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4화 (17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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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대신 연수호가 손을 내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차피 이 석탑도 수명을 다해 자연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수명을……?”

“예, 건물에도 수명이 있어 한 번씩 허무는 과정이 필요한데,  차마 조상님들이 공들여 세우신 석탑을 함부로 허물 수 없어  지켜보던 중입니다.”

연수호는 점잖게 설명한 후 바이칼에게로 고개를 돌려 당부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우리 해동인이 보기에 낡고 오래된 것들은 몹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 앞으로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예, 죄송합니다.”

연수호는 바이칼의 사과에 은은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현명하면서도 자비로운 일처리에 진심으로 고맙게 여긴 쥬다스가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토니가 타다닷 날아 불타고 있는 돌무더기를 기웃거렸다.

「왜? 거기 뭐라도 있어?」

유니가 득달같이 토니를 따라 날아왔다. 여전히 돌덩이들에 시선을 고정한 토니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응요! 뭐가 있다요.」

「아니…… 뭐가 있는지를 말해줘야지.」

유니의 재촉에도 답은 명쾌하게 나오질 않았다.

「모른다요.」

「엥?」

「느낌이 꼭 정령석 같다요. 근데 정령석이가 아니다요.」

「어머, 그러게요. 저 안에 불에 타지 않는 물건이 들어 있나 본데요?」

불쑥 끼어든 카니마저 토니의 이상한 묘사에 동조했다.

토니는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결국 답답해진 유니가 한숨을 쉬며 쥬다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그레트. 저 무너진 구조물 안에 뭔가 특이한 게 들어 있다나 봐.」

“……?”

마침 연수호와 대화하며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기에 쥬다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가 돌아서려다 말고 멈칫하자 수호가 그를 불렀다.

“전하?”

“저 탑은 본래 어떤 기능을 하던 구조물이었습니까?”

“탑이라면…….”

수호연은 잠시 불에 타고 있는 석탑의 잔해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해동에는 탑이나 불상이 굉장히 많습니다. 보통 탑이란 소원을 빌며, 수호신수께 공물을 바치는 제단 역할을 합니다. 이 탑도 그 일종이었을 뿐입니다.”

“흠. 그렇습니까.”

“하온데 어찌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제국의 황태자가 관심을 가지기에 무너진 석탑은 그리 대단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특별히 의미 있게 관리하던 곳도 아닌 버려진 폐허일뿐더러 이제와선 아무도 기도를 드리러 찾아오지 않는 그저 이름 없는 팔 층짜리 석탑이었을 뿐이다.

쥬다스는 수호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무너진 석탑에 다가갔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불쑥 손을 뻗었다.

“전……!”

수호는 제국의 황태자가 다칠까 염려되어 큰 소리를 낼 뻔했으나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자연체 정령에 익숙하지 못한 해동 사람들이 보기엔 이처럼 불구덩이에 손을 집어넣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손이 흉측하게 타버리거나 고통에 비명을 내지를 거란 예상과 달리 쥬다스는 지극히 멀쩡한 얼굴로 불길을 헤집던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에는 화상자국은커녕 시뻘겋게 달구어진 흔적마저 없었다.

연수호를 비롯한 해동 군졸들은 순간 환각에 빠지기라도 했나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오직 바이칼만큼은 그가 무사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쥬다스는 불구덩이에서 꺼내온 물건을 손바닥에 얹은 채 사람들 앞에 내밀어 보였다.

그의 손을 감싸듯 끌어안은 불의 정령이 온화하게 웃으며 팔랑 날아올랐다.

붉은 깃털이 불씨처럼 휘날리며 손안에 든 물건이 정체를 드러냈다.

“이, 이건?”

“의도적으로 탑 내부에 보관한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숨겨져 있던 게 아닐까 싶군요.”

연수호는 홀린 듯 쥬다스에게로 다가가 그 손바닥에 놓인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해동 여성들의 머리장식으로 사용되는 길고 가느다란 장신구가 맑은 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교하게 주작이 새겨진 옥비녀였다.

‘주작의 증표.’

연수호는 물건을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신수는 해동 왕가와 계약할 때마다 각각 그에 알맞은 증표를 선사하곤 했다.

이를 보통 ‘신물’이라 부르는데, 신물마다 신수의 힘이 깃들어 계약자가 원할 경우 그 힘을 나눠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매개체로 활용되었다.

“저건 신물입니다. 사방신수 중 주작의 힘이 깃든 증표로 계약자가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주작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에에엥. 어차피 정령이 계약자에게서 떨어져 있을 일은 없지 않다요?」

「쟤넨 동물계잖아. 동물계는 원래 잘 돌아다녀.」

「보세요, 토니. 가야도 지금 없잖아요.」

「진짜다요! 가야는 어디 갔다요?」

카니의 말대로 청룡 가야는 현재 쥬다스의 곁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계약자의 곁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자연계 정령들과 달리 동물계는 자유의지가 강해 자기가 원할 때만 나타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친화력이 낮은 경우엔 술사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렇다면 계약이 끝나면서 도로 신수가 회수해가는 게 아닙니까?”

“아니요. 사방신수께선 신물을 따로 회수하지 않으십니다.”

사대신수의 신물들은 궁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새로운 신수의 시대가 열릴 때 물려주는 식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새 계약자가 생기지 않자 신물은 주인 없이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

왕궁에서 관리하던 신물들은 너무 시간이 흐른 탓에 이제 각 보고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자칫 귀중한 신물을 영영 잃어버릴 뻔했군요.”

