘낏 쳐다보았다.
하윤 공주의 곁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때 그도 같이 종종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백호가 기억하는 공주는 어린 소녀였고 그땐 수호도 마찬가지로 어려 아직 귀족으로서의 임무를 맡지 않을 시절이었다.
크기가 대폭 줄어 영락없는 고양이 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고도 그 정체를 알아차린 수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은 줄었어도 눈만큼은 확실히 맹수의 기개를 품었다.
백호는 해동 왕족이 아닌 이상 결코 살갑게 굴지 않았다. 왕가를 모시는 하수인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차갑기까지 한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수호는 거리낌 없이 웃었다.
「하윤 공주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시 오지 않았을 거다냥.」
평범한 사람에겐 들릴 리 없는 대꾸였다. 하지만 백호는 하소연이라도 하듯 투덜거렸다.
「공주를 잃어버린 너희들 따위가 날 믿는다고 해도 하나도 안 반갑다냥.」
「사실은 엄청 반갑지?」
「캬앙, 반갑긴 누가!」
신경질적으로 캬르르 목을 울리던 백호는 그네에서 발을 내리며 쥬다스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연수호의 시선이 그를 따라왔지만 모른 척 새침하게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는 하윤 공주의 검은 눈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같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따뜻해.’
순수하고 따스한 영혼. 정령이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빛깔이다.
하윤 공주도 저렇듯 맑고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웃곤 했다. 백호가 발치에서 야옹거리자 쥬다스가 손을 뻗어 그를 안아 올렸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고롱거리는 백호를 바라보던 수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해동의 색을 품고 태어난 후손은 아니나, 쥬다스는 제국의 황태자임과 동시에 해동 왕가의 피를 이었다.
그를 따르는 백호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객들께선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수호는 그들을 우선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먼 길을 찾아왔으니 우선 씻고 여독을 풀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왕은 타국에서 찾아온 조카를 당장 만나고 싶어 했지만 혹여 불편하기라도 할까 저어하여 일부러 하루 간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쥬다스 일행은 왕에게 인사를 가는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주어진 휴식을 즐기게 되었다.
안내를 마친 수호가 물러나자 그들끼리만 남게 된 일행은 각자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 주어진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 쉴 사람은 그대로 쉬고, 몇 사람만 그 앞 작은 화원에서 얼굴을 맞대었다.
나와서 보니 약속이라도 한 듯 모처럼 루바흐 동창생인 쥬다스와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만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자줏빛 봄꽃 사이로 흰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어우, 여기 옷은 원래 이런 겁니까? 굉장히 불편한데요.”
해동의 의복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길이가 길었으며 겹겹이 덧입는 방식이었다.
루바르잔에선 여러 겹을 입는다고 해봤자 블라우스에 베스트, 자켓 정도로 구성되지만 해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일고여덟 번을 더 걸쳐 입었다. 아예 속옷부터가 의복 디자인의 일부였다.
꼭 이곳의 옷이 아니라 챙겨온 의상을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지만 쥬다스가 온전한 순례의 길을 택했기에 정식 예복은 따로 준비해 오지 않았다.
그러니 왕이 기거하는 궐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선 이곳의 복식을 따라는 수밖에 없었다.
바이칼은 마치 여성의 치마처럼 치렁치렁한 바짓단과 이를 고정시켜 주는 오비를 점검하며 어색하게 구시렁거렸다.
“입는 것도 복잡하고 활동하기도 어렵고. 이래서야 뛸 수도 없겠네요.”
“서적에서 본 바로는 이곳 사람들은 뛰는 걸 방정맞다고 하더군.”
“그럼 급한 용무가 생길 시에는 어찌합니까? 갑자기 적이 나타나면요?”
그는 에단의 설명에도 납득하지 못하고 질문을 더했다.
나름 친절하게 일러주었던 에단은 같은 의문에 봉착하여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바이칼은 품이 넓은 소매를 이리저리 깃발처럼 흔들었다.
“이건 뭐 자기 옷에 걸려 자기가 넘어지게 생겼다니까요. 확실히 보기에 멋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외엔 효율이 완전 꽝이지 않습니까? 뭐하러 이렇게 펄럭펄럭…….”
“복장에는 사람의 인상과 예의가 녹아 있어.”
바이칼의 불만을 뚝 끊고 들어온 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가 착용한 건 단아한 저고리와 긴 치마로 구성된 풍성한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굳이 헤어스타일까지 맞출 필요는 없어 길게 늘어뜨린 바닷빛 투톤 머리카락이 허리선에서 찰랑였다.
이국적인 외모와 색상이 해동 전통예복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조화를 만들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외모의 크리스티나였는데 독특한 의상으로 인해 분위기가 달라져 별거 아닌 한마디에도 바이칼이 움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활동성과 효율만을 중시하는 건 그러한 활동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이야기지. 예의와 품격을 우선으로 치는 장소에서는 이를 극대화할 필요도 분명히 있지 않나.”
“그렇지만 크리스티나 님, 이건 좀 과하지 않습…….”
“그대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
또다시 말이 잘렸다.
“다수의 가치동의하에 만들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다.”
“옙.”
