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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그리고 그를 발견하자마자 즉시 훈련을 정지하고 우르르 달려오는 기사들도 보았다.
“오셨습니까, 전하.”
“어흐. 전하, 살려주십쇼! 단장이 절 죽이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바이칼이 시퍼렇게 멍 든 팔뚝을 내보이며 엄살을 떨었다. 이를 본 쥬다스가 잠자코 웃으며 루니를 불렀다.
파아앗!
허공에서 생성된 푸른 물결이 흐물거리며 붕대처럼 팔뚝을 감쌌다. 열이 쏠려 후끈거리던 자리가 시원해지면서 통증이 완화되었다.
“글쎄다, 바이칼. 에단이 너를 정말 죽이려 했거든 그처럼 멍이 질 일은 없었을 것 같다만.”
“전하의 말씀대로다. 죽이려면 번거롭게 굴리겠나? 일격이면 충분하다.”
“단장. 거 무슨 심정인진 알겠는데 파리 잡듯 말씀하지 마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 곁으로 해동의 무사들도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
무예에 뜻이 없는 이지오로서는 전부 잘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과 자신들 사이엔 무언가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지오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해동의 왕세자가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당사자는 느긋하게 에단에게 훈련 소감을 묻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로 합을 맞추어 보니 어떠하더냐?”
“그간 알지 못했던 것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합동훈련을 허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에단은 진심으로 제 주군께 감사했다. 시작은 정다울의 제안이었지만 에단은 사실 많이 망설였다.
명색이 황태자친위기사단의 단장인 그는 다른 무엇보다 황태자의 호위를 우선시한다.
별도의 명령이 있기 전까진 호위임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해동의 무술에 관심이 있더라도 단독으로 결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에단 스스로도 쥬다스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주군은 상당히 안전에 둔감했다. 지난번 호족 사태 때 몸소 인질이 되어 잡혀간 것만 보아도 그랬다.
만일 그때 에단이 곁에 없었더라면 혼자서 그 호족 소굴에 끌려들어갔을 것이다. 에단은 그리 확신했다.
레이야가 나타난 대나무 숲 마을에서도 그는 레이야를 쫓겠답시고 혼자 숙소를 이탈했다.
쥬다스는 자애로워 보이면서도 막상 자기 안전에 관련해서만큼은 말도 못하게 독단적인 주군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에단은 어떤 상황에서든 쥬다스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해동 왕궁에 들어와서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주인을 철벽 호위했다. 그런 상황이니 합동 훈련이고 뭐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쥬다스가 먼저 눈치채고 일부러 명령을 내렸다. 마침 동물계 정령의 왕이라 불리는 신수 청룡과도 계약했겠다,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단은 명에 따라 합동 훈련에 임했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결과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해동의 무술은 마법과 검을 섞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별도의 무기 없이도 자신의 신체를 무기화하여 전투하는 이능력자도 존재합니다. 이들의 경우, 제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으음? 에단 네게 그 정도 평을 들은 적은 처음이구나.”
“면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해동 무술은 매우 우수하며 무인으로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해동과 제국은 각기 다른 양식의 무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에단이 했던 칭찬은 해동 측에서 역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동의 무사들을 눈앞에 두고 단점을 말하기는 어려워 일단 장점만 보고하였지만, 그렇다 해도 에단을 비롯한 제국 기사단은 해동의 무사들에게 진정 감탄했다.
‘정다울이라 했나. 그와도 한번 검을 맞대고 싶군.’
왕의 호위무사인 정다울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합동 훈련을 제안하긴 했으나 그는 왕을 지키는 자였다.
신수와 계약하지 못한 이서윤이야말로 제대로 된 호위가 늘 필요했다.
‘아마도 그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무사겠지.’
그 추측대로 정다울은 이름난 권사 중에서도 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무인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해동의 무술에 놀란 에단은 그와 언젠가 진검승부로 대련해 보고 싶다는 호승심을 느꼈다.
“자, 그러면.”
“……?”
휘릭-
다루는 자의 키보다 더 길이가 긴 봉이 공기를 가르며 가볍게 바람을 일으켰다.
에단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훈련을 마저 해보자꾸나.”
“전하께서도 참여하십니까?”
서두에 ‘설마’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표정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지오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었다.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탁 걸친 채 웃었다.
“그래. 세이지도.”
“아하하. 잘 부탁할게.”
“…….”
에단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의 주군은, 안전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야 다칠 일이 없을 만큼 강한 정령사라는 사실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이그레트, 쟤가 지금 너 걱정하나 봐.」
「헤헤헤. 기특한 꼬마다요!」
「기특하긴 한데 걱정할 방향이 반대라고 봐요.」
정령들은 걱정에 잠긴 에단을 쳐다보며 동네 아낙들처럼 수군거렸다.
여기 모인 무인들은 전부 제국과 해동에서 손꼽히는 상위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도 쥬다스가 전력을 다한다면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단숨에 전멸시킬 수 있다.
숨을 끊고자 하면 끊어질 것이며 건물을 무너뜨리고자 하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되돌리거나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그가 전생에 거둔 제자인 콜 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고 있던 콜은 제 스승이 훈련에 참여한단 말을 듣고 에단과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스…… 전하. 진심이십니까?”
“하하. 제가 언제 진심이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오라. 흠흠.”
