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68화 (16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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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어른인 척 노력하고는 있으나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한 어린 왕세자는 그가 하는 말에 대해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조용히 경청하던 세이지가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그렇구나. 우린 분명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지금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형님을 믿어.’

신기했다. 당장 쥬다스가 그에게 손해를 입힌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세이지에겐 ‘형님이 하는 일이라면 이유가 있을 테니까’라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세이지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지오는 어려운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화두를 돌렸다.

“하면 청룡과의 계약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까?”

“흠, 그렇지요. 예정한다고 될 일은 아닌 걸로 압니다.”

“대체 왜 청룡은 당신을.”

이 나라 왕손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타국의 황족을 선택했는가.

이지오는 차마 그리 말을 잇진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분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조차 해내지 못한 계약을 그저 참새가 벼 알곡을 빼먹듯 홀랑 맺어버렸다.

다른 것보다 타국에 청룡을 빼앗겼단 생각에 억울함마저 들었다.

그때, 불쑥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내 맘.”

“……?”

그들이 뒤를 돌아보자 백호와 플루비를 각각 한 팔씩 안아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 심심해하던 가야였다.

“누굴 선택하든 내 마음이지.”

지오는 아직 가야가 청룡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야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냐고? 우리 사방신수는 언제나 스스로 주인을 선택했다.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국적이라느니 인종이라느니 복잡하게 나눠질지도 모르지만, 실제 그딴 건 무의미해.”

스스로를 신수라 칭했다. 그에 더해 자유로운 복장과 건방진 태도,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등을 훑어보며 왕세자는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명백히 해동 왕가의 피가 흐른다. 그러니 일단 사방신수의 계약자가 될 조건은 충분하다.”

“겨우 그 정도로……!”

“또한 자연계 사대정령을 매료시켰을 정도로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자질.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깨끗하고 맑은 영혼.”

가야가 쥬다스의 정령들을 ‘사대 정령왕’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건 나름의 배려였다.

“이렇듯 모든 게 완벽한 자가 내 주인이 되었다. 뭔가 문제라도?”

영락없이 불량배가 시비 거는 모양새였다. 이지오는 물론이고 세이지와 란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가야.”

삐딱한 시선으로 이지오를 내려다보던 가야는 주인의 부름에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런 청룡의 등장으로 불편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쥬다스만이 홀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쥬다스는 손을 들어 가야의 옆구리를 넌지시 가리켜 보였다.

“플루비가 마음에 든 모양이로구나.”

“쁘에엑.”

거기엔 플루비가 붙들려 밀가루 반죽처럼 찌부러져 있었다.

플루비가 쥬다스에게 가려 바둥거리자 가야는 순순히 손에서 놓아주었다. 쥬다스는 비둘기처럼 푸드득 날아온 플루비를 부드럽게 받아 들었다.

“플루비. 바이칼은 어디에 두고 가야랑 왔누?”

‘바이칼’이란 말에 반응한 플루비가 삐삣 울며 날개를 까딱였다.

그 장면을 유심히 쳐다본 가야가 백호를 어깨에 척 얹으며 물었다.

“오. 이 녀석 주인이 바이칼이야?”

「캬악. 이거 놔라냥!」

백호가 질색하여 발톱을 세웠지만 청룡에겐 일말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아까 에단이랑 무슨 훈련한다고 가던데.”

“흐음, 훈련이라.”

“어. 안내해 줄까? 주인.”

이지오는 돌연 시끌시끌해진 그들을 바라보며 굳었다.

나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청룡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어 버렸다. 아니, 쥬다스는 그대로였지만 청룡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명랑했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뿐 아니라 이미 일행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외웠을 정도로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다.

“당신이…… 청룡이라고?”

지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가야가 청룡임은 알 수 있었다.

지오의 검은 눈동자에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솥단지 위의 뜨거운 김처럼 짙게 서렸다.

“나는 왜 안 되는 겁니까?”

가야는 백호에게 머리를 물어뜯긴 채로 힐끗 지오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제국의 황태자와 그와 계약한 청룡 둘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

“선택은 당신께서 하시는 게 맞습니다. 맞지만, 어째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했음을 아시잖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왕족이 아닌 타국의 황족을, 혹 이제 해동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헛소리.”

비웃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꼬마야. 뭔가 착각하나 본데.”

“……!”

“해동은 우리 사방신수 것이 아니라 너희들 것이야.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뿐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정령은 나라와 인종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들을 유일하게 속박할 수 있는 건 계약자 한 사람뿐이다.

오랜 세월 해동과 함께해 온 신수기에 수호신으로서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해동만을 위한 병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지오는 청룡의 냉정한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방신수에게 애국심 따윈 없다. 그들에겐 계약자에 대한 애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라를 지키는 건 너희 스스로 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사방신수는 그간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수호임무를 맡아 수행해왔다.

‘아버지와 내가 그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을 뿐이구나.’

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저 아쉬워해야 할 일이란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동의 왕세자는 감정적으로는 아직 미숙하긴 하나 현명한 아이였다. 의무가 아닌 그들의 선택이었음을 알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오가 시무룩하게 입을 닫자, 가야는 코웃음 치며 관심을 거두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거 아니다냥? 꼬마가 상처받잖냥.」

가야의 머리에 매달려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백호가 타박을 주었다.

