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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소망
“형님, 더 전달하실 내용이 없다면 진을 해제할까요?”
“오냐. 그러고 보니 이젠 마법진도 사용할 줄 알고 대견하구나, 세이지. 그간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야.”
전송 마법을 발동시키는 인원 중엔 세이지도 껴 있었다.
진을 그리는 건 상당히 복잡하고도 어려워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는 마력배열 실패로 인한 캔슬이 일어난다.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곧장 전송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건 완벽하게 마법진에 대해 숙지했다는 뜻이다.
존경하는 이에게 칭찬을 듣게 된 세이지는 얼굴빛을 환하게 물들였다. 기쁨이 역력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느라 아이의 뺨이 상기되었다. 그러나 세이지는 자만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진을 그리는 건 바이칼 경이 전부 도맡아했습니다. 그, 저는 그려진 진을 따라 마력을 배열하고 발동시키는 일에 힘을 조금 보탰을 뿐이에요.”
“조금이라뇨. 그려진 진을 따라 오차 없이 마력을 배열하는 일도 절대 쉬운 일 아닙니다? 덕분에 훨씬 빨리 전송할 수 있었습니다.”
“흠. 그렇다는데.”
바이칼의 첨언을 듣고선 쥬다스가 능청스럽게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린 동생은 어쩔 줄 모르고 어색하게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형님, 저 사실 바이칼 경에게 마법을 다시 배우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많이 미숙하지만.”
본래 황족을 가르치는 스승은 그만한 지위와 학식을 지닌 자가 따로 임명받는다.
제대로 된 스승도 아니고 황태자의 친위기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황족의 존엄을 해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이지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제 형에게 밝혔다.
전보다 훨씬 진솔하고 당당해진 아이를 보며 쥬다스는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응원하마.”
서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이지와는 공식석상에서 인사를 나누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서윤은 사야 황후가 저지른 죗값을 당시 9살이던 어린아이에게 물을 정도로 감정에 휘둘리는 사내가 아니다.
도리어 배경은 다르나 그도 권력의 중심에 선 국왕이기에 하윤의 죽음이 세이지의 탓이 아니란 걸 이해하고 있었다.
잘못한 일이 아니니 잘못을 묻지 않았고, 용서할 일이 아니니 용서하지 않았다. 대신 세이지를 쥬다스의 동생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서윤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조카는 쥬다스 한 사람뿐이다.
세이지는 루바르잔의 3황자이자 원수의 자식일 뿐, 굳이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쥬다스는 그러한 서윤의 심정을 눈치채고 필요 이상으로 세이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생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속죄를 하라거나 해동의 임금과 친해지라는 뜻이 아니었다.
직접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서윤과 냉랭한 관계가 유지됨으로 인해 세이지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서윤에게 세이지가 원수의 자식이듯, 세이지에게도 사실 그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어미는 악인이었으나 아이에게만큼은 세상의 전부였다. 한 번 세상을 잃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다시 억지로 용서를 구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친밀해질 자신이 없었다.
「서윤, 서윤. 청룡은 지금 어디 있냥?」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백호가 서윤의 바지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서윤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백호께서 조카아이와 함께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서요산에서 사령에게 쫓기고 있을 때 만나 도움을 받았다냥.」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서윤은 차분하게 안도를 표했다.
“청룡을 만나보겠습니까?”
백호가 그러겠다고 답하자 왕은 청룡이 있는 곳에 몸소 안내해 주겠다며 돌아섰다.
펄럭이며 바닥에 가라앉은 곤룡포를 빤히 응시한 백호가 작게 투덜거렸다.
「크흥. 인간은 너무 빨리 변한다냥.」
백호의 기억 속에는 장난꾸러기 꼬마였던 서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서윤은 울기도 잘 울고 시끄럽게 왁왁거리며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던 활기 넘치는 어린애였다.
매사 얌전하고 순한 하윤과 정반대인 성격이라 백호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 자주 찾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던 꼬맹이가 이젠 일국을 책임지는 왕이 되어 저토록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져 발걸음이 무거웠다. 딱히 서윤을 하윤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괜히 그랬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준다면.
부질없는 소망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서윤의 뒤를 따라가는 백호의 머리위로 녹색 정령이 톡 내려앉았다.
「그들의 수명을 생각하면 빠른 편은 아니지. 종족 차이를 생각해, 백호.」
「차이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랬다요!」
미간 사이에 나타나 방실거리는 토니 때문에 백호의 시퍼런 두 눈이 사팔뜨기처럼 가운데로 쏠렸다.
「맞아, 완전히 달라. 우린 사는 동안 내내 한 가지 속성을 유지하잖아. 하지만 인간은 작은 계기로도 내면이 바뀌어버리는걸.」
「그걸 성장이라고도 부르지요.」
성장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품고 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란다. 지금 당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고, 희대의 살인자로 악명을 떨칠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변화하게 마련이다.
「성장…….」
백호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아이인 채로도 상관없는데.」
「동감이에요.」
카니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내 계약자는 작고 약한 모습도 사랑스러우니까요.」
「뜻은 참 좋은데, 카니. ‘우리 계약자’라고 정정해 줄래?」
「쳇.」
정령들이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이 서윤은 손님들을 데리고 궁궐 한복판에 마련된 동굴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을 발견한 바이칼이 당황하여 멈칫거렸다.
