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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플루비는 이제 곧잘 날았다. 날면서 원하는 대로 방향을 꺾는 법도 순탄히 몸에 익혔고 안정적으로 착륙할 줄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겁에 질려 빼액 비명을 지르던 예전의 어리숙한 와이번이 아니었다.
다만 플루비가 가진 한 가지 문제라면.
“이리 와, 플루비.”
“삐익! 삑!”
바이칼의 부름을 들은 플루비는 날개를 파닥이며 쫑쫑 걸어왔다.
“좀 날아오면 안 되냐……?”
“삐이이?”
플루비의 고질적인 문제, 바로 혼자서는 절대 날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미니 사이즈인 상태에선 종종 파다닥 뛰어올라 사람의 품에 안긴다든가, 저공비행을 했다.
하지만 물을 잔뜩 머금어 본체를 되돌린 후에는 어림도 없었다.
놈은 바이칼 없이는 절대 날려 하지 않았다. 다른 파일럿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바이칼과 함께 비행할 때만 기꺼이 응했다.
“뭐 덕분에 나도 덩달아 비행에 익숙해지곤 있지만.”
바이칼은 플루비를 들어 가슴팍에 올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고소공포증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소년과 와이번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공포를 견뎠다.
여전히 높은 절벽 위나 건물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리고 손발에 땀이 잡히면서 현기증마저 일었다. 둘이 함께가 아니면 날지 못한다.
“얌마, 넌 어때? 한번 해볼까?”
“삐!”
그도 에단의 제안이 마냥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루비처럼 양순하고 사람을 올곧이 믿는 와이번이 그간 없었을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시작으로 바이칼은 슬쩍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마력 배열에 관해선 마법기사 시험을 통과하면서 규칙을 전부 외웠으니 삐끗하지 않고 잘만 설정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바이칼이 진지하게 공중 전투를 상상하는 사이 정작 화두를 던진 에단은 정자세로 앉아 다른 관심사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르륵-
투명한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조각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신비롭게 반짝이는 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령이 깃든 검.’
바로 얼마 전 쥬다스가 맡긴 검이었다. 딱히 크기에 맞는 검집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헐렁한 가죽커버에 보관해 두던 참이다.
신기하게도 본질은 얼음일 테지만 냉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녹아내린다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맑고 투명한 검신은 얼음 결정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빛날 뿐이다. 전혀 사령이 깃든 무시무시한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검으로 사람을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평범하게 죽음을 맞이할지, 아니면 혹여 다른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단, 에단은 쥬다스가 자신에게 이 사령검을 맡긴 이유가 단순히 관리만 하란 뜻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단장.”
검이 가진 특징에 대해 이것저것 실험해 볼 필요가 있겠거니 여기던 찰나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에단이 고개를 들자 플루비를 옆에 세운 바이칼이 문 쪽으로 손짓했다.
“저 좀 나갔다 옵니다.”
“어딜?”
“산책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플루비는 신나서 날개를 파닥파닥 저었다.
날지도 않을 거면서 소리만 요란한 쪼끄만 와이번을 힐끗 쳐다본 에단이 간결하게 답했다.
“다녀와라.”
“예압.”
“타국이니 특히 움직임에 주의하도록.”
“예예.”
“사고치지 말고.”
자꾸 말미에 따라붙는 염려에 바이칼이 나가다 말고 울컥한 표정으로 홱 돌아섰다.
“거……. 제가 무슨 다섯 살 꼬맹인 줄 아십니까?”
“자넨 다섯 살이 아니라 쉰이 되어도 불안할 거라 보는데.”
“으에엑. 설마하니 쉰까지 감시하시려고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바이칼은 아주 잠깐이나마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까지 에단에게 잔소리 듣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전 은퇴하면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속에 근사한 오두막이나 짓고 살 겁니다!”
“퍽이나.”
갖잖다는 비웃음을 마지막으로 바이칼은 플루비를 데리고 밖으로 털레털레 나왔다.
“젠장. 당한 게 있어서 반박도 못하겠고.”
“삐잉?”
투르케 사막에서 꼴사납게 뒤통수를 맞고 끌려갔던 사건은 두고두고 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흑역사로 남았다.
에단이 아무리 면박을 줘도 한 마디 반박하지 못하는 건 바이칼 스스로가 그때 일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칫 목숨을 잃거나 쥬다스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의 바이칼은 정말로 짐 수준밖에는 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 그는 강해지기 위해 플루비와 함께 고공비행을 익혔고 평소에도 방심하지 않고 매사 안전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일단 수(水) 속성 마법을 사용해 플루비를 본체로 되돌렸다. 그리고 녀석에게 연습하는 동안 사용해 온 특수 안장과 목줄을 채웠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자세로 안장에 올라탄 바이칼은 플루비의 목덜미를 툭툭 두들겼다.
“자, 이제 날아볼까?”
크우우우!
자그마한 모습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포효가 우람한 목울대를 타고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일단 실드.’
그동안 바이칼은 비행을 연습하며 추락을 대비한 충격감소실드를 제일 먼저 깔아둘 필요를 느꼈다.
사막에서 연습할 때에는 푹신한 모래가 있었기에 별 장치 없이도 큰 무리가 없었지만 그 외 지형에서는 아니었다. 공중전이고 자시고 잘못 착륙하다가 플루비와 나란히 터진 만두처럼 바닥에 찌그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일단 해동 왕궁 사람들이 와이번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계속해서 높이 올라갔다.
“플루비, 고도를 더 높여.”
블루와이번은 인간보다 청력이 훨씬 좋아서 작은 지시에도 칼같이 반응했다. 곧장 붕 뜬다 싶더니 껑충 하늘 높이 뛰었다.
순식간에 찬 기운과 함께 매서운 칼바람이 실드에 맞부딪혔다.
