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75화 (17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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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그림자밟기

「어쨌든 네가 주작을 맡겠다면 현무 쪽은 내가 가겠다냥.」

“아서라, 야옹아. 현무한테 넌 무리야.”

「뭐라냥? 청룡 네가 현무랑 상성이 나쁜 거지 난 상관없다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시끄럽다냥.」

백호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명했다.

쥬다스의 무릎 위에 뛰어올라 새침하게 홱 고개를 돌린 백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가야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며 이유를 알려주었다.

“지금의 너는 힘을 사용하지 못하잖아.”

「……므앙.」

하얀 꼬리가 맥없이 바닥을 쓸었다.

“계약자가 없는 백호는 그저 조금 튼튼한 야옹이일 뿐이지. 해동을 돕겠다는 생각이 아직 유요하다면 남쪽은 주인이 맡아주는 게 가장 이상적이야.”

가야의 말에 모든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모여들었다.

그와 란, 서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백호가 하는 말까진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쥬다스는 백호의 등을 쓸어주며 답했다.

“백호도 여기 남아 가야를 도와주련.”

「싫다냥. 차라리 현무를 보러 갈 거다냥. 청룡이랑 둘이 두지 말라냥!」

그러자 가야가 심드렁하니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너랑 붙어 있을 건 아닌데…….”

「도와줘야 한다잖냥.」

“도와줄 필요도 없는데.”

「하여튼 예쁜 구석이라곤 없다냐.」

백호가 투덜거리는 걸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윤이 다시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 지금 아가 네가 남쪽으로 내려가 현무를 막겠다는 뜻이냐?”

“예. 현재 수도에 있는 병력이라면 이번 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남쪽 현무는 제가 막아볼 터이니 이대로 수도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만 일단 집중해 주십시오.”

남쪽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맡겨달라는 의미였다.

이서윤은 조카를 향해 처음으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럴 수 없다.”

단호한 거부였다.

“신수 청룡께서 도와주시도록 힘써준 것만으로도 네게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단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

“후우, 어린 네 앞에서 객기를 부리지는 않으마. 지금은 해동의 위기가 맞아. 그러나.”

이서윤은 한숨과 함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사실 속내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들이치는 폭우와도 같은 심경이었다.

“어려움이 있다 하여 핏줄을 대신 전장에 내보내고 근심을 덜어낸다면 그게 무에 소용일까. 우리 해동이 이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엉망진창인 국가였다면 천 년도 넘게 명맥을 이어오지 못했을 거다. 어려움은 직접 해결할 터이니 이 외숙부를 믿고 크게 염려하지 말거라.”

“외숙.”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그게 아닙니다.”

“응?”

다시 한 번 단단히 엄포를 놓을 셈이던 이서윤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금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보자 희한할 정도로 격해졌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윤이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쥬다스는 잔잔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외숙의 말씀대로 해동을 위해서 하는 일은 가야를 수도에 남겨두는 것뿐. 제가 지금 현무가 나타난 남쪽지역으로 가려는 이유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이 나라에 도움을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구나.”

성왕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조카가 하려는 말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고개를 끄덕여 그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그 애정 어린 신뢰를 알아본 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서서히 지웠다.

“프리드 길리아노.”

“……?”

해동이 아닌 제국식 이름이다. 분명 누군가의 이름 같긴 한데 통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제국인과 해동인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길리아노……?’

제국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인 공작가문 헤이가의 일원으로 자라난 에단은 제국의 귀족들에 대한 정보가 전부 샅샅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프리드’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름 끝에 붙은 가문명은 알아볼 법했다. 그러나.

‘아니. 루바르잔 제국에 길리아노라는 가문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작가 자제인데다 암기로는 더욱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크리스티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다.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의문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는 사이 쥬다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신수 주작과 현무를 어둠에 물들인 사령술사의 이름입니다.”

“뭐?”

프리드가 태어난 가문 길리아노는 이미 수십 년 전 멸문하여 역사의 책장 너머로 사라졌다.

당연히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스무 해가 되어가는 청년들이 알 리 없는 내용이다.

제국에 현존하는 귀족 가문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 와중에 이미 멸문하여 사라지고 없는 귀족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저는 그를 만나고자 합니다.”

“‘프리드 길리아노’라고? 그에 대해 어찌 알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아가. 지금 그 사령술사가 남쪽에 현무와 함께 나타났을 거란 추측은 어떤 근거로 인한 게냐?”

쥬다스는 프리드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극을 만들어 내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프리드도 알고 있으리란 계산도 이미 끝난 후였다.

만일 사령에 잠식당한 주작과 현무에게 동시에 수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어도 쥬다스가 버티고 있는 한 역부족이다.

그런 마당에 각 신수를 북쪽에 있는 수도와,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에 따로 떨어뜨려 보내왔다는 건 특정 의미를 품고 있는 짓이었다.

‘내게 보내는 초대장이겠구나.’

프리드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이그레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면승부로 도전해 올 무모한 자가 아니다. 대신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단 타인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지난번 사야 황후 사건 때에도 그랬고 신수를 타락시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쥬다스는 이 모든 추측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지금 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자는 제국에서도 수많은 인명을 살해한 중한 범죄자이며 국가와 종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인 행위를 저지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면 그런 자를 너 혼자 가서 막겠다는 것이냐?”

“이 정도면 혼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쥬다스는 눈으로 빙글 주변을 훑으며 되물었다.

