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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박스 안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참여자들이 시작 전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치열했다.
인원은 리더를 포함하여 13대 13. 그리고 리더가 퇴장당하면 그대로 훈련이 종료된다.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인원은 12명씩이었다.
초반에 서로 진짜 공격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어 눈치만 살피던 훈련이 본격적인 전투양상을 띠기 시작한 건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부터였다.
선제공격은 홍팀에서 먼저 치고 들어왔다.
파앙!
사람의 손에서 나는 소리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거센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해동국군은 검사와 권사가 섞인 특이한 조합이었다. 위력으로 치자면 맨손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상대하는 권사들이 훨씬 강력했다.
“……!”
전투 시작과 동시에 돌아가는 양상을 줄곧 살피고 있던 이지오는 자못 놀란 기색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도발에 넘어오지 않다니?’
청색 물결은 홍색의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고 제 진영을 지켰다.
마법기사와 치유술사 곁에는 각 사이사이마다 검기사들이 포진하여 지키고 있어 당초 계획했던 작전대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상황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초조함을 느꼈다.
‘쳇, 질 수 없지.’
이지오는 호신용으로 들고 있던 검을 힘주어 쥐었다.
그는 무술실력이 부족한 자신이 직접 나서 봤자 될 일도 그르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팀의 머리가 되어 전략적으로 명령을 내리면 된다.
“진을 펼쳐라!”
상대가 방어에 신중을 기한다면 힘으로 깨뜨려 버리면 될 일이다.
지오는 그러기 위해 주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임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위이잉-
모기 날갯짓 소리와도 흡사한 소리가 급작스럽게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루바르잔 측 기사들이 일순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건.”
가장 선봉에서 검을 휘두르던 에단이 신중하게 적군을 살폈다.
해동군은 루바르잔 기사단과 다르게 근접전과 원거리 전투가 분리되지 않는다.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권사들이 수인(手印)을 맺어 직접 주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맞붙은 상태에서 펼쳐지는 주술진은 치명적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에단이 서둘러 수하들로 하여금 뒤로 물러서도록 했다.
“적은 주술을 사용한다. 거리를 벌려라!”
쥬다스는 큰 줄기는 자신이 맡더라도 세부적인 지휘는 에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전투에 능한 에단의 즉각적인 판단이 현재 정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보다 훨씬 유용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확실히 에단은 상대가 어떤 주술을 사용하는 줄 모르면서도 예리하게 판도를 짚어냈다.
청팀이 한발 물러서자 홍팀은 기세등등하게 주르륵 진영에 밀고 들어왔다.
해동의 주술은 마법처럼 대단위로 펼쳐지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폭발을 일으키는 등 큰 손상을 입혔다.
최대한 빨리 일선을 물렸지만 그 사이 주술에 당해 쓰러지는 기사들이 둘이나 발생했다.
대등하게 맞붙던 전투 중 처음으로 탈락자가 생겼다.
파앗!
죽음 상태에 이른 두 기사는 그대로 하얀 빛에 휩싸여 박스 밖으로 퇴장되었다.
‘12명 중 2명 탈락. 남은 인원은 열.’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걸친 채 차분히 이를 지켜보았다.
“흐음.”
「쟤들 정말 이기려고 마음 제대로 먹었나 봐. 굉장히 저돌적이네.」
「두 명 아웃이다요!」
이번 전투에서 힘을 사용하지 않지만 일단 박스 안에 들어온 이상 정령들은 모두 강제적으로 실체화한 상태였다.
그들은 청팀 깃발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슬슬 시간인가.”
「응? 뭐가?」
유니가 펄럭이는 깃발 위에 살포시 매달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쥬다스는 정령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곤 봉을 제대로 손에 쥐었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가벼운 무게감이 손아귀에 감돌았다. 루바흐에서 처음 봉술을 배울 때만 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체가 무기를 감당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넘어지고 까지고, 다치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이 바로 오 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간단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주술을 다루는 건 권사뿐. 검사들은 기를 운용하지 못한다. 주술의 종류는 폭발, 속박, 둔화. 주문을 외우거나 마력을 배열하는 시간 없이 즉시 시전이 가능. 공격은 매우 위력적이나 이는 근접 전투 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
맑은 금안이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담았다. 쥬다스는 에단에게 지휘를 맡기고 잠시 안전한 위치에 서서 홍팀이 사용하는 주술의 종류나 전투방식을 전부 파악해냈다.
그는 팀의 승패를 쥐고 있는 리더로서 자신이 끼어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때가 되었다.
“자, 그럼. 알겠지? 이 안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끼지 않는 게야.”
「……노력은 해볼게.」
유니는 탐탁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니뿐 아니라 다른 정령들도 전부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쥬다스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답했다.
“고맙구나.”
그의 바람대로 정령들은 그가 자리를 벗어났어도 여전히 깃발이 꽂힌 땅에 머물렀다.
“부단장님, 마법진 전환 완료하였습니다.”
“좋아.”
마침 바이칼은 칼같이 타이밍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작 전 미리 마법기사의 역할에 대해 언질을 해놓은 상태였다.
‘바이칼, 전투 시작 15분 후에 보호마법진을 해제하고 공격 마법으로 전환하도록 하여라.’
청팀의 마법기사는 바이칼을 포함한 세 명뿐이다. 그들이 다루는 마법진은 한 번에 하나의 성질만을 띠게 되어 있다.
방어에 주력하느라 실드와 보호마법을 발동하고 있던 마법기사들은 명령에 따라 시간이 되자 진을 수정하여 공격 형태로 전환하였다.
