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65화 (16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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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소망

「그렇다는 건 지금의 청룡은 성격이 개망나……!」

덥석!

청룡은 기겁하는 백호의 덜미를 한손으로 잡아 올렸다.

“청룡이라고 부르지 마. 지금은 ‘가야’다.”

「냐악?!」

“흐흥. 뭐야. 넌 아직 이름도 없는 거냐? 쥐방울만 한 여자애 꽁무니를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결국 계약도 하지 못한 거냐? 야옹아?”

「시, 시, 시끄럽다냥! 청룡 주제에!」

“가야라니까.”

청룡 가야는 그 말과 함께 백호를 손에서 놓았다.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한 백호가 부르르 치를 떨었다.

「솔직한 청룡이라니! 므으으, 이건 이거대로 재수없다냥.」

“…….”

밑에서 뭐라고 냥냥거리든 간에 이미 가야의 관심 밖이었다.

가야는 팔짱을 낀 채 힐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긴 건 영락없이 해동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눈만 백호와 같은 푸른색이었다.

긴장감 어린 분위기로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그는 마지막으로 서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청룡.’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가야는 해동의 왕을 향해 반가움을 표하거나 아는 척하지 않고 홱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상태는?”

“음, 그래. 잠시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야.”

별거 아니란 듯 고개를 젓는 쥬다스였지만 청룡 가야는 그가 갑작스런 정신력 소모를 감내하느라 자수정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령왕 넷에 신수 하나라.’

정령과의 계약은 서로의 정신과 정신을 잇는 술법이다. 흔히 말하는 ‘친화력’이란 바로 정령의 정신을 감당할 자질이 있는가를 뜻한다.

정령이 가진 힘을 제어하기 위해선 그들이 가진 정서와 감정, 욕망 등에 져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의 정신에 감응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만 계약이 가능했다.

‘조금 무리하긴 했나.’

보통 사람이라면 정령왕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이미 정령왕 넷이나 감당하고 있던 정신회로에 신수가 추가됨으로 연결고리가 5개로 증가하자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나마 그였기에 버티는 일이지 다른 이였다면 이미 정령폭주가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말로 청룡과……, 신수와의 계약을 해내었구나.”

가까이 다가온 서윤이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친절히 웃어주지는 않지만, 분명 최후까지 해동을 지키기 위해 제 몸을 내던진 그 청룡이 맞았다.

해동의 성왕 이서윤은 청룡이 되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으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진정 이리되어 다행이야.”

“제가 해동의 신수와 계약한 것으로 곤란을 겪으시진 않겠습니까?”

“어차피 백 년도 넘게 적합한 계약자를 찾지 못하여 큰 곤란을 겪던 참이다. 루바르잔의 황태자라 불리고 있으나 너는 우리 해동의 아들이기도 해. 하니 이를 어찌 곤란이라 여기겠느냐.”

서윤은 그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청룡을 구해주어 고맙다. 쥬다스. 나는, 이 나라는 네게 늘 감사할 일 뿐이로구나.”

“해동의 아들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따로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외숙.”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탓에 서윤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아이에겐 정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여린 몸으로도 조곤조곤 할 말은 다 하던 하윤이 생각나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카의 언행은 보면 볼수록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일단 어찌 급한 상황은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만.”

쥬다스는 대강 어지럼을 삭히고 몸을 일으켰다.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군요.”

“……그렇지.”

모두의 시선이 청룡 가야에게로 향했다. 가야는 무신경한 얼굴로 계약자를 따라 무릎을 폈다.

“가야야. 네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

“주인이 원한다면.”

동물계 정령은 자연계와 다르게 계약자를 아예 ‘주인’으로 인식했다.

본래 동물로 시작한 신수인지라 계약자를 상위서열로 판단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계 정령들이 술사를 사랑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복종이었다.

“저 못생긴 고양이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사방신수는 오랜 세월 계약을 맺지 못해 나라를 수호하는 힘이 약해져 있는 상태야.”

「누가 못생겼다냐!」

「……고양이인 건 괜찮고?」

발끈한 백호를 바라보며 유니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야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해동의 국토는 신수의 힘으로 생명력이 유지되는 풍요로운 땅. 그러나 본래는 죽은 모래와 귀기에 뒤덮인 척박한 영토였어. 해동을 건국한 초대 국왕 ‘이강’의 뜻 아래 우리는 각각 동서남북 사방위의 수호신수로서 존재해 왔으나.”

여기까진 현재 해동을 다스리는 성왕 이서윤도 알고 있는 역사였다.

그리고 뒤에 이어질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서윤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만일 넷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그 땅에는 귀신들이 들끓게 될 거야.”

말인즉, 해동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쥬다스 일행이 해동의 수도로 오는 도중에도 귀기에 덮인 마을들을 종종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는 아마도 동시에 이강을 만났다.”

“……?”

‘이강’이라면 조금 전 가야가 언급했다시피 해동의 건국왕 이름이었다.

그는 사방신수와 최초로 계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천 년도 전에 죽은 자의 이름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백호가 벌떡 일어섰다.

「뭐냥! 전부 같은 함정에 빠진 거였다냥?」

“네가 지금 나랑 같은 걸 떠올린 걸 보면 그렇지 않겠냐?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단순한 야옹아.”