‘다른 신물들도 무사히 보존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연수호는 불타버린 헌 석탑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작의 신물을 보고 당혹스런 심경에 더해 어찌 되었든 신물을 찾았다는 안도감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분이 동시에 들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청룡의 신물은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께 가야 할 물건이니. 곧 찾아서 드리겠습니다.”

그간 사방신수의 신물 네 개 모두가 해동 왕가의 국보로 전해져 내려오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계약자일 때 이야기다.

신물은 본래 해동의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신수의 것이니 새 계약자가 생겼다면 응당 그에게 돌려주는 게 맞았다.

쥬다스는 주작의 신물을 수호에게 건네주고 바이칼과 함께 처소로 돌아왔다.

폭발 소리를 듣긴 했으나 자리를 지키란 명에 의해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던 에단이 눈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바이칼은 지레 찔끔하여 마주쳤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변호할 기회를 주지.”

“잘못했습니다…….”

“알긴 알아서 다행이군.”

“삐이이!”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플루비도 함께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곧 정신교육이란 명목으로 기사단 전원이 소집되었고 그날 하루는 그들에게 있어 해동에 온 이후 가장 잊고 싶은 날로 손꼽히는 최악의 날로 기록되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성왕 이서윤 앞으로 급보가 날아왔다.

‘그래.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구나.’

서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예측하지 못한 바가 아니라 결단은 빨랐다. 그는 최종적으로 명을 내리기 전에 소식이 적힌 서신을 들고 청룡을 찾아갔다.

「서윤이다냥.」

다행히 가야는 멀리 가지 않고 쥬다스의 곁에 돌아와 있었다.

쥬다스는 모여 있던 수하들과 함께 일어서서 외숙을 반겼으며 서윤도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구석에서 실뭉치를 입에 물고 뒹굴거리던 백호가 반가운 기색으로 이서윤의 주변을 슬슬 맴돌았다.

“청룡께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 서윤.”

마침 귤을 하나 까고 있던 가야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휙!

반쯤 까다만 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귤을 받아 들었다. 매우 싱싱하고 상큼한 향이 나는 귤이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아……. 예? 아니, 그건 아직. 일단 사안이 급박하여.”

“그럼 밥부터 먹자. 점심시간이야.”

태연하게 식사를 챙기자는 가야의 제안을 서윤은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서신을 들고 중한 얘기를 전하러 온 자리인데 엉뚱하게 수저를 들게 됐다.

이서윤은 나무토막이라도 씹는 듯 밥알을 입안에 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

“왜. 맛없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절인 연근 좋아했잖아. 하긴 어렸을 때니까 입맛이 바뀔 순 있지. 그럼 이젠 싫어졌나?”

“아뇨. 아직 좋아합니다.”

가야가 대뜸 반찬을 집어주는 바람에 서윤은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난 뒤에야 그가 아직 자신에 대해 기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룡은 쥬다스와 계약하면서 성격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려 도저히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친절함은 사라지고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태도와 퉁명스러움만 남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아예 자신이 알고 있던 청룡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를 대했다. 그랬는데 청룡의 본질은 그대로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서윤은 새삼스럽게 감동한 얼굴로 가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마주 본 가야가 대뜸 다시 물었다.

“그래서 현무냐? 주작이냐? 아니면 둘 다?”

“예?”

“하려던 말. 녀석들 얘기 아냐?”

“아. 그렇지요.”

제 조카 앞에서는 늘 어른스럽게 굴던 이서윤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청룡에게만큼은 아직 애나 다름없었다.

쥬다스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서윤이 멋쩍게 헛기침을 흘린 후 설명을 시작했다.

“현무와 주작 두 분 모두입니다. 각 남쪽령과 수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수도면 여기? 기운을 읽기 어려운 걸 보니 확실히 둘 다 사령화가 진행된 모양이고. 그래서 이쪽엔 누가 왔는데?”

“여기 호성에는 주작께서 현신하셨습니다.”

‘주작이라.’

가야는 닭다리를 하나 입에 문 채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주인.”

“음?”

“주작은 내가 맡을게.”

마치 오늘 저녁에 먹을 반찬 고르듯 간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컸다.

쥬다스는 잠시 침묵을 택했다. ‘괜찮겠냐’거나 ‘안 된다’는 말 대신 가만히 응시하는 계약자를 향해 가야는 말을 덧붙였다.

“난 현무와는 상성이 별로야. 상대하기엔 주작이 편해. 같은 하늘 계열이기도 하고.”

「날개는 주작만 달렸지만냥.」

“그러게. 역시 나도 날개를 좀 달아볼까?”

「시끄럽다냥. 하늘을 지배하는 청룡이 굳이 날개를 달 필요가 뭐가 있다냥!」

“아니, 그렇게 치면 자연계 바람정령은 대체 왜 날개를 다는데?”

「응?」

쥬다스의 어깨에 잠자코 앉아 있던 유니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포로록 날아 백호의 이마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예쁘잖아. 자고로 날개는 패션의 완성이라구.」

“거봐. 예뻐서라잖아.”

「……내가 졌다냥. 날개를 달든 머리를 길러서 묶든 알아서 하라냐.」

백호는 긴 한숨과 함께 항복을 선언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패완날이죠! (...)

모 게임에서 흰천사날개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크흑....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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