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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그렇게 백호와 청룡이 티격태격 주고받으며 서고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둘을 제치고 먼저 서고로 불쑥 들어섰다.
「므앙? 저 아인…….」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오, 이서윤의 아들인가.”
「서윤과 많이도 닮았다냥. 끄응, 친화력 없는 점까지 판박이일 필요는 없는데냥.」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아이는 다름 아닌 넓은 궁궐에서 사랑받고 자란 하나뿐인 왕세자였다. 근래 태어나는 왕족의 친화력 미달은 이젠 별로 신기할 일도 아니라 백호는 절망하는 대신 가볍게 투덜거렸다.
「근데 넌 또 뭐가 그렇게 즐거운 표정이다냥?」
문득 올려다본 가야의 표정은 꼭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한량 같았다.
“글쎄. 저 꼬마 왕자님이 무슨 사고를 칠지에 대한 기대감?”
「걱정이 아니라 기대인 거냥? 하여튼 너 이 자식.」
“시끄러. 우린 얌전히 구경…… 아니, 감시나 하자고.”
가야는 백호와 플루비를 각각 한 팔씩 안은 채 이지오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그의 주인이 저런 어린애에게 밀릴 리는 없지만 만일 해를 끼친다고 여겨지면 곧장 끼어들어 차단할 생각이었다.
세 쌍의 지켜보는 눈길이 있는 줄도 모르는 어린 왕세자는 나름대로 잔뜩 긴장하여 서고에 들어섰다. 목표는 금방 눈에 띄었다.
‘은색…….’
왕세자는 잠시 멍하니 그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신과 사촌지간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신비한 색상이었다.
해동의 어린 왕세자는 쥬다스를 보고 이질감과 동시에 질투를 느꼈다.
‘이럴 수가! 완전히 이방인이잖아.’
사방신수들이 사령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기밀에 부쳐졌지만, 청룡의 계약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왕세자는 아비인 이서윤으로부터 직접 쥬다스가 청룡과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고로 달려왔다.
조용하고 어둑한 책장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인 외모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 왕세자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아니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잖아? 예의를 지켜 인사하자. 우리나라 왕족으로서 근엄함도 보여야지.’
“그…….”
막 떨리는 결심을 다잡고 말을 걸려던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형님, 이건 어떻게 읽는 건가요?”
왕세자로선 안타깝게도 상대는 혼자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서윤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비는 시간 동안 서책을 통해 해동의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배다른 동생인 세이지가 함께 있었다.
‘동생?’
머리색은 달랐지만 두 사람이 형제관계라는 사실은 열두 살 아이의 시선으로도 알아보기 쉬웠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그건 역사서라 어려울걸? 게다가 세로로 읽는 책이야.”
“란.”
세이지와 란은 그동안 제법 친해져 있었다. 해동의 언어를 잘 모르는 세이지는 의사소통까진 통역 인챈트가 걸린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해 쩔쩔맸다.
그런 세이지를 챙겨준 건 형 쥬다스보다는 상냥한 픽시 란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 정도쯤이야. 쥬다스 님은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바쁘잖아. 또 궁금한 게 생기면 나한테 물어봐.”
그녀의 친절에 감동한 세이지는 낮의 추한 모습조차 개의치 않았다. 쥬다스가 워낙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다.
세이지나 란이나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자란 이들이었다. 나이는 란이 훨씬 많긴 했지만 픽시 특유의 순수함이 있어 또래처럼 어울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고에서 활자를 가르치고 배우며 어느덧 절친한 친구로 발전했다.
그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쥬다스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주들의 재롱을 보는 노인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아, 그럼.”
그는 탁, 가볍게 책을 덮어 본래자리에 꽂았다.
“이제 슬슬 가볼까 하는데.”
세이지와 란이 쥬다스를 따라 어지럽게 꺼내놓았던 서책을 전부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기 계신 귀인께선 책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 아니요!”
왕세자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황금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엔 놀람이나 의아함 따윈 전혀 없었다. 왕세자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전부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 않…… 습니다.”
“나눌 말씀이 있다면 밖을 거닐며 나누지 않겠습니까. 날씨가 참 좋습니다.”
“예, 예.”
이미 왕족의 근엄함을 보이려는 의지는 훨훨 날아간 지 오래였다. 왕세자는 가까스로 울상을 짓고 싶은 걸 참았다.
서고를 나오자마자 따가운 햇볕이 쏟아졌다. 쥬다스의 말대로 날씨는 정말 좋았다.
왕세자는 한발 늦게나마 격식을 차려 자신을 소개했다.
“해동 이씨 왕가의 후손 ‘이지오’입니다. 마침 궐에 걸음 하셨단 소식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혹 실례가 되었다면.”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루바르잔의 두 번째 이름을 이은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입니다.”
제국 루바르잔의 첫 번째 이름은 황제를 뜻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름을 잇는다는 수식은 황태자의 것이었다.
해동의 왕세자 이지오가 예를 지켜 인사한 이상 쥬다스도 역시 법도에 따라 그를 대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삼촌 조카로 허물없이 대하는 이서윤과는 달랐다.
이에 쥬다스는 이지오가 처음엔 호감을 가지고 다가왔으나 정작 자신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해동은 제국과 달리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니. 어려울 만도 하겠구나.’
