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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스위치 온.”
짧은 시동어와 함께 박스가 개방되었다.
육면이 전부 매끈한 검은 벽으로 이루어진 박스는 홀로 부유하여 허공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새하얀 문이 하나 생겨났다.
콜의 지도에 따라 기사단부터 시작해서 무사들까지 무사히 박스 안으로 진입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지오는 망막을 찌르는 환한 빛에 화들짝 놀라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
“전원 무사히 입장한 것 같군요.”
그보다 한발 앞서 박스에 들어온 쥬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오는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리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휘이이이-
낮은 담과 멋들어진 기와로 가득했던 궐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로 바뀌었다.
잘 살펴보니 황야가 아니라 곳곳에 마른 풀과 나무, 크고 작은 돌이 쌓여있는 거대한 산 정상이었다.
“이게 다…… 가짜?”
지오는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감촉이 생생했다.
“이 훈련에서 팀은 국가를 기준으로 가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모든 배경과 감각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이므로 실제로 다치거나 죽지 않습니다. 죽음 상태에 이른 구성원은 자동으로 박스 밖으로 퇴장되며, 재입장할 수 없습니다.”
박스에 대한 설명은 간결했다. 어차피 원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아봐야 마법이론에 무지한 이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이었다.
“팀원이 전멸할 경우나 깃발을 들어 항복 선언을 할 경우, 마지막으로 팀의 리더가 사망할 경우 이 훈련은 종료됩니다.”
쥬다스는 청팀의 리더를 상징하는 푸른 견장을 어깨에 차며 붉은 견장을 지오에게 건넸다.
얼결에 견장을 받아든 지오가 그를 올려다보자 쥬다스는 마지막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이곳에서 다친다고 해서 실제 부상을 입지는 않지만 고통은 그대로이니 유의해 주십시오.”
“……이해했습니다.”
검과 마법이 난무할 전장이다. 부상을 입는다면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재수가 없다면 신체 일부가 날아가 퇴장하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칠 수도 있다. 어린애 장난이 아닌 진지한 훈련이며, 가짜라고 마냥 마음 놓을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지오는 그 사실에 겁을 먹으면서도 견장을 쥔 손아귀에 콱 힘을 주었다.
‘모르겠어. 이런 훈련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모의전투라곤 하나 국적을 기준으로 나눈 팀이다. 이 훈련에선 심지어 직접적으로 적장의 목을 칠 수도 있다.
자칫 가뜩이나 어색한 나라간 감정의 골만 깊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설마 나를 시험하는 건가?’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상대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젠장! 웃기지 마. 아무리 제국이 강하다고 해도 그건 전체 국력을 따져보았을 때 이야기다. 개개인 실력은 절대로 뒤지지 않아.’
지오는 붉은 견장을 당당히 어깨에 찼다. 그가 비록 어린 나이긴 했지만 날 때부터 제왕학을 배우며 자란 준비된 군주였다.
첫 실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라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이 훨씬 강했다.
그는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제국 황태자의 콧대를 단단히 눌러 주리라 결심했다.
지오 본인은 무력이 별로 강하지 않으니 전략을 잘 활용해야했다.
“준비가 완료된다면 깃발을 흔들어주십시오. 전투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를 울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각자 위치로.”
이지오는 자기 무리를 이끌고 홍색 깃발이 꽂힌 홍팀 진영으로 향했다.
해동 무사들로 구성된 홍팀은 견고한 바위로 둘러싸인 위치에 깃발을 꽂고 자리 잡았다.
“홍군은 들어라. 적은 우리가 마법공격에 약할 거라 생각하겠지.”
지오는 움츠러들지 않고 곧장 지휘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해동은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뿐, 무지한 게 아니었다.
루바르잔 제국이 다른 소국들을 발밑에 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해동은 흔들리는 기반을 다잡으며 타국 전력의 맹점에 대해서 숨 가쁘게 연구해 왔다.
고로 그들은 제국이 손에 쥔 이능에 대해 제법 세세히 알고 있었다.
지오는 이번 훈련이 직접적으로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해동이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역습기회라 여겼다.
그의 입가에 자신감 어린 미소가 감돌았다.
“그 오만함이란 허를 찔러 들어갈 것이다. 검기사들을 선제공격하여 시선을 끈 뒤 원거리 이능력자들을 덮쳐 부지불식간에 제거한다. 마법이 봉쇄되면 그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테지.”
한편, 루바르잔 제국 기사들로 구성된 청팀은 풀과 나무가 우거진 부근에 진영을 세웠다.
“적은 마법 공격에 가장 강할 거야.”
“예?”
쥬다스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봉을 어깨에 걸친 채 수하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이어갔다.
“도리어 우리가 해동의 권술이나 주술 등에 생소하여 놀라게 될 수도 있어. 처음엔 당황스럽겠지만 몇 번 수를 주고 받다 보면 익숙해질 게다.”
부드러운 어조로 이어지는 설명에 의문을 갖는 이는 이제 없었다.