그의 곁에는 호위를 위해 따라온 친위기사단을 비롯해 크리스티나와 콜, 세이지 등 제법 많은 인원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서윤은 기껏 이마에서 떼어냈던 손바닥으로 이번엔 얼굴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 말이 아니잖니…….”

“정 우려되시거든 수도 쪽 상황을 먼저 정리하신 후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사실 주작과 현무가 적으로 나타난 이상 한시가 급한 상황이긴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목숨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 쥬다스는 해동을 돕는다는 명목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움직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였다.

서윤은 더 이상 조카를 말리지 못하고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을 안내해 줄 장수를 보내주도록 하마.”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르륵-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녹색 바람결이 주변을 휘감았다.

허공에서 까르륵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유니를 발견한 이서윤이 놀라 선 채로 굳은 사이 쥬다스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유니. 현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본래 바람의 인도는 술사가 방문한 적 있는 장소에만 사용이 가능한 정령술이다.

하지만 정령왕인 유니는 거기에 더해 자신이 알고 있는 특정인물을 목적지로 삼아 이동술을 펼칠 수도 있었다.

지난번 바위산에 있던 프리드를 찾아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원리로 바람을 다뤘다.

정령의 바람이 몰려들자 반딧불이가 가득 든 호롱처럼 주변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후웅-

눈 깜짝할 사이 바람은 사람들을 감싸고 팟 하고 흩어졌다.

마치 구름이 흩어지듯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이 홀연히 자리에서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건 성왕 이서윤과 그의 호위 정다울, 청룡 가야와 백호뿐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서윤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다녀오겠단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게냐. 이거 원, 누구 아들이라고 어쩌면 내게 이리도 똑같이 매몰찬 것이야.”

이서윤의 뇌리에는 아직도 누이의 마지막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이는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잘 다녀오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어주곤 다음 날 홀연히 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제국의 황제를 사랑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이제 하윤이 그날 국가를 위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건 아니란 사실만큼은 확실할 수 있었다.

‘너는 스스로 떠나는 걸 선택한 거야. 네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어.’

누이를 똑 빼닮은 조카가 알려주었다. 아이는 결코 거짓된 웃음은 짓지 않았다.

“……다녀오려무나.”

서윤은 힘주어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홱 돌아섰다.

이미 떠난 자리를 보며 미련을 갖는 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미련일 뿐임을 지금은 알고 있질 않나.

이서윤은 그리 생각하며 성큼성큼 건물 밖으로 나섰다.

왕의 뒤를 호위와 두 신수가 조용히 따랐다.

* * *

갑자기 땅이 녹아내리며 검은 늪이 생겼다.

끈적거리고 차가운 액체가 땅을 삼키고 나무를 삼키며 논밭을 삼켰다. 집은 불타는 대신 늪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부모와 아이가 늪에 빠져 생이별을 해야만 했고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지상이 침몰했다.

창칼도 주술도 소용없다. 군졸은 인명을 구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함께 무너져 갔다.

마치 땅을 감염시키는 전염병처럼 그렇게 검은 늪이 증식했으며 땅을 딛고 선 모든 것이 그 아래로 가라앉았다.

재난, 재해.

생전 본 적 없는 끔찍한 사태를 두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천벌’이라고 말했다.

“하늘님께서 노하신 게 틀림없어.”

“하늘이여! 벌을 거두어주십시오!”

아무리 기도를 올려봤자 하늘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검게 물든 건 하늘이 아닌 땅이었고, 땅을 물들인 건 흙과 돌이 아닌 새카만 물이다.

“으아앙!”

부모를 잃은 아이가 나무기둥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 나무도 점점 검은 늪에 가라앉는 중이었다. 공포에 질린 아이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박!

웃옷을 입지 않아 맨살을 드러낸 사내가 검은 늪을 밟고 서 있었다.

맨발이었는데도 늪에 빠지지 않고 굳은 땅을 밟은 듯 유유히 선 사내를 발견한 아이가 울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무님……?”

해동의 아이라면 사방신수에 대해 동네친구보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해동에서 신수들은 동화나 전설, 민담 등으로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고 실제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었다.

아이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를 보고 청룡이나 현무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의 눈앞에 무료한 표정으로 서있는 존재는 사방신수 중 현무가 맞았다.

그는 희망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 정말 현무님이에요? 우리 마을을 지켜주러 오신 거예요?”

“…….”

마치 구원이라도 해줄 듯 내밀어진 손을 향해 아이가 나무기둥을 놓고 그를 향해 마주 두 손을 뻗었다.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현무는 살짝 손을 뒤로 물렸다.

어? 하는 사이에 아이는 늪에 풍덩 빠져버렸다. 꿀렁이는 검은 액체가 굶은 하이에나 떼처럼 아이를 덮쳤다.

“현무님! 도와주세요, 현무님!”

그러나 기다리는 구원은 찾아오지 않는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고 기대가 포기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지켜야 할 대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그저 차갑게 죽은 눈으로 늪에 잠겨가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른 생명을 꺼뜨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그가 옮기는 걸음마다 검은 늪이 번져나가 지상을 물들였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신수가 아니었다.

흑현무 ‘헤로드’.

사령에게 잠식당한 새로운 마수의 이름이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허억 통영에서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ㅎ

뭔가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모처럼 즐겁게 놀다 돌아가네요. 아하하.(케이블카도 타봤습니다! 비가 와서 경치가 흐리긴 했지만 공기는 좋더군요 ㅎㅎ 짠 바다공기...!)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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