지금 이지오가 보이는 낯설어하는 태도는 해동 사람으로서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그가 쥬다스를 보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쥬다스는 동방 특유의 황색 피부도 아니었으며 머리와 눈 모두 인간 같지 않은 색상을 띠고 있었다.
이름도 제국식이었으며 신분마저 그냥 황자가 아니라 제위를 물려받을 후계로 몹시 비범했다. 사촌지간이라 한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에선 모든 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도리어 여동생의 아이란 이유만으로 아낌없이 애정을 보이는 성왕 이서윤이 특이한 편이었다.
쥬다스는 이지오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지오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태자께서 이 나라엔 어인 일로 오신 건지요?”
“5년 전 성왕 전하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초청을…….”
몰랐던 사실이긴 하나 죽은 하윤 공주에 대해 늘 애틋해하던 아비 이서윤을 떠올리면 그럴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아바마마께선 이자를 우리나라에 초대하신 거지? 괜히 제국에 청룡만 빼앗기질 않았나.’
이지오는 청룡을 뺏긴 거라 생각했다. 한번 안 좋게 보다 보니 무엇 하나 곱게 보이질 않았다.
“형님.”
마침 란과 함께 책을 모두 정리하고 서고를 나온 세이지는 멋대로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는 이지오를 보며 당황했다.
‘경쟁?’
겉으로 볼 때에는 각각 일국의 황태자와 왕세자로서 일국의 후계자로 비슷한 입장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론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세이지가 보기엔 둘을 비교하는 자체가 이미 쥬다스에게 무례였다. 이는 마치 하룻강아지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범을 놓고 비교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쪽은 제 아우 세이지, 그리고 요정족 란입니다.”
쥬다스가 책을 정리하고 돌아온 두 사람을 지오에게 소개했다. 세이지는 황당한 심정을 속으로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루바르잔 3황자 세이지입니다.”
“란이야.”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란을 보며 지오가 흠칫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반말을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정은 분명 선녀처럼 아름다운 존재라 들었는데.”
“란이는 참으로 어여쁜 아이입니다. 물론 해동에서는 익숙한 종족이 아니긴 하겠지요.”
쥬다스는 지오가 찡그리든 말든 태연히 대꾸했다.
지오가 볼 때에 낮의 란은 그야말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생김새였다.
차라리 대놓고 특이하게 생긴 괴수나 짐승들이라면 그러려니 싶겠는데 사람 모습에서 피부나 특정 부위들이 징그럽게 자리 잡아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꼭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는 걸 볼 때나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뼈 등을 볼 때 느끼는 징그러움이 그녀의 외모에 녹아 있다.
마치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귀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지오는 소름이 오른 팔뚝을 긴 소매 안에 감추며 가까스로 시선을 돌려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루바르잔 제국의 3황자까지. 특이한 구성원이군요.”
“그렇습니까?”
쥬다스는 먼 나라 얘기하듯 멀거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태연함에 어쩐지 울컥한 지오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린 지오로써는 요괴같이 생긴 소녀에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아들과 함께 다니는 쥬다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예의에 어긋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하면 묻지요. 당신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예.”
즉답이었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허허거리던 것과 다르게 몹시 단호했다.
“어째서?”
“저도 묻겠습니다. 신뢰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이지오는 갑작스런 질문에 대해 답하지 못했다. 간단한 내용이었는데도 통 이렇다 할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오가 멍하니 입을 다물자 쥬다스는 다시 물었다.
“그럼 주로 어떤 자에게 신뢰를 주십니까?”
“믿음을 갖기 위해선 상대를 완벽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에게나 신뢰를 주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답할 수 있었다. 이지오는 당당히 제 의견을 밝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 하니, 꾸준히 오랫동안 지켜봐서 판별할 일입니다.”
“오랫동안이란 정확히 얼만큼입니까?”
“적어도 사계는 지켜봐야 하겠지요.”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세자 전하는 신뢰를 얻는 법은 모르고,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만 배우셨군요.”
그 말에 이지오의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나는 이 나라의 왕족입니다. 그 누가 감히 나를, 해동의 왕세자를 의심한단 말입니까.”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일수록 의심을 사기 쉽지요. 다른 사람들이 전하께 보이는 모습은 신뢰가 아니라 충의입니다.”
“그게 무슨.”
“한평생을 알아도.”
“……?”
“알 만큼 알아 이젠 표정만 봐도 속마음을 알 수 있고, 거짓말할 때 보이는 사소한 버릇마저 알고 있는 이라 한들.”
그조차도 몰랐다. 가족처럼 아꼈던 아이들이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가 지킨 건 사람이 아니라 혼자만의 규칙이었다. 그는 타인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지켰지만 소중한 이들을 상처 속에 방치했다.
“신뢰는 보통 쌍방향이라 여기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결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고로 완벽히 타인을 안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듯, 사람은 사람을 배신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프리드가 말한 적 있었다.
쥬다스는 그 말에 뼈저리게 동감했다.
“그럼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
하지만 그건 불신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상대에 대해 완벽히 알 거라는 오만을 버리시란 얘기입니다. 그건 신뢰가 아닌 무지이니.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신뢰코자 하거든.”
늘 평안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관계란 없다. 삶이라는 건 언제나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임을 먼저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이임을.
쥬다스는 사랑하는 친우들로부터 등에 칼을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만일 그 사실을 먼저 알았더라면 모든 것이 그렇게까지 일그러지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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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공든탑
즐거운(?) 월요일의 시작입니다.ㅎㅎㅎ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