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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사령술사들을 적으로 선포한 후, 며칠간 해동 왕실에서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나라를 수호하던 신수가 무려 둘이나 사령에 씌어 타락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수호신이 아니라 말살해야 하는 적이다.
그러나 성왕 이서윤은 일부러 그 사실을 민중에 알리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알리고 주작과 현무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왕실이 반감을 살 수 있다.
그만큼 해동이란 나라에서 사방신수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신수를 수호신으로 모셨고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다. 루바르잔 제국이 왕권과 신권을 동일선상에 놓고 민심을 다룬다면 해동은 수호신에 대한 민속신앙이 왕권에 대한 충성도보다 높았다.
왕조차 신수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을 높였으니 백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삐이이?”
“……뭐야, 이 새는.”
그리고 백성들의 경외와 사랑을 받는 사방신수 중 가장 으뜸이라 여겨지는 청룡은 지금 진지하게 한 존재를 마주 보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영롱한 푸른 비늘, 잘 익은 홍시처럼 주홍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닭 한 마리 정도 크기의 미니사이즈.
동방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묘한 생김새의 이 괴수는 다름 아닌 블루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드래곤과 닮았지만 엄연히 하위개체였고, 용족에 해당하긴 했어도 진짜 배기 용과는 차이가 컸다.
청룡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애완견 이나 다름없었다. 청룡 가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발로 플루비를 툭 밀었다.
“비켜.”
종의 동질감과 강한 용에 대한 동경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플루비가 가야의 버선코에 밀려 털퍼덕 엎어졌다.
“쁘엑.”
“거, 새는 아니고 꼴에 용족이긴 합니다만.”
가야는 무심하게 지나치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바이칼이 넘어진 플루비를 일으켜 세워주고 있었다. 토실한 궁둥이에 묻은 먼지까지 툭툭 털어준 그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법 영리한 와이번입니다. 브레스도 쏠 줄 알죠.”
“…….”
“아, 고소공포증은 있지만 요샌 나름 잘 납디다.”
“…….”
가야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시하고 있지도 않았기에 바이칼은 씨익 웃으며 플루비를 놓아주었다.
파다닥, 플루비가 요란하게 날갯짓하여 가야의 앞에 내려앉았다.
“이 녀석 이름은 플루비. 주군께서 직접 지어주셨죠.”
“흐응, 고어군. ‘겨울비’냐.”
가야는 제게로 겁도 없이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리는 와이번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발에 채여 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꾸구귝 비둘기소리까지 냈다.
가야는 주인이 직접 이름을 지어줬다는 말을 듣자 플루비에게 조금 관심이 생겼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새롭게 계약을 맺긴 했으나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충족감이었다.
동물계 정령들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기 때문에 주인이 없으면 지독한 결핍을 느낀다. 장기간 계약자를 만나지 못한 신수는 나약해질 뿐 아니라 극도로 예민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딱히 계약자가 없어도 정령계에서 평화롭게 노닐며 안정을 취하는 자연계 정령과는 달랐다. 신수는 늘 애착을 형성할 주인을 필요로 하고, 주인의 명을 듣는 것에서 기쁨과 안정을 얻는다.
그들이 유독 해동 왕가라는 핏줄에 집착하는 이유도 한 번 애착을 형성한 주인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청룡은 수백 년 동안이나 적합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사방신수라고 해서 무조건 해동 왕가와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술사로서의 자질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네 마리 신수와 한꺼번에 계약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는 루바르잔에서 자연계 4속성과 동시에 계약한 계약자가 몹시 희귀한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했다.
보통은 왕 한 명당 하나의 신수와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 정권에는 신수의 명칭이 따라붙는다.
가장 최근 계약을 맺은 백여 년 전 현무 예종왕 집권 당시에는 ‘현무의 시대’라 불렸다. 그 전은 백호의 시대였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청룡의 적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청룡 가야에게 이번 계약은 여러 의미로 특별했다.
“그 녀석한테 잘 어울리네. 이름.”
무의미했던 것들도 쥬다스가 연관되는 순간 귀해졌다.
청룡은 길가를 따라 죽 자라난 갈대를 하나 꺾어 들고선 발밑에서 알짱거리는 플루비를 향해 내밀었다.
“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갈댓잎을 쳐다보던 플루비가 짧은 앞발을 뻗어 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잡힐 동 말 동 갈대는 눈앞에서 홀랑홀랑 사라지곤 했다.
플루비는 완전히 놀이에 몰입하여 날개마저 파닥거렸다.
예상외로 플루비와 잘 놀아주는 가야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본 바이칼이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물었다.
“그런데 청룡께선 여기서 뭐 하십니까?”
“가야.”
“예이, 가야 님. 가야 님은 여기 계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해동 왕실에선 국가적 비상사태를 목전에 두고 긴 회의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쥬다스 일행은 궐에 머물며 힘을 보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더인 쥬다스가 해동을 전력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는 쥬다스의 개인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대놓고 루바르잔에서 원조를 보낸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청룡을 표면에 내걸고 이루어질 예정이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사령술사들을 징벌할 계획이 수립되기 전까진 단독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해동의 무사들과 함께 루바르잔의 기사들도 합동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청룡 가야는 쥬다스의 명에 따라 본래 자신이 맡았던 수호임무에 임했다.
천(天)과 우(雨) 속성인 청룡은 귀기에 휩싸인 하늘을 가장 먼저 정화시켰다.
단번에 모든 하늘을 되찾을 순 없었지만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영역을 점차 넓히는 중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벌써요?”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와, 백호 님도 아까 처마 위에서 낮잠 주무시던데. 사방신수들 진짜 하는 거 없…….”
