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62화 (162/252)

0162 / 0240 ----------------------------------------------

19장. 소망

“전하.”

“음?”

크리스티나가 그를 부르곤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사실은 그리 묻고 싶었다. 쥬다스는 여전히 자상한 미소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오래 그를 보아온 친우들은 전부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해동에선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흠, 글쎄다. 우리 여행의 본래 목적은 제국와 동맹국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 돕는 일이지. 어쩌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딱 언제까지라곤 잘라 말하기 어렵겠구나.”

수도로 오는 동안 지나쳐 온 해동의 마을들에선 전부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그게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좋겠지만 쥬다스는 지난번 레이야와 만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나라에 귀기가 드리운 원흉은 바로 사령술사다.

“이곳 궐에는 국왕께 직접 초대받아 온 것이니, 만나야 할 사람들을 다 만나고 나면.”

그가 만나야 할 사람들 중에는 악연도 필히 섞여 있을 테였다.

쥬다스는 크리스티나의 걱정스런 눈빛을 마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당연한 한마디였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크리스티나는 홀린 듯이 빛나는 금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를 따라 입 꼬리를 올렸다.

웃음과 눈물은 전염성이 있어 금방 따라하게 된다. 그리고 쥬다스가 짓는 잔잔한 미소는 주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옮아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그 무뚝뚝하던 에단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던 자기중심적 사고의 바이칼도 이제는 남을 향해 먼저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달을 비롯한 행성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을 비추는 태양빛을 반사시켜 어둠 속에서 빛난다.

“예, 따르겠나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에 살며시 금빛 노을이 번져가듯, 그는 그렇게 모두를 물들였다.

* * *

다음 날 정오, 쥬다스는 대전에서 정식으로 왕을 만났다.

이서윤은 전날 소복만 입고 나타났던 허름한 몰골과 다르게 엄중히 의관을 갖추고 자리에 나왔다.

임금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는 검은색과 붉은색, 노란색이 섞여 있었다.

바지는 루바르잔의 정장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이었으며 요대로 묶은 허리선부터는 노란색 실을 땋아 파도처럼 엮어놓았다.

윗옷은 얇은 비단을 여러 겹 덧댄 후 마지막으로 바닥까지 끌리는 긴 붉은 두루마기를 걸쳤다.

거대한 체구에 화려한 의복이 갖추어지니 그야말로 위엄 있는 국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제 그를 보았던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의 시선으론 마치 이서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온 것만 같았다.

오늘 대전에는 쥬다스의 곁에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세이지와 콜, 란 등을 비롯한 모든 일행이 집결했다.

호위를 위해 따라온 친위기사단도 전부 작위가 있는 귀족이었기에  함께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에 앉은 채 고개만 이쪽저쪽 돌려 구경했다.

「사람이 무지 많네.」

왕을 대면하는 자리에는 해동의 문관, 무관 귀족들이 함께 출석했다.

쥬다스 일행과 일면식이 있는 연수호도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무수한 눈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쥬다스는 왕과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심심하다냥.」

백호는 사람들의 시선이고 뭐고 바닥에 길게 누워 끙차 기지개를 켰다.

가죽이 호피무니긴 해도 생긴 건 영락없는 하얀 고양이였던지라 누구도 백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다른 정령들이 관심을 주었다.

「저기 백호. 너 이젠 아예 고양이가 되기로 한 거야?」

「그럴 리가냥! 힘은 차근차근 회복하고 있다냥. 쓸데없이 낭비하기 싫은 것뿐이지.」

백호는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그러자 카니가 동그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동조했다.

「으응, 하긴. 당신 지금 그 모습이 편해 보여요.」

「편하긴 한데 좀 괘씸하다냥.」

「뭐가?」

백호는 제겐 시선 한 줌 주지 않는 해동 귀족들을 흉흉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어떻게 크기가 좀 작아졌다고 나한테 이럴 수 있다냥? 내가 여기서 산 게 얼만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서러워?」

「으이익, 서러운 게 아니다냥! 화내는 거다냥! 이게 바로 배은망덕이다냥!」

「아니아니. 딱히 일부러 널 무시하는 건 아니라고 봐. 못 알아볼 만 하게 생겼구만, 뭘.」

유니의 의견을 들은 백호는 빠직 미간을 꾸기며 반박했다.

「잘생긴 이 몸을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냥?」

「얼씨구. 솔직히 너 지금 아무리 봐도 고양이거든?」

「어딜 봐서냥!」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백호의 외침에 정령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야옹거리는 소리부터 문제가 아닐까.」

「우웅? 야옹이니까 야옹야옹 하는 거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원래 호랑이는 냥~ 이 아니라 어흥! 이잖아요.」

「이, 이건 그냥 버릇이다냥…….」

백호는 소심하게 항변한 후 앞발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얄미운 자연계 정령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쳐 백호를 놀리기에 여념 없었다.

그 생각에 이가 갈린 백호는 시무룩해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씨. 평소엔 도움 안 되는 녀석들이라도 이럴 때 있으면 좋았을 텐데.’

미우나 고우나 가재는 게 편이라고 결국 같은 계열 정령끼리 뭉치게 되어 있다.

백호는 다른 신수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마지막으로 청룡을 떠올리곤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청룡!」

「응?」

백호는 용수철처럼 폴짝 뛰어올라 긴 탁자 위로 안착했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보고 당황해 입을 다문 사이 백호는 서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청룡 녀석, 서윤 너랑 함께 있지 않았다냥?」

“…….”

