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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소망
“고맙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난 조카를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왕답지 않게 투박하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이 큰절을 올리느라 흐트러진 쥬다스의 옷매무새를 대신 정돈해 주었다.
“실은 너를 만나기까지 무척 많이 망설였었다.”
지금까지도 걱정과 불안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서윤은 동생의 사망에 얽힌 비화, 그로 인해 아이가 겪어야만 했던 어두운 루바르잔 황궁의 암투를 전부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네가 나를, 이 나라를 원망하고 있진 않을지.”
서윤의 눈이 진하게 우려낸 찻물처럼 쓰디쓴 감정으로 물들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걱정되고 두려웠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듯이 눈에도 한껏 짓무르고 피고름을 짜내 단단히 굳어버리는 살들이 있다.
그건 쥬다스도 가지고 있는 내면의 굳은살이었다.
서윤은 딱딱하게 굳고 지쳐 버린 눈으로, 그러나 자상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선 잠자코 듣기만 하는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외삼촌이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라 혹시 실망했느냐?”
“그럴 리가요.”
쥬다스는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입니다. 외숙께서 겁내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서 저만 홀로 겁쟁이가 되었을 테지요.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어머니와 많이 닮았구나.”
“……그렇습니까?”
해동에서만큼은 절대 들을 리 없을 거라 여겼던 말이었다. 그것도 하윤의 친오빠인 서윤의 입에서는 더더욱.
‘이거 참,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기억 속 생모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무엇 하나 자신과 닮은 점이 없었다.
쥬다스는 혼혈이 아니라 그야말로 루바르잔 황조의 순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외형적 특징을 전부 부계로부터 물려받았다. 놀랄 만치 모계의 흔적이 없었다.
어색하게 되묻는 그에게 서윤이 강한 어조로 긍정했다.
“아주 많이, 더 이를 데 없이 꼭 닮았어.”
“어떤 점이 그리도 닮았는지요?”
다 자라고 나서야 겨우 이렇게 만나게 되긴 했지만 어머니에 대해 묻는 조카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서윤은 안타까움과 함께 짙은 감동을 느꼈다. 여동생의 아들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귀여웠다.
열일곱이 이렇게나 작고 사랑스러운 나이였던가. 서윤은 제 덩치 생각은 못하고 속으로 그리 되뇌었다.
“이 나라에서 얼굴은 얼을 담는 굴곡이라 하며,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지. 네 나이 때는 아직 모를 이야기다만.”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육신의 나이가 아니라 그가 실제적으로 살아온 세월만으로 치자면 모르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서윤은 맞장구를 쳐오는 쥬다스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 얼굴, 특히 눈이 하윤일 똑 빼닮았어. 마치 그 아이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자신은 모르는 모친과의 공통점을 타인이 발견해 주자 기이하게 느껴졌다.
쥬다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피부색부터 머리카락이며 눈 색 등이 전부 달랐지만 듣고 보니 얼굴형은 조금 비슷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지. 단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만.”
서윤은 망토처럼 두르고 온 두루마기를 풀어 탈탈 털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한지에 곱게 포장된 약과며 유과, 양갱 등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러곤 그가 하는 양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에게 그걸 다 한 아름 안겨주었다.
“이것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달고 맛좋은 과자는 전부 챙겨왔다. 친구들과 함께 맛보려무나.”
서윤은 뒤에 시립한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을 눈짓하며 덧붙였다.
눈치가 빠른 외숙은 짧은 사이 그들이 단순한 군신관계가 아니라 막역지우로 자라왔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린아이도 아닌 그들이 달콤한 과자에 들뜰 리는 없었지만 처음 만나는 조카를 생각하며 심도 있게 과자를 고르던 서윤의 모습이 상상되어 다들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순간, 어디선가 한을 품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어언하아아아!”
“아이쿠. 이런.”
서윤은 낭패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힐끔거렸다. 그리곤 엉망으로 구겨진 두루마기를 홀홀 털어 어깨에 척 걸쳤다.
“내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지라 이만 가봐야겠다.”
“살펴 가십시오.”
수하들이 저렇게 한을 품고 찾아다니는 걸 보니 평소에도 꽤나 제멋대로인 왕인 모양이었다.
쥬다스는 그가 안겨준 과자를 잔뜩 품에 든 채 쿡쿡 웃었다. 자리를 떠나려다 그 모습을 본 서윤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윤아.’
소리 죽여 웃는 모양새도 어쩌면 저리 죽은 누이와 닮았는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서윤은 울컥 치솟아 올라오는 그리움에 못 이겨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네게 너무 미안하다.”
“외숙께서 원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쥬다스의 말처럼 서윤은 끝까지 여동생을 타국에 공물로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
거세게 반발하며 왕세자로서의 체면과 책임도 마다않고 무릎 꿇은 서윤에게 노한 선왕은 그를 골방에 가두라 명했다. 그리곤 더 손쓸 틈도 없이 하윤을 보내 버렸다.
한 번 황제의 손에 넘어간 공물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 그로 인해 나라는 멸망을 면했으며 이제 와서야 간신히 안정기에 돌입했다.
누이의 죽음과 관련해 서윤이 원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내 대신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태양의 곁에 있다면, 적어도 그 여린 한 목숨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항의 정도가 아니라 필사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막았더라면 하윤을 그리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윤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역시 선왕이었던 아비와 다를 바 없이, 현실과 타협해 책임을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 아무리 황제께 보냈다 한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무수한 것들을 발아래 두고서도.
