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2화 (172/252)

0172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엄호하겠습니다.”

활을 등에 갈무리한 크리스티나는 이번엔 검을 빼 들었다. 여성의 몸으로 문무 모두를 겸비한 그녀는 검술 실력도 다른 기사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달려드는 권사의 공격을 막아섰다. 주먹을 받아친 날카로운 검신 너머로 살랑이는 푸른 머릿결을 바라본 권사가 소리쳤다.

“여자의 몸으로 검을 들다니!”

경탄이라기 보단 경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해동 무사의 외침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적의 옷자락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까딱했으면 옷이 아니라 생선 토막 나듯 배가 갈라졌을 매서운 일격이었다. 그제야 그녀를 얕보던 적들은 진지하게 대전에 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 전투가 각국의 자존심을 건 훈련인 만큼 무사들도 여자라고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옆구리로 파고드는 주먹을 이번엔 백색 곤봉이 막아냈다.

“멋진 무술이로군. 화려하진 않아도 수려하다 칭할 수 있겠어.”

“……!”

‘루바르잔 황태자?!’

설마하니 수하의 등을 적장이 직접 지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권사가 당황하여 곧장 방향을 틀었다.

드드득-

땅을 긁고 올라온 봉의 하단부가 이번엔 역으로 권사의 옆구리를 노렸다.

퉁 소리와 함께 몇 수 더 합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봉을 다루는 움직임이 유연했다.

“내 그리 뽐낼 실력은 아니네만. 썩 녹록치는 않을 걸세.”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봉을 회전시켰다. 그 사이 공격 마법진을 완성해낸 바이칼이 시동어를 외쳤다.

“라이트닝 로더(Lightning Loader)!”

꽈릉!

마력과 마력이 정해진 배열을 따라 충돌을 일으키며 스파크를 뿜어냈다.

그가 시전한 건 자연이 불러오는 재해와 다르게 다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섬멸하도록 설계된 대단위마법이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벼락의 춤 아래 처음 목표로 잡은 검사들이 직격 당해 생명 에너지를 소진했다.

‘이건 마치.’

후방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오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채 의식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모든 흐름이 그를 중심으로 흐른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그러나 그 각본에는 리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거대한 축이 되어 쥐고 흔든다.

아군 적군 구분할 것 없이 누구나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판세는 쥬다스가 이끄는 청팀에 기울어갔다.

“킹…….”

꼭 체스판의 킹을 보는 것 같다. 지오는 그리 생각했다.

쥬다스란 존재는 체스를 두는 승부사가 아니라 하나의 말로서 존재하는 킹이다.

그 킹을 잡기만 하면 게임은 끝나지만, 다가가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나이트와 룩이 나타나 승기가 만연하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리고 이제 곧 킹에게 직접 보호를 받은 비숍이 대규모 마법을 펼치는 것이다.

이지오의 기세등등하던 눈빛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전투 능력은 없어도 판세를 읽는 지휘관의 눈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달라. 애초에 가지고 있는 역량이 다르잖아! 정말로 저자가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 소년이라고?’

팀원들 개개인 간 무술 실력은 분명 서로 우위를 가리기 힘들었다.

제국의 검술 천재로 칭송받는 에단만이 유일하게 홀로 검사 서넛을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격차를 보여줬고 나머지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가 어느 한쪽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건 고작 한순간에 결정된 일이었다.

지오는 여기서 지휘관의 차이가 팀의 승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게임의 퀸은.

「우으으. 정말 걱정된다니까.」

「어쩌죠? 환상이라지만 공격을 받는데 가만히 지켜보기도 좀 불안해요.」

「그치만 이그레트가 나서지 말아달라고 했다요.」

「……조금만 더 참아보도록 하지.」

이지오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진 청팀 깃발로 향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어렴풋이 아른거리는 색색의 빛줄기가 위험스레 번뜩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홀로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가야가 보였다.

‘어느 수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여기다가 정령의 힘까지 적용했더라면.’

실은 저들 중 신수 청룡만 끼어들어도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종료되었을 것이다.

봄날 꽃가지처럼 흐드러지게 하늘을 수놓는 번개와 그 아래 비치는 온갖 그림자를 보며 지오는 홍팀 깃발에 손을 뻗었다.

검사진영이 정리되자 에단은 쏜살같이 합류하여 쥬다스의 곁을 지켰다.

공격마법진이 포화처럼 연속적으로 불을 뿜었다. 그리고 직접 수하를 지키는 벽이 되어 기꺼이 적과 맞서면서도 전군 지휘를 완벽하게 해내는 쥬다스는 누구보다 굳건해 보였다.

펄럭!

뒤집어진 홍기가 하늘높이 솟아 휘날렸다.

이지오는 남은 무사들이 더 괴로워하기 전에 깔끔히 결과에 승복했다.

홍군의 패배였다.

* * *

박스에서 나온 훈련참여자들은 하나같이 피로감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사십 분 남짓한 짧은 전투였지만 생생한 감각을 느껴가며 몰입하다보니 실제 몸을 쓴 것 이상으로 피곤해진 탓이었다.

“앗.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쥬다스 님, 어땠어?”

밖에서 백호를 끌어안고 콜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란이 밝은 표정으로 총총 다가왔다.

쥬다스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답했다.

“잘 마쳤단다. 란이 너는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어? 아니, 콜 아저씨한테 옛날 얘기 듣고 있었어.”

란은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백호도 쩍 하니 하품을 뱉으며 동조했다.

「후아암. 그냥저냥 들을 만했다냥.」

“무슨 얘길 들었는데?”

가야가 관심을 보이자 백호가 귀찮다는 투로 대답해주었다.