콜은 자꾸만 칼칼해지는 목을 헛기침으로 가다듬었다. 노제자의 표정에서 당황을 읽어낸 쥬다스가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단, 정령의 힘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
「에에에엑!」
이번엔 정령들 사이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늘 과묵하게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마저 눈이 동그래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지?」
「굳이 그럴 건 없지 않아? 우리의 힘은 곧 너의 힘인걸.」
「끄앙. 이제 우리가 필요없다요? 그런 거다요?」
꼭 이별 통보를 받은 여인처럼 훌쩍이는 토니를 손가락으로 쓸어준 쥬다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훈련에 참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각자 위치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훈련이기 때문이지요.”
‘적을 섬멸해야만 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미 극상에 다다른 정령의 힘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한평생을 살며 모든 일상을 정령과 함께해 온 그가 정령의 힘을 다루는 응용력 역시 완벽했다.
훈련용으로 팀을 짜고 진행하는 전투시뮬레이션에서 그가 진심으로 상대측을 전멸시키고자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이는 더 이상 훈련이 아닌 학살이 된다.
“크흠. 전하, 그건 그거대로 우려가.”
“이번 훈련은 안전을 위해 박스를 이용합니다.”
“아.”
콜은 그제야 알겠다는 의미로 만류의 손길을 거두었다. 박스는 현실의 육체 대신 정신체로 활동하는 제3의 공간이다.
이 시대의 마법 기술을 집대성한 최고의 아티팩트로, 현실의 육체를 박스에 저장하고 가상공간에서 프로그래밍된 배경과 정신체를 사용한다.
박스 안에서는 아무리 다쳐도 실제 육신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훈련 및 시범, 학습용으로는 제격이다.
제국에서는 이미 국가인증기관에서 부분상용화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 사람들은 박스에 대해 잘 몰랐기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훈련용 박스를 개방시키겠습니다. 맵은 어떤 것으로 할까요?”
“가급적 해동의 지형과 비슷하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런 건 아직 없을 것 같은데.”
그가 알기론 루바르잔에서 개발한 박스 중에 제국을 제외한 특정국가의 지형을 프로그래밍한 제품은 없었다.
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한 나라의 지형을 세부적으로 재현한 박스는 없습니다. 대신 비슷한 산이나 평지 등을 재현한 것들은 있습니다.”
“음. 그럼 무난하게 산으로 하지요.”
맵이 정해지자 콜의 손에서 자그마한 박스 하나가 빙그르르 돌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사이 에단은 해동 측 무사들에게도 박스를 이용한 훈련 동의를 얻고 돌아왔다.
해동에서 볼 수 없는 도구지만 박스는 워낙 획기적인 발명품이었기에 대부분 포탈과 더불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전하께선 어찌하겠습니까? 박스 훈련은 실제 전투가 아니라 정신체를 이용한 가상현실이기 때문에 절대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습니다.”
친절히 의중을 물어오는 쥬다스를 앞에 두고 이지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하게는 박스에 입장하기가 좀 두려웠다. 그러나 명색이 왕세자인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오기로라도 박스에 입장하기로 결정했다.
“그 훈련.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그러자 무사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졌다.
제국의 황태자와 해동의 왕세자.
두 나라의 합동 훈련만으로도 이례적인데 여기에다 각 나라의 정상이 직접 참여하기까지 하다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쥬다스라면 몰라도 이지오의 경우 왕족 기본 소양으로 익힌 승마와 궁술을 제외하고는 무예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잠깐만, 주인. 정령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건 나도 낄 수 없는 거야?”
“그래, 부탁한다. 훈련 중엔 얌전히 있어주렴.”
“…….”
가야는 매우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계약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사가 바라는 소망은 아무리 부탁이라 말해도 결국 절대적인 명령이나 다름없다.
심기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며 서 있던 그는 결국 쳇 하고 작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거 보라냥.」
“뭐.”
그의 어깨에 행낭처럼 매달린 백호가 갸르릉 웃으며 깐족거렸다.
「주인이 생기면 뭘 한다냥? 어차피 청룡 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들어보고 헛소리면 꼬리로 리본을 만들어버릴 거야.”
「느아아! 이 폭력적인데다 야만적이기까지 한!」
백호는 화들짝 놀라 꼬리를 뒤로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룡은 백호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비폭력주의에 고상하기까지 한 우리 야옹아.”
「네놈 진짜 싫다냥.」
“너는 주인을 누구로 정할 거냐?”
놀리는 듯한 말 속에 진지함이 한 조각 깃들어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백호는 툴툴거리던 표정을 풀고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누구로는 무슨 누구로냥? 상대가 있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냥?」
“있잖아. 둘씩이나.”
멈칫, 백호의 시선이 박스훈련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네 주인 말이냥?」
“하긴 주인은 아무리 네가 바라더라도 힘들겠지. 포기해라, 야옹아.”
「헹. 네가 포기하라니까 더 포기하기 싫구냥.」
“선택은 그가 하는 것이니까. 뭐 야옹이 네게 딱 어울리는 주인은 따로 있는 것 같다만.”
「있긴 개뿔이…….」
“어허. 야옹이가 개뿔 얘기하는 거 아니야.”
「냐…….」
청룡은 기가 막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는 백호를 다시 한 번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주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던 참이었다.
“정렬!”
때마침 훈련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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