결국 바이칼은 더 이상 복장의 비효율성을 제기하지 못하고 순순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쥬다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꼭 의좋은 오누이를 보는 것 같구나.”
크리스티나는 소리 내어 반응하는 대신 표정으로 의중을 드러냈다.
“아니…… 그렇다고 그런 표정까지 지으실 필요는.”
“만일 저한테 동생이 있었다면 저렇게 키우진 않았을 겁니다.”
“제가 동생입니까?!”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은 둘 다 19세로 동갑이다. 더 세세하게 생일로 따지자면 크리스티나가 누나인 게 사실이긴 했으나 바이칼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 지위를 떠나 포지션으로만 보자면 제가 좀 더 오빠 느낌이죠. 크리스티나 님은 집안에서 막내잖습니까? 저는 동생들을 여럿 돌보아온 경험이 있다고요.”
“희한하군. 동생들이 그대를 돌본 게 아니라?”
“대체 제가 평소 뭘 했다고 그런 이미지가.”
“뭘 하지 않아서겠지.”
“……단장마저.”
젠장! 바이칼은 탄식했다. 애초에 루바흐에 다닐 때부터 느끼곤 있었지만 도무지 이 모임에서 제 편은 아무도 없다.
그리 투덜거린 바이칼을 쥬다스가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어리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있단다, 바이칼.”
“장점이요?”
전부 아직 ‘어리다’는 수식을 싫어할 나이이긴 했다. 사람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을 늘 품고 있기에 아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반대로 아이가 되고 싶어 하곤 했다.
어른 정도가 아니라 노년기까지 겪어본 쥬다스는 빙긋이 웃으며 바이칼의 머리를 토닥였다.
“암, 장점이고말고. 어리다는 건 무언가 하나를 실패해도 다시 다른 걸 시도해 볼 기회가 많다는 뜻이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바이칼보다 2살이나 어렸다.
그러나 그의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언행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세 사람은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넷은 우두커니 서서, 잠시 동안 말없이 단아한 화원과 소담한 돌길, 낮은 전각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밝은 대낮이라 멀리 지어진 건물까지 훤히 보였다.
“참 좋은 나라입니다.”
문득 크리스티나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한 소녀가 자라기에 어둡지 않고, 너무 밝지도 않은.”
하윤 공주 이야기였다. 궐은 조용했지만 적막한 것과는 달랐다.
종종 그녀를 찾아오던 백호와 어릴 적부터 친우로 자라온 연수호, 그리고 오라버니인 이서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던 그네와 아름다운 화원은 주인이 떠난 뒤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마치 언제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어머니…… 라.’
전생의 자아가 깨어나기 전 백치에 가까웠던 쥬다스의 어린 자아는 어머니인 하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의 기억을 되찾은 그에게 있어선 어색한 느낌이었다. 본디 ‘이그레트’는 제 부모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버려진 평민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윤과 황제 레위스는 그가 두 번의 삶을 통틀어 기억하는 유일한 부모인 셈이다.
하지만 황제는 자식을 그릇으로만 판단하는 무정한 아버지였고 하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 크리스티나 네 말대로 참 좋은 곳이로구나.”
쥬다스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동의했다. 끝은 비참했을지언정 하윤의 삶은 대부분 행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사실은 슬픈 말로를 기억하고 있던 쥬다스에게 안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백호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화원 속으로 들어갔다.
만개한 봄꽃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백호의 곁에 유니가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
「여긴 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서 말이다냥. 난 좀 둘러보고 오겠다냥.」
「마음의 고향이면 진즉에 좀 자주 들르지.」
「예쁜이도 없는 빈 궐에서 뭐한다냥. 더 이상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아기호랑이는 유연하게 꽃가지 아래로 걸어 화원을 횡단했다.
계약자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자 유니는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않고 멈추었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백호의 등에 대고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그런데 백호!」
「왜 부르냥. 귀찮게 굴지 말고 계약자에게나 돌아가라냥. 그러고 보니 그 이그레트라는 인간, 소문은 들었지만 과연 굉장한 친화력…….」
「넌 왜 그렇게나 예뻐한 하윤 공주와 계약하지 않은 거야?」
백호는 지독한 덫에 걸리기라도 하듯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할 수 없었다냥.」
「왜?」
「바보 같은 질문 좀 하지 말라냥. 정령이 계약을 원해도 하지 못할 경우는 얼마 안 되지 않냐릉.」
「하윤 공주가 계약을 거절했어?」
정령이 계약을 원했음에도 성사되지 않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정령 자체가 자유를 추구하여 특정인에게 잘 끌리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계약을 부탁하는 쪽은 정령이 아니라 술사다.
간신히 정령이 소환에 응한다 해도 계약을 거절하고 되돌아 가버리는 일도 태반이었다.
마찬가지로 무려 정령이 호감을 느낀 상대가 직접 계약을 거절한다면 계약은 성사되지 않는다.
유니의 추측을 들은 백호가 울컥 성난 표정으로 여린 풀밭을 발톱으로 헤집어놓았다.
「거절한 게 아니다냥.」
「그럼?」
「술사로서의 자질이.」
정령의 호감과 술사로서의 자질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하윤은 사방신수의 마음을 얻었으나 그들과 계약할 만한 자질이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친화력이 빵점이었다냥.」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