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60화 (160/252)

0160 / 0240 ----------------------------------------------

19장. 소망

백호의 하소연을 들은 유니는 입을 헤에 벌렸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술사는 정령을 다룰 때 정신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제로에 수반한다면 그들과 공명하고 통제할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작이 없으면 화로에 불을 붙일 수 없듯이 어린 하윤과 백호 간의 계약은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어릴 적에 아무리 친화력이 없어도 신수가 오랫동안 곁에 머물다 보면 성년이 될 때쯤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백호는 그녀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해동 왕실에선 그 사실을 몰랐다.

결국 급격하게 무너져 가기 시작한 나라를 위해 왕녀는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졌다.

「인간은 정말 멍청하다냥.」

인내심도 없고 통찰력도 부족하다. 백호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포로록 날아 계약자에게로 되돌아가는 유니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중한 자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계약으로 이어진 그들이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자유.’

정령술사들은 이 개념을 종종 오해하곤 했다. 정령에게 있어 자유란 술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주어진다.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욕심도 가질 수 없는 게 정령이다.

정령을 움직이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건 오로지 계약자뿐이다.

「에휴.」

깊은 한숨과 함께 막 꽃밭을 벗어나던 작은 호랑이의 시야에 낯익은 소녀가 들어왔다.

때마침 상대방도 백호를 발견하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안녕, 호랑이님. 여기서 혼자 뭐해?”

「자기도 혼자면서 뭘.」

백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내민 손끝에 코를 비볐다. 인간이 아닌 픽시에게선 숲의 청량한 향기가 났다.

「끄응. 이 꼬마는 이름이 뭐였더라.」

“란이야. 란.”

「아, 맞다냥.」

무심코 꼬리를 살랑거리던 백호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깃들었다.

‘뭐지, 방금.’

백호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낮의 란은 갈라진 피부에 매부리코를 가진 추한 모습이었기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란은 말똥말똥한 눈의 백호를 마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신기하다냥.」

“헤헤. 내가 좀 신기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어. 그래도 보통은 깜짝 놀라거나 인상을 팍 쓰던데. 호랑이님이라 사람 얼굴에 관심 없나?”

「예쁜데? 보기 좋다냥.」

백호의 기준에서 란은 추녀가 아니었다. 정령은 외모보다는 영혼의 본질을 보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기분 좋게 꼬리를 살랑거리던 백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털이 쭈뼛 일어났다.

「갸아악! 뭐, 뭐, 뭐다냥!」

“응? 왜 그래?”

「진짜 뭐냥? 너, 정령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거냐릉?」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다냥! 정령의 언어는 계약자만이 들을 수 있다냥.」

“쥬다스 님과는 잘만 대화했으면서.”

「그거야…….」

백호는 잠시 그에 대해 떠올려보곤 코를 찡긋거렸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우리 사방신수는 다른 정령과 좀 다르다냥.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존재라면 꼭 계약을 맺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다냥.」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그 아이는 특별하지만.’

만일 쥬다스가 해동 왕가의 핏줄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백호와 대화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전생의 초기, 즉 갓난아기 때부터 이미 모든 정령과 대화할 수 있었다.

정령계에서 ‘이그레트’란 이름은 아주 특별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그가 중심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자연계 정령왕을 모조리 매료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난 정말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란은 잠시 고민하다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아마 내가 요정족이라서 그런가봐.”

「먀아아, 모르겠다냥.」

백호가 알기로 요정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령의 언어를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숲을 관장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으며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강할 뿐이다.

지금 백호와 대화하는 것과 다르게 란은 자연계 정령들이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충 정령의 분위기를 읽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정도만 가늠해 낼 수 있었다.

의문에 빠진 란과 백호는 서로를 향해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나 좀 전에 호랑이님 말고 다른 사람도 한 명 만났어.”

「그러냥?」

“응, 조카를 만나러 왔대서 방향을 알려줬어. 이거 봐봐. 고맙다고 과자도 받았다?”

해맑게 약과를 꺼내 보여주는 란을 향해 백호가 돌연 눈을 반짝 빛냈다.

“으앗!”

크기가 작긴 했지만 백호가 갑작스레 메뚜기처럼 폴짝 뛰어오른 탓에 쪼그려 앉아 있던 란은 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백호는 란이 들고 있던 약과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아야야. 호랑이님, 과자가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근데 이거 되게 달콤하고 고소하고 느끼하고? 아무튼 맛있더라.”

온 김에 약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쫑알거리는 란을 두고 백호는 자신이 횡단해서 지나온 화원을 돌아보았다.

「어른이 돼서 달라졌나 했더니. 막무가내인 건 여전하구냥.」

백호는 밤톨마냥 쪼끄만 주제에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고집스레 여동생을 지키겠다고 나섰던 소년을 회상했다.

한 나라의 왕세자치곤 소탈하여 평복을 하고 자주 궁 밖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하수인들만 늘 발에 땀나게 아이를 잡으러 다녔다.

자존심이나 허례허식보단 실리를 추구하는, 제법 똘똘한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윤과 마찬가지로 친화력이 없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백호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둘은 별로 친해지지 못했지만.