“뭐. 틀린 말도 아닌데.”

「좀 좋게 좋게 말할 수도 있잖냐릉. 여봐, 꼬마. 이 자식 원래 서윤과 계약하고 싶어 했다냥.」

“에?”

해동 왕족인 이지오의 귀에도 백호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팔뚝만 한 고양이가 쫑알거리는 걸 발견한 지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근데 이 계약이란 게 영혼과 영혼을 잇는 술이라 무쟈게 복잡하다냥. 단순히 좋아하고 안 하고로 선택하는 게 아니다냥. 자질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정령의 사랑을 받아도 계약할 수 없다냥.」

“아…….”

그간 신수들이 해동 왕가와의 계약을 거부한 게 아니다. 계약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란 게 분명 존재했다.

청룡은 여전히 삐딱한 표정이긴 했지만 백호의 설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렇다냥! 바로 네가 생각하는 그거…….」

“백호님이 고양이셨다니!”

「므앙?」

아직 어린 왕세자가 받을 충격을 걱정하여 신나게 설명해 주던 백호가 입을 세모 모양으로 오므렸다.

“놀랐습니다. 궐 안에 현재 청룡만 계시다고 들었는데.”

「뭐? 뭐냥? 내 얘기는 소문이 안 돌고 있다냥?」

“백호라고 해서 당연히 호랑이신 줄 알았습니다. 한데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셨을 줄은.”

지오의 감탄을 듣는 동안 백호의 푸른 눈동자 안에 물음표만 가득 차올랐다. 그러다 이내 꽤액 소리쳤다.

「냐아아악! 고양이 아니다냥! 호랑이가 맞다냥!」

“얌마, 우리 야옹이 삐졌잖아. 사과해.”

「청룡 네가 제일 문제다냥! 이게 다 너 때문이다냥! 으냐앙.」

“엉? 내가 뭘 했다고.”

또다시 티격태격 거리기 시작한 두 신수를 뒤로 하고 쥬다스가 이지오에게 태평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궁금하신 건 해소가 되셨습니까?”

“예? 예에. 저.”

“그럼 가십시다.”

“예?”

대뜸 가자는 말에 지오는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벙해졌다.

그러는 사이 쥬다스는 이미 가야에게 다가가 안내를 부탁하고 있었다.

“훈련장? 알았어, 주인.”

쥬다스가 이지오와 함께 가려는 곳은 다름 아닌 수하들의 훈련장이었다.

그간 궐 안에서 지내면서 에단에게는 합동훈련을 맡겨두었다.

왕이 기거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청룡이 붙어 다니기 시작했으니 굳이 호위들이 우르르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국과 동맹국이지만 해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연금술은 물론이고 주술, 무예, 세부적인 문화풍토까지 전부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

해동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을 띄고 있기도 했지만 제국에서 그리 문화공유를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맹을 맺으며 제국이 공식적으로 요구한 건 영토 공유와 연금술 하나였다.

그 연금술마저도 황제가 소수 친위관들과 함께 직접 전달 받았고, 확인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론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감추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해동은 자연스럽게 제국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제국은 해동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넓었고 마법이나 정령술 등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학술이 많았다.

제국 최고의 검술명가에서 태어난 에단도 집안의 검을 익히는 것에 집중했기에 타국의 무술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해동의 왕실에서 무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처음 합동훈련을 제안한 건 에단이 아니라 성왕의 호위무사인 정다울이었다.

‘……곧 큰 전쟁이 일어날 듯하니. 필요하지 않겠소?’

폐쇄적인 해동 측에서 먼저 협력을 제안해 올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해동은 큰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훈련장엔 어쩐 일로.”

“음. 무사들과 함께 훈련해 보신 적 있습니까?”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왕족이 무사와 함께 훈련하는 일은 없다.

이는 해동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지배계층이 그랬다. 지배자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말을 꺼낸 쥬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오늘 한번 해볼까 합니다.”

“예에엣?”

절로 큰 반응이 튀어나왔다.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무사들 틈에 끼어 칼을 휘두르겠다니,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쥬다스의 곁에 있던 세이지와 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조했다.

“형님,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헤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쥬다스 님, 세이지.”

“고맙다, 란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며 지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말리지는 않는 거야?!’

친하지 않아서 그렇다 치기엔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

결국 그는 넓게 펼쳐진 야외훈련장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일행을 관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상한 사람들…….’

해동의 하나뿐인 귀한 왕손이자 왕세자인 이지오에게 저들처럼 편안히 대할 존재는 없었다. 모두가 그를 받들어 왕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과 품성,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만 가르쳐 주었다.

아이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으나, 쥬다스가 말했듯 그저 평가하는 법만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이상한 건 나일지도 몰라.’

지오의 시선이 훈련장으로 먼저 들어서는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 조아라에서는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했네요.

최근 작가그룹 '팀 타우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ㅎ

작가그룹 팀타우린은 '달이 뜨지 않는 밤'을 쓰시는 담덕님과 '마왕의 게임'을 쓰시는 니콜로님, '무한리셋'의 다울님, '핑크레이디' 그림작가셨던 서나님 등이 속한 창작그룹입니다.

공식 카페 주소는 http://cafe.naver.com/teamtaurine 입니다. 저도 오늘 가입했....쿨럭.... 한번씩 놀러오셔요!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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