“그러니 우린 적의 수에 익숙해질 때까지 마법 기사를 포함한 서포터들을 지키면 된다. 말인즉.”
각 팀의 리더는 동시에 최종 지시를 내렸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 될 것이다.”
펄럭!
홍기와 청기가 하늘 높이 펼쳐졌다. 드디어 전투 훈련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묵직하게 산을 뒤덮었다.
* * *
「프리드.」
길고 하얀 손가락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훑었다.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릴리스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정말 꼬맹이만 보내도 되겠어?」
“왜? 그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나?”
프리드는 킥킥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핏물이 고인 샘처럼 진한 붉은 눈동자가 즐거움을 담고 빛났다. 이를 마주 본 릴리스가 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니. 귀여운 꼬마긴 했지만. 릴리는 어린애한텐 흥미 없는걸.」
“그럼 뭘 걱정해. 녀석 정도면 충분하다.”
「상대는 그 이그레트인데?」
의아함을 느낀 릴리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매끈한 목선을 따라 밤처럼 까만 머릿결이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반쯤 묻고 있던 프리드의 가슴팍까지 내려와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할더는 네가 아끼는 꼬맹이잖아. 게다가 이그레트란 자, 이젠 진심으로 상대할 거라며. 혼자 보내면 정말 죽을 지도…….」
“아, 그런 얘기였나.”
프리드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거라면 더욱 걱정할 이유가 없어. 어차피 할더는 그를 만나지 않는다.”
「응? 그러라고 보낸 거 아니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패를 그렇게 허무하게 버릴 순 없지.”
「헤에.」
프리드의 손길이 가볍게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이듯 대화가 이어졌다.
“할더가 만나게 되는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이야.”
어리석게도, 다시 사람을 믿는 걸 택한 그에게 보내주는 깜짝 선물이지.
머릿속으로만 덧붙인 프리드가 즐거이 웃으며 릴리스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다시 깍지를 끼고 의자에 풀썩 몸을 기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쪽에서 맞이할 거야.”
「흐으응. 직접 상대하려구?」
“상대한다고 표현하긴 부끄럽군. 뭐, ‘도발’ 정도로 해둘까.”
프리드는 이그레트가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그저 단순히 자연계 정령의 계약자라는 뜻이 아니다.
어찌어찌 꼼수를 부려 정령왕의 힘을 봉쇄한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령은 전부 그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어찌 보면 이그레트야말로 자연의 왕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런 자를 상대로 진검승부에서 이길 생각을 하는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다.
‘미련한 걸 넘어서 미친 짓이지.’
농담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과거 실제 그 미친 짓을 하다 영혼마저 잃어버린 여자가 있었다.
프리드는 사야 황후의 말로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슬슬 파티를 열 준비를 해야겠군.”
「파티? 좋아! 모처럼 드레스를 꺼내 입어야겠네.」
릴리스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옷을 내려다보며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귀빈을 모셔야 하니 화려하게들 꾸미라고.”
붉은 눈동자가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릴리스가 스르륵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곳엔 쥐 죽은 듯 조용히 숨도 쉬지 않고 서 있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맞아. 너는 특별히 이 언니가 꾸며줄게.」
릴리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뻗었다.
「흑주작.」
사령 릴리스의 차가운 손이 주작의 복숭아 빛깔 손등을 감쌌다.
멍하니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음산한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얀색 바탕에 붉은 꽃 자수가 놓인 한복이 무릎 선까지 풍성하게 내려와 살랑였다.
주작은 정작 눈앞에 있는 릴리스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향하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한 프리드가 낮게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릴리스를 따라가. ‘이브’.”
“…….”
주작도 해동 왕가 외엔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던 사방신수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브’라는 계약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화륵!
주작 이브의 등 뒤로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타올랐다.
불꽃은 이미 본연의 화사한 색상을 잃어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불꽃의 날개를 단 주작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신수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릴리스에게 손을 잡힌 채로 살짝 날개를 팔랑여 허공에 동실 떠올랐다.
“앞으로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릴리스를 따라다녀.”
그러자 이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주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릴리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두 여인은 그림자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자리에 남은 프리드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모래시계를 꺼내 빙글 돌려세웠다.
유리 너머로 파스슷 떨어지는 연두색 모래알갱이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너울너울 빛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내리는 모래는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삶과도 같아 보였다.
프리드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모래시계를 응시했다.
“……또다시 당신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면.”
간신히 용기 내어 느릿느릿 뛰기 시작한 심장 위로 다시금 차가운 칼날이 내리꽂힌다면.
자신이 믿고 있던 주변이 전부 모순투성이였음을 알게 된다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이그레트 님.”
그래도 당신은 이 더러운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 텐가.
프리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래시계를 휙 손에서 놓았다.
쨍!
유리가 퍼석하고 깨지며 연두색 고운 모래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처참히 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쏟아진 모래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ㅠㅠ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꾸벅)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