“궁궐에 웬 동굴입니까?”
“그건 편견이야, 그대. 동굴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크리스티나의 반문에 바이칼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예에. 뭐, 안 될 건 없죠.”
“일부러 판 굴이 아니라 자연동굴이다. 아마도 궐 안에 동굴을 만든 게 아니라 동굴이 있기에 이곳에 궐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겠군.”
에단이 동굴 벽을 눈으로 훑으며 의견을 내놓았다.
자세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하필 궁 중심부에 동굴이 자리한 것만 봐도 중요성을 엿볼 수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기능을 하고 있으리란 에단의 추측대로 이 동굴은 해동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였다.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던 서윤이 그들의 추측에 살을 붙여주었다.
“루바르잔에서 혹 풍수설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만.”
‘풍수?’
누구도 안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풍수란 터를 잡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필요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신성을 따르는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학설이다.
“풍수학에 따르면 천지만물에 늘 기가 흐르고 있지.”
“기……. 마력 같은 겁니까?”
“비슷하다 여기곤 있으나 과인이 마법에 대해 모르니 확언할 수는 없겠군.”
서윤이 낮게 웃었다. 조카를 예뻐하다 보니 그 친구들까지 덩달아 귀엽게 느껴졌다.
“자연, 공간, 인간 등 모든 존재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근원이라. 시간과 공간에는 음과 양의 질서가 있으니 이 질서를 이해하고 유익한 기운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 바로 풍수학이다.”
그는 대략적으로 기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후 양손을 들어 동굴을 빙 둘러 가리켰다.
“보통은 늘 조화롭게 흐르고 있으나, 종종 상서로운 기운이 특정한 곳에 양 떼처럼 몰려드는 경우가 있지.”
“한 곳에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쥬다스가 물었다. 전생에 현자라 칭송받았던 그라 해도 아예 가본 적 없는 나라의 학문까지는 알지 못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 본 서윤이 잠시 답하길 망설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냥. 여긴 그냥 좋은 기운이 밀집된 맑고 깨끗한 공간이다냥. 아래로 내려갈수록 순도가 높아지고 불순물이 씻겨 사라진다냥.」
「그러니까 이그레트. 이 동굴은 제국으로 치자면 교황청 같은 느낌이야.」
백호에 이어 유니가 대신 동굴에 대해 설명했다. 그에 질세라 토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응요. 인간은 아마 그거랑 비슷한 느낌일 거다요!」
「그거?」
「그거 말이다요. 그거. 으에에, 전에 이그레트도 교황청에서 받았던.」
안타깝게도 중요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바람에 정작 의미는 통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토니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토니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를 짚어주었다.
“정화세례.”
「맞다요! 정화세례! 여기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다요!」
답답함이 해소되어 신이 난 토니와 반대로 이번엔 정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다른 일행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으음. 정령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동굴이 교황청에서 정화세례를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하는구나.”
“신기하네요. 신이 내리는 축복과 같은 효과를 자연동굴에서 볼 수 있다니.”
신성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루바르잔인들에겐 해동에서 지금까지 보고 겪은 일 중 가장 기이한 현상이었다.
신이 개입하지 않는데도 자연의 기운만으로 몸과 영혼이 정화가 될 수 있다니!
감탄하는 일행 사이에서 성왕 이서윤만이 홀로 표정이 어두웠다.
「서윤.」
백호의 푸른 눈동자 한 쌍이 예리하게 그를 쫓았다.
「역시 청룡 녀석, 많이 다친 거냥? 그래서 쉬면서 기운을 회복하고 있는 거지냥?」
무거운 추 같은 답이 입술 끝에서 맴돌다 툭 떨어졌다.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백호여.”
동굴은 제법 깊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면서 한기가 들어찼다.
그나마 벽면마다 붙어 있는 횃불에 불이 들어와 앞을 분간할 수 있었다.
연금술로 특별 제작한 이 횃불들은 사람이 근처에 다가오면 인식하여 자동으로 화륵 타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다시 저절로 꺼졌다. 화재가 날 리 없이 안전하면서도 간편한 장치였다.
원리는 다르나 마치 제국에서 사용하는 마법전등과 비슷한 기능이다.
마법에 익숙한 쥬다스 일행에게는 그리 신기한 광경은 아니긴 했지만 해동의 문물이 제국 못지않게 발전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말을 타고 경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뾰족하게 돋아난 크고 작은 종유석들이 보였다.
“와.”
세이지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자세히 보니 단순 종유석이 아니라 전부 보라색으로 빛나는 자수정이었다. 보라색 물결이 천장과 벽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이칼이 휘유 휘파람을 불었고, 에단도 찬찬히 주변을 살피며 감탄했다.
“동굴 바닥에 이러한 공간이 존재할 줄은.”
타오르는 횃불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수정들은 거울처럼 주변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반투명하게 그 속이 비쳐보였다.
냐앙!
그때, 백호가 쏜살같이 앞으로 홱 튀어나갔다.
“호랑이님……?”
그 모습을 본 란이 얼굴을 가린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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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