「너, 너는 어떻게 알았다냥? 혹시 주작이나 현무를 만났다냥?」

어찌나 놀랐는지 백호는 청룡이 걸어오는 시비에 응할 생각도 못했다.

다급해 보이는 백호를 향해 청룡 가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 만났어. 만나자마자 좋지 않은 모습으로 헤어졌다는 게 문제지만.”

“좋지 않은 모습……?”

쥬다스가 작게 가야가 한 말을 따라 입안으로 굴렸다. 그러자 가야는 곧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강은 우리의 소중한 첫 계약자이지만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당연히 천 년도 더 전에 죽었어.”

“그렇다면.”

“결론만 말하자면 사령술사들은 사방신수 전원에게 이강의 환상을 보여주고 함정에 빠뜨린 거지.”

사령은 신수들이 약해진 틈을 타 그들의 사랑하는 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용했다. 그리고 마음속 허를 찌르는 방법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주작과 현무는 완벽히 사령에게 먹혔어. 부끄럽지만 저 역시 둘 곁에서 반쯤 잠식당하다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그러나 결국 점차 몸을 갉아먹는 잠식을 이겨내지 못했고, 종래엔 사령이 될 위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동면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 잠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인 감상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가야는 차분히 제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쥬다스를 희한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혼자서 애쓸 필요 없다고 했던가.’

정말이지 특이한 인간이었다. 이강과 계약한 이래로 해동 왕가를 지키며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신수에게 무언가를 늘 요구해왔다. 누구나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고 강한 힘이 되어주길 원한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미 강했다. 또한 그렇게 강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느 것도 욕심내지 않았다.

그가 계약을 원한 이유는 오로지 청룡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상대에게 지켜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상대를 지키기 위해.

냐오오

고양이 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가야는 찜찜한 표정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우리 넷 중 가장 무식하고 단순한 야옹이가 어째서 가장 멀쩡했지?”

「뭐라는 거냥.」

계속되는 청룡의 결례에 백호가 가느다랗게 가자미눈을 떴다.

「도대체 그 따위 함정에 왜 속는 거냥? 난 보자마자 한눈에 알았다냥. 이강의 냄새가 전혀 아니었다냥.」

“오호라. 너 이제 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냐?”

「고양이도 개도 아니다냥!」

바락 소리쳐 봤자 아무도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백호는 힘없이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주작과 현무는 이미 틀린 거구냥…….」

“그 녀석들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은 이제 소멸뿐이지.”

가야는 사령의 잠식을 막기 위해 동면을 택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청룡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주작과 현무는 이미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신수들께선 방위마다 영토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득 에단이 질문을 해왔다. 가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다면 사령에게 먹힌 두 신수의 영토는…….”

“끝장이지.”

엄청난 이야기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바람에 다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질문을 꺼낸 에단이 무거운 눈으로 고개를 숙이자 가야는 다시 말했다.

“이대로 두면 해동은 망국의 길을 걷는다. 사령이 된 신수는 주작과 현무. 즉 해동의 남과 북이다. 사령이 된 신수를 소멸시켜도 다시 그 땅을 관리할 새로운 신수를 찾기 전까진 회복이 불가능해.”

“그런.”

“다만, 적어도 지금 살아 있는 동쪽과 서쪽 영토는 지킬 수 있겠지.”

가야의 푸른 눈동자가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결정은 주인에게 맡길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일단 가야를 데리고 동굴에서 나왔다. 더 이상 동굴에 남아 사기를 정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청룡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동굴계단을 내려갔던 일행은 무거운 발걸음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내 너를 초대한 이유는 그저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거늘.”

서윤이 쥬다스를 향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하필 시기가 이렇게 어둡구나.”

시기가 어두워진 이유는 임금의 부덕 탓이 아니었지만 서윤은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껏 되살렸다고 생각한 나라가 아예 망국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은 그의 숨통을 올가미처럼 조였다.

하지만 서윤은 쥬다스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스스로 그 압박과 부담을 감내했다.

“하지만 큰 걱정 말거라, 아가. 이 나라는 그리 약하지 않단다.”

괴롬을 겉으로 티내지 않는 고집스런 심성마저도 닮아 있는 삼촌조카지간을 보며 쥬다스의 수하들은 속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삼켰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린 큰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가 먼저 티를 내지 않으면 아는 척하기도 어려웠다.

“가야는.”

“음?”

쥬다스는 제 외삼촌보다 더 의연한 얼굴로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해동의 신수입니다.”

계약은 했으나 청룡의 힘은 본래 해동을 수호하는 데에 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제부터 해동을 돕고자 하는 건 루바르잔의 황태자가 아닌 해동의 신수 청룡의 뜻이니 외숙께서도 걱정 마십시오.”

그러니 국제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쥬다스는 해동이 제국에게 숙일 명분을 제하고 그들을 돕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조카아이를 바라보던 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마치 지금 무르익은 봄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배려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 다음 편부터는 '20장. 그림자밟기'로 이어집니다.

그림자밟기란 얼음땡, 멀리뛰기와 비슷한 어린아이들 놀이 중 하나인데 요즘 아이들도 하려나 모르겠네요 ㅎ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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