바이칼이 사용하는 고출력 실드는 착륙을 대비한 충격감소 뿐 아니라 공기저항과 기압 조절, 체온유지기능도 돕고 있었다.
‘하. 여기까진 좋은데 이후가 문제란 말이지.’
하나의 방어마법진을 유지하며 와이번을 조종하는 일은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다만 방어마법진과 공격마법진은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신체가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까지 고도를 낮추면서 순간적으로 실드를 해제하고 공격마법진으로 전환하여 마법을 발동시키는 일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했다.
정지해 있는 지상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허공이란 환경차이가 심한데다 위치 변동이 커 마력이 잘 모여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어찌어찌 마법진을 형성하고 발동하는 데에 성공시킨다 한들 정확히 특정 대상을 명중시킨다는 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해보자!’
망설임은 짧았다. 에단에겐 산책이라고 말해놓긴 했지만 애초에 피곤한 와중에도 플루비를 데리고 나온 건 이걸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플루비, 강하!”
“꾸웍!”
짧은 대답과 함께 순식간에 고도가 내려갔다. 갑자기 낮아지는 시야에 피가 손끝으로 쏠려 싹 빠져나가는 듯한 공포가 찾아왔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제일 두려워하는 순간이 바로 이 급격한 추락이다.
이때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와 함께 온몸이 돌처럼 굳는다. 하지만 거기에 질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스태프를 쥔 손을 움직였다.
슈우우!
와이번의 머리 앞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마치 브레스를 쏠 때처럼 마력 입자가 모여들었다.
“……?!”
갑작스런 마력의 파동을 느낀 플루비가 움찔했지만 바이칼의 냄새를 맡고 빠르게 진정했다.
마력 배열이 몹시 복잡한 고급 마법까진 무리였지만 만들고자 한 공격마법진이 무사히 생성되자 바이칼은 비명처럼 시동어를 외쳤다.
“흐이이, 프, 플레임 스트라이크으으―!”
결단만큼은 최강의 공성마법 메테오라도 시전할 기세였지만 기껏 시전된 건 간단한 화염마법이었다.
포앙!
마법은 왕궁 담벼락 바깥에 위치한 버려진 공터 한복판에서 정확하게 터졌다.
발동 수준을 최하로 조절했기에 한 사람 서있을 만한 자리에 작은 불기둥이 치솟았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위력은 별거 아니었지만 그에겐 어쨌든 성공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됐다! 으핫하, 플루비 요 기특한 녀석!”
바이칼은 비행에 대한 공포도 잊고 플루비의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플루비도 기분 좋게 포효했다.
“크워어어엉!”
슈우우!
눈앞으로 하늘색 마력입자가 스쳐가는 걸 본 바이칼이 어라 싶은 얼굴로 이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타고 있는 와이번의 주둥이 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자, 자, 잠깐만. 플루비?”
쿠꽝!
플루비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파일럿을 따라 브레스를 뿜은 것이었다.
블루와이번답게 파란색 불길을 쏘아낸 플루비는 바이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합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날아간 브레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레이저처럼 바닥을 긁고 치솟은 불길은 공터에 세워져있던 한 거대한 팔층석탑을 폭파시켰다.
“…….”
“…….”
한 소년과 한 용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슬며시 그 앞으로 내려앉았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활활 타오르고 있는 탑은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목재도 아닌 석재 구조물인데도 어찌나 잘 타오르는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달궈진 열기로 인해 살갗이 후끈후끈했다.
“이런. 큰 소리가 들리기에 와봤더니만.”
“저, 전하…….”
녹색 바람을 타고 가볍게 그들의 곁에 탁 내려선 쥬다스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다 다친 곳은 없느냐?”
“예에. 저…… 그게.”
“무슨 일이오!”
바이칼은 그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어졌다.
플루비가 브레스를 뿜은 위치는 왕궁 뒤편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공터였다.
그곳은 너무 오래 되어 허물어버린 집터와 고목들, 그리고 허물어질 듯 기운 석탑들만이 존재하던 폐허나 다름없는 위치다.
아직 어떤 용도로 재개발을 해야 좋을지 상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버려둔 공간이었다.
그런 낡은 공터라고는 하나 엄연히 왕궁 근처인 만큼 창칼을 든 군졸들이 늘 관리하고 있었다.
습격인 줄 알고 놀라 헐레벌떡 달려온 군졸들이 자리에서 제국에서 온 손님들을 발견하고 황당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이게 대체.”
불타 무너진 석탑, 거대한 블루와이번, 제국의 황태자와 그 친위기사까지 번갈아 쳐다본 군졸들이 일단 미심쩍은 투로 물어왔다.
“습격을 받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습격을 받기는커녕 석탑을 습격한 범인이 바로 바이칼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병사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일으킨 건 접니다.”
“예?”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 하나가 다시 물었다.
“객들께서 이곳에선 무슨 일로?”
“그게…….”
쥬다스는 일선에 나서지 않고 수하가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이칼은 허리를 피지 않은 채 거듭 사과를 했고 뒤늦게 자초지정을 알게 된 군졸들은 여전히 당혹을 감추지 못한 채 눈만 꿈뻑거렸다. 그런 이들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
해동 왕궁까지 찾아오는 동안 안내를 맡았던 수호 연이었다.
그때서야 지켜보기만 하던 쥬다스가 한발 나서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제 불찰로 인해 해동의 건축물을 훼손시킨 점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사죄의 뜻을 밝히자 군졸들은 오히려 아연해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우워어어 이곳은 생애 처음 와본 통영입니다!
바다가 참 잔잔하네요. ㅎㅎ
멍게비빔밥은...제가 멍게를 못먹어서..OTL... 대신 물회를 먹었는데 맛있더군요 +_+
그럼 다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