“첫 번째 목표는 우측 검사진영.”
고오오오-
마력이 요동치면서 기사단의 발밑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번쩍 빛을 발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홍팀에서도 이를 저지하려 방향을 틀었다.
“마법사들을 공격해라!”
“어딜!”
검과 손이 부딪히며 다시금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를 손에 두른 권사 하나가 자신을 막아선 검을 밟고 도약했다. 하늘을 날 듯 기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권사가 빠르게 주술을 사용해 마법기사를 노렸다.
“폭(爆).”
콰앙!
폭발한 자리가 시꺼먼 연기에 휩싸였다. 무리하게 뛰어든 권사 탓에 마력 배열이 흐트러지며 마법시전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권사는 긴 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하얀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마른가지에 불붙듯 양 팀의 기세가 급격하게 타올랐다.
“지금이다! 마법기사를 먼저 제거하라.”
와! 하고 홍색 물결이 중심부로 달려들었다.
“……아오, 빌어먹을. 다 됐었는데.”
바이칼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얼굴에 묻은 재를 털었다. 다행히 마법사들의 피해는 적었다.
대단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마법진을 재생성해 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느 틈엔가 대열이 바뀌어 검사는 검사가 상대하고 권사는 마법사들을 노려 치고 들어온 형국이 되었다.
해동의 권사들은 몹시 행동이 재빨랐다. 권사 셋이 갑작스럽게 마법을 해제하는 바람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은 마법기사들에게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실드.”
바이칼은 뛰어 들어온 적들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급한 대로 실드를 시전했다.
빠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기를 두른 주먹이 실드를 강타하였다. 그 일격에 실드가 촘촘한 거미줄처럼 좌르륵 금이 갔다.
‘으아아, 그러니까 단장! 마법기사에게 근접전은 힘들다니까요!’
마법진 없이 시전하는 마법들은 소규모에 준하며 대체로 그 위력이 약하다.
신체형 이능력자가 전력을 다해 부딪혀오는 공격에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너덜너덜해진 실드를 본 바이칼이 아연실색하여 뒤로 물러서던 찰나였다.
“큭!”
맹수처럼 흉흉한 기세로 달려든 권사가 주먹에 불길을 휘감고 내지르고 있었다.
권사들이 운용하는 기란 바람이나 불, 물의 형태로 주먹을 감싸곤 했는데 그중 불이 파괴력이 가장 강했다.
걸레짝이 된 실드가 버텨낼 수 없으리란 생각에 바이칼이 황급히 동료기사를 뒤로 밀쳤다.
마법기사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전력이다. 하나가 당해도 다른 둘이 생존해 있어야 팀의 승률이 높아진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 본능적으로 전우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이는 곧 무의미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카앙!
화륵, 불길이 긴 막대를 타고 번갯불처럼 번쩍였다.
바이칼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전하……?!”
순백색으로 빛나는 황룡쇄가 권사의 맹렬한 공격을 올려쳤다.
쥬다스는 위협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선 바이칼을 향해 명령했다.
“바이칼, 마법진을.”
“옙!”
바이칼은 도대체 쥬다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알고 끼어든 건진 몰라도 자신이 맡은 임무를 상기해 냈다.
“거기 쓰러진 친구는 괜찮나?”
“소, 송구합니다. 넘어졌습니다.”
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던 다른 마법기사도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마른 풀이 잔뜩 묻은 얼굴에 코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언뜻 처참한 몰골이었으나 바이칼은 동료를 지켜주겠답시고 자신이 밀어 그 꼴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미안. 웨일 경.’
그래도 마음만은 널 위한 거였어.
바이칼은 속으로나마 동료에게 사과를 건넨 후 새 공격마법진을 생성해 냈다.
마법기사들이 힘을 합하자 흐트러졌던 마법진이 다시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 앞을 쥬다스가 막아섰다. 그가 어깨에 착용하고 있는 파란 견장을 확인한 권사가 소리쳤다.
“적장이 여기에 있다!”
청팀 리더만 퇴장시키면 이 전투는 홍팀의 승리로 끝난다. 그건 홍팀 리더인 이지오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가장 후선에서 몸을 숨긴 채 안전하게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위치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쥬다스는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기사들과 뒤섞여 있던 홍팀 무사들이 방향을 틀어 그를 제거하고자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피잉!
파랗게 빛나는 마력화살이 날아와 적의 접근을 막았다. 적들이 주춤하는 사이 화살은 핑핑 속사로 날아들었다. 마법 외에 원거리 공격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권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섰다.
근거리 전투에는 루바르잔 기사들도 고전할 만큼 강력한 무예를 선보인 권사들이지만 원거리 공격에는 쥐약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크리스티나.”
쥬다스의 곁에 활을 든 여인이 나타났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투톤의 푸른 머리카락이 길게 산바람을 타고 나풀거렸다.
바로 크리스티나의 엄호사격이었다.
‘여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오는 당황하여 다른 지시를 내릴 생각을 못했다.
해동에서는 여자를 왕실무사로 뽑지 않는다. 여성은 신체형 이능력자라 해도 남성보다 위력이 약하며 여러모로 생리적 제약이 많았다.
같은 이유로 루바르잔 제국에서도 여기사는 흔치 않았다. 다만 제국에선 여기사를 드물게나마 선출했고, 해동에선 여자를 절대로 병력으로 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티나는 이 전투에서 유일한 여성 전사였다.
해동왕족으로 자라면서 여성을 귀히 아껴야 한다는 가치관을 굳힌 이지오로서는 몹시 당혹스러운 구성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