사방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범주엔 해동의 왕인 서윤도 해당되었다.

그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자 백호는 답답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청룡은 수도를 지키는 신수였으니까냥. 엉덩이가 무거워서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냥. 게다가 서윤 너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냥?」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전하?”

갑작스런 임금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모두 들으시오. 우리 해동은 뿌리부터 지금 이 시점까지 언제나 사방신수의 수호를 받아왔소.”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단호히 말을 꺼냈다.

“해동의 민족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오. 사방신이 흔들리면 나라가 함께 흔들렸으며, 사방신이 평안하면 나라도 함께 평안했다는 것을.”

귀족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서윤은 그들을 훑어본 후 다시 백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냐앙?」

“신수들의 힘이 위협받고 있소. 청룡께선 크게 기력을 쇠해 회복기에 들어가셨으며, 현무와 주작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뭐라고? 청룡 그 녀석 다쳤다냥? 지금 이곳에 있다냥?」

백호는 궁에 다시 온 후 지금까지도 청룡의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백호 자신이 힘을 잃어 약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아예 모르고 있던 건 아주 심각한 상황이란 뜻이었다.

망연히 넋을 놓은 백호를 잠시 내려다본 서윤은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공손히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여기 계신 신수 백호께서도 마찬가지.”

“설마……!”

“백호님?!”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셨다니!”

「느아아아, 저것들이 진짜.」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백호는 해동 사람들의 격한 반응을 보고 괘씸함에 수염을 꿈틀거렸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쥬다스 일행만이 평정을 유지한 채 성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신수의 수호를 잃은 온 나라가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이고 있으니.”

“……!”

“이 시간 이후 금기 ‘사령술’을 몸에 익힌 자들을 나라의 주적으로 간주할 것이오.”

사령술사들에 대한 전쟁선포였다.

해동의 임금은 더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를 아낌없이 두었다.

“이는 명백히 나라의 위기에 해당하니. 동맹국 루바르잔에 사실을 가감 없이 알리는 바.”

하윤의 희생으로 간신히 바로 세운 나라가 생각지도 못한 적에게 다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적을 감추어버린 주작과 현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쥬다스를 돌아보며 강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빠른 시일 안에 루바르잔에서도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할 것이오.”

제국의 황태자와 해동의 임금 간 이루어진 첫 인사 자리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파했다.

공식석상에선 분명 그러했으나, 막상 자리를 파한 후 서윤은 쥬다스를 따로 불렀다.

“아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서 놀랐지? 미안하다.”

쥬다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아가 취급하고 있는 서윤의 말에 당황하여 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란다. 루바르잔 황제께서도 알아야 할 내용이야. 오늘 들은 이야기를 아버지께 잘 전해드릴 수 있겠느냐?”

“……그건.”

“으흠! 역시 네게 짐이 되겠지. 그래, 차라리 사람을 함께 보내마.”

“아뇨. 그러실 필욘.”

이미 서윤은 붓을 쥐고 서신을 작성하고 있었다. 쥬다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차분히 그를 말렸다.

“그저 현재 상황을 폐하께 알리는 정도라면 마법을 이용해 즉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마법! 그렇지, 루바르잔이 마법강대국이란 사실을 순간 망각하였어.”

해동에선 마법을 다루는 이능력자가 없다.

마법뿐 아니라 정령술이나 치유술 등 대다수의 서방계 이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로 무예를 익힌 신체형 이능력자와 점성술을 익힌 무녀들, 마지막으로 연금술을 전승받는 극소수 고위계층이 존재할 뿐이다.

서윤은 그 자리에서 전달할 내용을 마법활자로 저장하여 마법진을 통해 전송하는 바이칼을 보며 몹시 신기해했다.

그러다 능숙하게 수하들을 총괄하는 쥬다스를 힐끗 보며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

‘……한데 저 아이. 제 아비를 아버지가 아니라 폐하라 부르는 건가.’

사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서윤조차 ‘외숙’이란 호칭으로 부르는 쥬다스였다. 그런 아이가 유독 자기 아버지인 황제에게는 거리를 두고 표현했다.

루바르잔 황실이 유독 혈육 간에 정이 없고 냉혹하며 대제국 군주의 자리는 피로 물든 권좌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정이 많은 아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염치없는 외삼촌을 찾아와 웃어줄 정도로. 저 따뜻한 아이가 거리를 두고 대할 정도라면 아마도…….’

어쩌면 루바르잔 황실은 하윤이 일찍이 눈을 감은 후 홀로 남은 조카에게 상상했던 이상으로 잔혹한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또한 군주이기 전에 아버지가 아닌가.’

서윤도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어 아비로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저 여리고 착한 조카가 지금껏 잘 자라나 제자리를 유지한 것이 황제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그래야만 했다. 만일 그마저도 없었다면, 도대체 누가 저 아이의 편에 서서 살아갈 길을 열어주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혼자 가시밭길을 걸어왔으리란 가능성은 상상조차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서윤은 부디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때마침 마법문서 전송 작업을 마치고 돌아선 쥬다스와 눈이 마주쳤다.

쥬다스는 마치 서윤의 불안한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어어어 어제부터 목감기에 제대로 걸렸습니다. 아픈 건 목인데 이상하게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email protected]

저를 액땜삼아 독자님들께선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ㅠㅠ...!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별 -> 행성 : 수정하였습니다.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