“선왕께서도, 또한 루바르잔의 황제께서도. 각기 나라를 지켰을지 모르지만 고작 가까이 곁을 주었던 한 사람을 지키지 못해서.”
쥬다스는 서윤의 후회를 들으며 깨달았다. 외숙은 지금 자신을 등진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와서 쥬다스는 꽉 쥐었던 주먹을 맥없이 풀고 말았다.
바로 힘 있는 자가 해야 할 일.
‘결국은 내가 했어야 한 일.’
그것은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뜨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가슴으로 절절히 이해한 것은 완전히 무게가 달랐다.
“여기 계셨사옵니까, 전하!”
그때 누군가 전각 지붕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하얀 의상을 입은 서윤과 대조적으로 짙은 남색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에서 감나무 감 떨어지듯 툭 떨어졌다.
“후. 아무리 궐 안이라지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하다고 제가 귀에 못이 박히게……!”
이를 갈며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의 직속호위였다. 겉보기에 따로 무기를 장비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지금껏 한 번도 왕의 신변을 위협할 자가 없었던 만큼 확실한 강자였다.
문제는 적의 암습보단 지금과 같은 개인 행동이었다. 국왕 이서윤의 충동적 일탈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게 아닌지라 호위의 표정은 그다지 공손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던 호위는 서윤의 곁에 선 쥬다스를 발견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분이 하윤 공주님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빨랐다.
따로 공표하거나 기별을 하고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이미 수도 전역에 루바르잔 황태자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궁 안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호위는 이번만큼은 국왕의 경솔한 행동을 타박하는 대신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성왕을 모시는 검 ‘정다울’이라 합니다.”
이름을 소개할 때 루바르잔식으로는 ‘다울 정’이라 하겠지만 해동에선 해동의 언어 규칙을 따랐다.
쥬다스는 이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쥬다스입니다.”
일단은 사석이었으며 왕과 황태자가 아닌 외삼촌과 조카의 만남이었다.
대제국 군주의 후예가 건네는 예의바른 인사를 통해 상황을 이해한 다울의 눈에 감탄의 빛이 깃들었다.
‘큰 그릇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아직은 혈기와 감정에 치우칠 나이건만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느긋한 성품을 가지고 상황에 기꺼이 자신을 맞춰주는 여유가 보였다. 결코 삿된 자존심이나 허영에 내면을 맡기지 않는 자다.
왕의 호위로 오래 지내오면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경계와 분석이 몸에 밴 다울은 한눈에 쥬다스가 지닌 군주로서의 상을 알아보았다.
“큼. 흠.”
서윤은 부드러운 위압감에 눌려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린 호위를 향해 헛기침을 뱉었다.
덕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다울이 서윤을 향해 지긋이 눈길을 보냈다. 뜻밖의 손님을 만나 기껏 가라앉았던 잔소리가 다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네.”
“…….”
“음. 정말일세.”
“…….”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수하를 보며 서윤은 홀로 와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호위 정다울은 차마 귀한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래 씹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루바르잔 측 호위 세 사람도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
‘닮으셨어.’
‘……하필 닮으셨군.’
‘어후. 이거 완전히 빼닮으셨는데.’
평소에는 온화하나 한 번 무언가에 꽂히면 지독한 쇠고집에 마이페이스.
그 점 하나 만큼은 영락없이 닮은 삼촌조카사이였다.
크리스티나와 에단, 바이칼은 어쩐지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기분에 다울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내 눈치가 없어 좋을 대로 찾아와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방해했구나.”
“아닙니다. 이렇게 먼저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래그래. 내일은 다시 인사를 나눠야겠지. 그때 보자, 쥬다스.”
정식으로 두 사람은 아직 만나지 않은 사이다.
대중 앞에서 정치란 마치 하나의 연극처럼 이루어진다. 이미 알아도 모르는 척, 처음 본 사람들처럼 새롭게 인사를 나누어 두 나라 간의 관계 증진을 도모한다.
이때엔 언행을 조심하여 각 나라에서 책잡힐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서윤은 처음 광인처럼 달려왔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해동 국왕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쥬다스는 이내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의 외숙께선.”
“예, 전하.”
“좋은 분이시구나.”
분명 하윤에게도 좋은 오라버니였으리라.
여동생에 대한 애정은 내리사랑으로 이어져 조카에게까지 번졌다.
맛난 과자 하나라도 챙겨 먹이고 싶어 하고, 혹 외가를 원망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 무조건적인 애정이 도리어 가슴 아팠다. 그는 어미를 지키지 못한 어린 자아의 슬픔을 기억했다.
‘잘못했어요.’
아이는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를 위협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간절히 바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이그레트’라는 보다 성숙한 자아가 다시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되었고, 그는 아이로서 느끼던 죄책감으로부터 일정 부분 해방되었다.
하지만 ‘이그레트’와 ‘쥬다스’는 처음부터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미에 대한 죄책감을 전부 떨쳐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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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밀린 분량 업로드 완료! (...)
참, 모처럼 봄비가 주륵주륵 내리길 기대했는데 금방 하늘이 맑아졌네요.ㅎ 아쉬워라..
그래도 봄꽃들은 아직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꽃구경 못하신 분들은 그냥 동네 공원에라도 구경나가보셔요.ㅎㅎ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