“바이칼.”
진지하게 신수들의 무용(無用)에 감탄하고 있던 바이칼의 뒤로 에단이 나타났다.
농땡이 피우다 걸린 기분이 든 바이칼은 찔끔하여 지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지금 노는 게 아닙니다. 청룡, 아니 그 가야 님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난 가만히 있었어. 말은 네가 걸었잖아.”
쥬다스와 계약한 청룡은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성격이었다.
에단이 지그시 쳐다보자 바이칼은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실토했다.
“예, 뭐. 제가 말 걸긴 했죠. 어휴.”
“대련 시간이다. 중요한 대화 중이 아니었다면 그쯤하고 따라오도록.”
체력단련까지는 마법기사인 바이칼이 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련은 달랐다. 루바르잔과 해동이 각각 팀을 나누어 서로의 전력을 견주고 합을 맞춰보는 시간이므로 에단은 모든 기사단원을 빠짐없이 소집했다.
‘대련’이란 소리에 바이칼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그거 저도 합니까?”
“자네가 루바르잔의 기사가 맞다면 당연히 해야 할 훈련이다.”
“기사는 맞는데 마법기사죠. 해동에는 마법사가 없잖습니까?”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와 흡사한 술을 다루긴 하더군. 자네에겐 특히 좋은 배움터가 될 거다.”
해동에서 무인은 검사와 권사로 나누어진다.
그중 권사는 격투하는 마법사라고 볼 수 있는 특이한 포지션을 취했다.
권사가 사용하는 술법은 인체가 즉 마법진 그 자체다. 몸 안에 저장한 기운을 ‘혈’이라 불리는 길을 통해 순간순간 뿜어내는 것으로 기술을 사용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대단위 마법이나 초장거리 포를 쏘아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대신 중장거리 범위 내에서만큼은 물이나 불을 포함한 온갖 속성의 술법을 다루며 자유자재로 공격이 가능하다.
왕의 호위무사인 다울이 바로 이 권사에 속했다.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잖아요, 포지션이. 마법기사는 육탄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역할이 아니란 말입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적이 지척으로 치고 들어오면 당하기만 할 텐가? 해동의 무사들은 그런 다각도전투에 해박해. 어느 정도 근접전에서 상대하는 법은 알아둬야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지 않으려고 검기사들이 있는 거잖습니까!”
바이칼의 항변은 에단의 귀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일침만이 되돌아왔을 뿐이다.
“전투상황은 늘 준비된 상황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보통은 자비롭게 납치로 끝나지 않지.”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얘기는 제발 그만.”
투르케 사막에서 가출 소녀와 함께 납치된 전적이 있는 바이칼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맥없이 에단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까지도 갈대를 든 채 플루비와 놀아주고 있던 청룡 가야의 시선이 잠시 그들을 쫓다 스르르 되돌아왔다.
때마침 갈댓잎을 잡는 데에 성공한 플루비가 잔뜩 신이 나서 삐삣 울었다.
“플루비.”
“삐!”
청룡이 어떤 용인지도 모르고 해맑게 답하는 어린 와이번을 보며 가야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곤 좋다고 갈대를 입에 문 플루비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헤에. 분명 못생겼는데.”
“삐잉?”
“하는 짓이 귀엽네.”
플루비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애교가 몸에 밴 와이번이었다.
녀석은 그간 애교인 줄도 모르고 한 행동에 먹을 것이나 칭찬이 돌아오는 걸 보며 꾸준히 학습했다.
여기선 사냥기술이나 남보다 강해 보이는 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예쁜 짓해봐.”
“끼으웅.”
작은 와이번은 그가 시키는 대로 품에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가야의 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렸다.
「저거 또 뭐한다냥…….」
처마 위에서 낮잠을 즐기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백호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또 귀신같이 들은 가야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어허. 계속 빈둥빈둥 잠만 자면 뱃살 나온다?”
「남이사.」
“힘도 약하고 볼품없는데 뱃살까지 붙으면 큰일 아니냐. 귀염성 없는 야옹아.”
「청룡 따위에게 귀여움 받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걱정 마라냥.」
백호는 길게 하품하곤 꼬리만 내려 흔들거렸다.
「네 주인은?」
“바로 옆 건물. 서고에 있어.”
「아니. 어딨는진 나도 안다냥. 안가 봐도 되냥?」
“오늘의 정화 할당량을 마쳤으니 슬슬 찾으러 가볼 생각이긴 했지.”
과연 사방신수의 으뜸이라 여겨지는 청룡답게 하늘 정화를 시작한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수도를 중심으로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백호도 그 변화를 느끼고 처마에서 내려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뭐 아무튼 솔직해지니까 말이 잘 통해서 좋긴 하다냐.」
“흐으음.”
「왜 그러냥?」
청룡은 플루비를 안은 채 서고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날개가 있어서 귀여움이 배가되는 것 같아. 주작도 그래서 제법 귀여웠잖냐. 백호, 우리도 외형에 날개를 추가할까?”
쭐래쭐래 그를 따라가던 백호의 표정이 말린 감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서방의 드래곤 계열이나 날개가 어울리지. 넌 동방 용이다냥. 날개가 달린다고 별달리 멋있어질 것 같지 않다냥.」
“멋있을 필요 없는데? 난 플루비처럼 예뻐지고 싶은 건데?”
「변태 자식.」
백호는 다정한 어조로 오랜 친구를 호칭했다.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분위기의 두 신수를 번갈아 본 플루비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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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으어어 늦었습니다.;; 바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