‘아! 그래도 청룡 녀석과는 제법 친했던 걸로 아는데.’

꼭 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사방신수는 해동 왕가에게 늘 호의적이었다.

백호가 이 궐을 마음의 고향이라 칭한 건 진심이다. 그들은 제 집 드나들 듯 아무 때나 해동의 왕궁에 찾아왔다.

내킬 때 와서 놀다가 또 어느 틈엔가 홀연히 사라지는 게 바로 사방신수였다.

백호는 반가움을 담아 갸르릉 목을 울렸다.

「‘서윤’.」

* * *

백호가 짐작했듯이, 마침 쥬다스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친우들과 함께 화원의 꽃을 구경하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우람한 체격을 가진 한 사내가 흡사 투우장 소처럼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달리기에 거추장스러운 긴 바짓단은 걷어 올리고 두루마기는 아예 벗어서 망토처럼 묶어 펄럭거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불같던지 기에 민감한 에단이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을 뻔했을 정도였다.

바이칼도 덩달아 품을 더듬어 스태프를 말아 쥔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광인인가?’

해동 특유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짧게 기른 수염과 운동으로 잘 단련한 어깨 근육 등 멀끔하게 생긴 거구의 40대 남성이었다.

옷차림만 봐서는 미치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잡스러웠다. 타국에서 온 객들조차 깔끔하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저 남자는 아무런 무늬도 넣지 않은 소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평민이나 입는 단출한 복장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등장에 모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헉. 허억……. 누가, 누가…….”

“……?”

“누가 하윤 그 아이의.”

채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내는 엄청난 거구였다. 키로 치자면 일행 중에서 가장 큰 에단보다도 한 뼘은 더 컸다. 거기다 체격도 커서 마치 한 마리 곰이 우뚝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쥬다스의 앞에 서자 태양이 가려져 그림자가 훅 드리웠다.

열일곱 살이라곤 해도 아직 성장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다. 게다가 평소 입이 짧아 마른 쥬다스와 거구의 사내가 마주 보게 되니, 주위 사람들은 꼭 어른과 꼬마아이를 함께 보는 기분이 들었다.

“…….”

잠시 말없이 쥬다스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대던 손은 이내 쥬다스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얹어졌다.

크고 두꺼운 손바닥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인형을 만지듯 잘게 떨렸다.

“그래, 네가.”

“…….”

“어서…….”

톡, 토독.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던 얼굴에서 눈물이 줄기를 이루어 줄줄 흘렀다.

처음으로 만난 조카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사내는 품위를 챙기는 대신 많은 의미를 담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어서 오너라.”

목이 아닌 가슴 안에서 끄집어낸 환영인사였다.

쥬다스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사내는 조카의 냉담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네 어머니의 오라비인 ‘이서윤’이다.”

설마하니 저 광인이 일국의 임금일 줄은 몰랐던 에단과 바이칼이 흠칫 놀라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아직 주군인 쥬다스가 인사를 마치기 전이었으므로 다른 세 사람은 그저 한 발짝 뒤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를 차렸다.

“찾아뵙는 건 내일이 아니었습니까?”

혈육을 향한 첫 질문치고는 차가워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서윤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답해주었다.

“으흠, 해동의 왕을 대면하는 날은 내일이 맞지.”

“그럼 오늘 저를 찾아오신 분은, 단순히 ‘어머니의 오라비’이신 겁니까?”

“바로 그렇다. 쿨쩍. 하윤이와는 다르게 아주 영특하구나.”

내 동생이지만 하윤이는 맹한 구석이 있었지. 서윤은 그리 말하며 히죽 웃었다.

눈물 섞인 웃음을 본 쥬다스는 그제야 서윤을 향해 제대로 된 인사를 올렸다.

“……!”

“외숙부께 늦은 첫 인사를 드립니다. 쥬다스입니다.”

그가 취한 행동은 다름 아닌 큰절이었다.

쥬다스는 먼저 상대가 어떤 입장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서윤이 임금으로서가 아닌 가족으로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신도 그에 맞추어 입장을 정했다.

대제국의 황태자가 타국의 왕에게 엎드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외숙에게 드리는 조카의 인사로서는 어긋남이 없었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이서윤은 물론이고, 한발 뒤에서 지켜보던 수하들은 아연실색하여 그대로 주군을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위를 떠나 모시는 주인이 자세를 낮춘 이상 뻣뻣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예상치 못한 쥬다스의 태도 변화에 서윤은 놀란 것도 잠시, 곧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타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어려운 동안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은 염치없는 나라에 와, 그래도 외가랍시고 해동의 법도를 따를 줄이야.’

웃어른에게 올리는 큰절은 제국에 없는 문화였다.

루바르잔 사람이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는 건 충성을 표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을 만났을 때뿐이다. 어른을 공경하기 위해선 다른 세부적인 예법을 따른다.

특히 귀족사회에선 어른이라 해도 지위에 따라 도리어 아이에게 공손히 응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지금 서윤의 눈앞에서 쥬다스가 택한 행동은 놀랍고도 고마우면서도 기특한 정성이었다.

주책없이 볼을 흐르던 눈물 대신 희미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계속해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