「어릴 적에 사부님을 만나서 설움을 많이 겪었다는 이야기?」

“뭐야 그게. 스승이 무척 무서운 사람이었나?”

“하하.”

설움을 겪게 만든 장본인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리곤 박스에서 나와 우두커니 서 있는 이지오에게로 다가갔다.

“좋은 훈련이었습니다.”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

지오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채 그를 불렀다.

“당신과 당신의 국가는 강합니다. 제가 건방졌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잔잔한 호수같이 태연스런 어투였다. 승자의 만용이 아닌 그저 그 본연의 여유임을 알기에 더욱 패배감이 짙어졌다.

“해동의 무사들은 움직임이 빠르고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많더군요. 원거리 공격에 대한 취약점만 보완한다면 이를 활용한 여러 전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

그가 짚은 건 이지오도 느낀 부분이었다.

분명 홍군을 지휘한 게 이지오가 아니라 전투에 익숙한 장수라면 훨씬 더 적절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이처럼 빠르게 패배하진 않았을 테였다.

처음부터 아예 마법사들을 확실하게 끝내버리거나 대단위 마법공격을 무위로 만들 교란 작전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해 상대했더라면.’

이지오는 자신이 적을 만만히 보고 경솔히 훈련에 임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팀의 패배가 결국 리더인 자신의 실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는.”

열두 살 아이의 어깨는 이 모든 걸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기에 너무 작았다.

“저는 당신처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했어도 결국 상대에게 패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괴감에 빠지려던 찰나 쥬다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내 동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택했습니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이지오가 택한 건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겨서, 적어도 저 제국의 소군주 앞에서만큼은 해동이 무시받지 않길 바랐다.

아이는 입을 다물었으나 쥬다스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의 지키고자 하는 바가 있으셨겠지요. 이번 훈련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방식이?”

“예. 패배에서 얻을 것은 많지만 이는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란 뜻이 아닙니다. 선택함에 있어 꼭 다른 누구처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 한 게 아니었던가.

이지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온화한 빛을 품고 있는 금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쥬다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우리의 생각이 각기 찌르는 창과 견고한 방패와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둘을 합한다면 최고의 전사가 되겠군요.”

문득 그 미소가 아버지인 이서윤을 닮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지오’라고 불러주십시오.”

이름을 허용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지오는 자존심이 강하고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지만 아직 어린아이인 만큼 생각의 전환이 빨랐다.

“쥬다스입니다.”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간결해진 이름을 다시 주고받았다.

지오가 돌아간 후 모두 휴식 시간을 가졌다.

박스는 몸을 다치지 않고도 실감나는 훈련을 경험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후유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시는 주군을 끼고 이번처럼 초집중 상태로 진행한 전투훈련은 모든 기사단원에게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망 상태에 이르러 박스에서 강제 퇴장당한 기사들은 후유증이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심했다.

뜨끈한 방바닥에 털퍼덕 엎어진 바이칼이 골골대며 앓는 소리를 했다.

“와 나, 진짜. 이거 두 번 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훈련이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되긴 했지만 힘들기로 따지면 갑절은 더 힘들었다.

몸이 쑤시는 대신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누운 볏단처럼 널브러진 바이칼의 얼굴 옆으로 플루비가 다가와 기웃거렸다.

“삐?”

마침 환복하고 깔끔하게 땀을 씻어내고 나온 에단이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을 도톰한 천으로 두들기며 조언했다.

“녀석도 훈련시키는 걸 게을리하지 마라.”

“저요?”

“자네와 자네 파트너.”

에단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플루비와 한 세트로 묶어버렸다.

바이칼은 바닥에 턱을 괸 채 웅얼웅얼 말했다.

“플루비 말씀이십니까? 매일 비행연습은 하고 있습니다요.”

“비행은 이제 마스터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말하는 건 공중전이다.”

“아, 공중전…….”

에단이 한 말을 무심코 되뇌던 바이칼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뭐요?”

“공중전 말이다. 녀석이 지닌 빠른 기동력과 고공비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살려야지. 명색이 신룡의 기사님이니까.”

“정정. 와이번이지 신룡이 아닌데요. 그보다 지금 저더러 공중에서 마법영창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기왕이면 마법진을 그려 공중폭격이 가능하다면 좋겠군.”

“아니, 이 양반이 진짜!”

검술 천재는 마법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누구도 해내지 못한 희망사항을 밀어붙였다.

그간 제국 내에선 와이번을 길들이겠다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생각을 하는 자가 없었던 뿐더러 공중에서 마법으로 폭격을 가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공중을 나는 몬스터는 잘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어렵사리 길들인다 해도 그 위에서 마력을 정확히 배열해 마법을 시전한다는 건 창기사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바이칼은 이 모든 생각을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고 이를 악다문 채 한 마디로 대꾸했다.

“즐대 못합느드(절대 못합니다).”

어차피 설명해 줘봤자 에단은 개미눈물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해본 적 없는 걸 못한다고 포장하지 마라. 해보고 나서 얘기하도록.”

‘지금처럼 말이지.’

바이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 푸념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 드디어 4월의 마지막 한주가 시작되는군요. ㅎ

저는 오늘부터 29일까지 통영!!!으로 팀합숙(?)을 떠납니다...! 헉 생전 처음 통영을 ㄷㄷㄷ

언뜻 놀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단체로 글쓰러 갑니다. 쿨럭.

농구만화로 치면 단체로 농구수련을 위해 떠나는 뭐 그런...(말을 잇지 못하는)

그런 이유로 가서 편수가 늘면 늘었지 휴재란 없습니다.ㅋ 핫핫.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연재속도는 가급적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죄송합니다! (꾸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